[2월 Theme] 나머지를 품고 우리는 계속 가네
[2월 Theme] 나머지를 품고 우리는 계속 가네
  • 양경언(문학평론가)
  • 승인 2020.02.05 14: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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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오늘의 시' 수상 시인 안희연 인터뷰

진심을 전한다고 전했는데 정작 진심을 담은 말이 멀리 날아갈까 싶어 두려움이 일었던 경험이 있는 당신이라면, 안희연의 시를 읽었으면 한다. 그런 당신은 당신과 당신의 상대가 나눈 말에 담겨야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고심할 줄 아는 사람이므로. 말 뿐 아니라 말에 관한 태도가 결국엔 무언가를 해낼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므로. 그러니까, 눈으론 보이지 않는다 해도 감쪽같이 일어나는 마음의 일이 사람을 얼마나 다른 상태로 바꾸어낼 수 있는지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므로. 그런 당신과 함께 고민하는 자리에 안희연의 시가 있다. 벌어진 일 이후뿐 아니라 그 이전에 남겨진 무언가 역시 제대로 돌볼 줄 알아야 한다고 여기는 시, 그 ‘남겨진’ 무언가가 오늘의 일부가 되어 내일로 가는 길을 만들어주기도 함을 일러주는 시. 풍부한 햇빛과 알싸한 공기가 공존하는 한겨울의 오전에 이런 시를 쓰는 사람과 만나 나눈 대화를 전한다.

양경언 (이하 양) 새해 인사와 함께 축하한다는 말씀도 전해요. 수상한 기분이 어떠신지, 간단하게 소감을 여쭙고 싶어요.

안희연 (이하 안) 감사합니다. 2020년이 되고, 휴대폰 애플리케이션으로 재미 삼아 신년 운세를 봤는데 상반기 운세가 별로 안 좋았어요.(웃음) 그래서 내심 위축이 되어 있었는데 연초부터 이렇게 좋은 소식이 전해지니 놀랍고 기쁜 마음입니다. 무엇보다 동료 시인 분들이 직접 뽑아주신 상이라는 게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등단한지 어느덧 9년 차가 되었는데요, 시 쓰는 일에 예전만큼 에너지를 들이고 있는지, 시에 몰두하는 힘이 부족해진 건 아닌지 스스로에게 불만이 쌓여가던 시점이었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큰 응원을 받으니 조금 더 힘을 내자 다짐하게 되네요. 거듭 감사드린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수상한 작품을 썼을 무렵이 기억나시나요? 그때 당시는 무엇에 몰두하고 계셨을 무렵이었을까요?

수상작이 「스페어」라는 이야기를 듣고 사실 좀 놀랐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시는 시선도 너무 협소하고 규모도 작은, 그래서 여러모로 부족한 시라고 생각을 했었거든요. 작년 여름에 썼던 시인데요. 된장찌개를 끓이려고 감자를 다듬는데 싹이 난 부분이 많아서, 칼로 감자를 도려낸 경험에서 출발한 시였어요. 싹을 도려낸 감자를 가만 보고 있으니 구멍 숭숭 뚫린 치즈 같고 어쩐지 안쓰럽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래도 사람 피부는 새 살이 돋기라도 하지 감자는 저렇게 구멍 뚫린 몸을 자신의 몫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구나, 싶어서요.

보기 싫다고 도려내면 희고 깨끗하고 완벽해질 것 같지만 실은 그게 아니잖아요. 사정없이 도려내다보면 오히려 더 흉물스럽게 보일 수도 있고요. 나의 못남, 나의 치졸함, 나의 우유부단, 나의 지리멸렬 등은 도려내고 싶다고 도려낼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있는 그대로의 나, 실패하고 남은 나머지의 나머지로서의 나를 사랑하며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담아 쓴 시였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요? 독자분들께 안희연 시인의 하루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주신다면 어떻게 말씀하실지 궁금해요. 시인의 하루는 어떻게 시작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마무리되는지. 일과 중에 ‘시인’의 몸과 마음으로 살아가기 위해 빠뜨리지 않고 하는 일이 있다면 무엇이고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학기 중엔 여러 일들로 정신없이 바쁘게 지냈는데요, 방학을 하고 다행히 여유를 되찾았어요. 일주일에 2~3일은 외출을 하고, 나머지 시간엔 주로 에서 원고를 쓰거나 집안일(?)을 하며 보냅니다. 년 말까지 너무 바쁘게 지내다 보니 번아웃 상태가 되어서 최근에는 삶을 단순화시키려고 많이 노력하고 있어요. 자본주의적 인간에서 시적 인간으로 몸을 만드는 중이라고 할까요. 뭔가 멋들어지게 말은 했으나 늦게 일어나서 일찍 자는 게으른 생활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고요.(웃음) 시인의 몸과 마음으로 살아가기 위해 딱히 의도적인 행위를 하진 않지만, 하루 중 단 몇 시간 만이더라도 ‘침묵’하는 시간을 마련하려고 노력하기는 해요. 일종의 묵언 수행이라고 할까요. 말이 고이려면 침묵의 시간이 필연적으로 필요하니까요.

첫 번째 시집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창비,2015)가 2015년에 발행되었고, 그로부터 시간이 좀 흐른 뒤인 2019년에 소시집 『밤이라고 부르는 것들 속에는』(현대문학, 2019)으로 독자분들과 만나셨습니다. 소시집을 읽으면서 안희연 시인이 시를 쓸 때 활용하는 보폭의 넓이가 좀 달라졌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시인으로 활동을 막 시작하셨을 무렵에는 개울가에 놓인 돌다리를 깨금발로 건너듯 말과 말 사이에 간격을 둔다는 인상을 받았다면, 그래서 한 걸음을 내딛을 때 들이는 에너지가 더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이번 시집을 읽을 때에는 시인의 시가 좀 더 자연스럽게 걷기 위해 애를 쓰는 과정에서 오른발과 왼발을 순차적으로 함께 움직인다는 인상이었습니다. 연과 연 사이에 스민 이야기성이 들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 같아요. 첫 시집을 냈을 무렵과 시집을 냈을 무렵, 그리고 최근 시작활동에 있어서 시인 본인이 느끼기에는 무엇이 달라졌는지, 혹은 그럼에도 달라지지 않은 것이 있다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첫 시집을 낼 무렵에는 시도 삶도 너무나 무겁게만 느껴졌어요. 한 문장 쓰고 울고, 그다음 문장 쓰고 또 울고. 정말 그렇게 울면서 써 내려갔던 시들이 첫 시집을 이루었어요. 아프고 뜨거웠거든요. 무엇이 그렇게 아프고 뜨거웠냐고 물으면 모든 것이 그러했다고 밖에는 할 말이 없어요. 존재가, 세계가, 지금 여기가, 살아 있음이 그냥 다 아프고 뜨거웠거든요. 일종의 스펀지 상태였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렇게 시를 쓰니까 우선은 쓰는 제가 너무 힘들었고 읽는 분들도 고통스러우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너무 끙끙거리지 말고 좀 자연스럽게 써보자, 어둠을 어둡게, 무거움을 무겁게만 이야기하지 말고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해보자 하는, 나름의 분투 속에서 두 번째 시집(소시집)을 묶게 됐어요. 민들레 홀씨 후후 불면 바람타고 멀리 날아가듯이 가볍게 멀리까지 가는 방식을 찾아보자 싶었죠. 제게는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 었어요. 너무 가볍기만 하면 어쩌나 싶은 불안도 있었고요.

사실상 시에서 이야기하는 내용이나 본질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여전히 저는 보편적인 삶의 문제들, 인간이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존재론적인 슬픔, 출렁이는 기억에 대해 말하길 좋아하니까요. 시의 형식에 관해서는 계속 고민을 하고 있지만 시의 출발 지점이나 지향은 앞으로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 같아요. 단어를 선택하거나 문장을 쓸 때 몸에 잘 감기는지 아닌지를 살펴보는 편이고, 다소 투박하고 단순하더라도 정확하고 적확한 문장을 써야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안희연 시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책’ 이미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안희연 시인은 왠지 사물이든, 사람이든, 누가 되었든지 간에 모든 존재는 비밀을 품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같아요. 세상의 비밀을 누설하는 방식으로 글을 쓰는 작가가 있고 또 한편으로는 간직하는 방식으로 글을 쓰는 작가가 있다면, 안희연 시인은 간직하는 방식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할애하고 있는 편인 듯하고요. 시인이 비밀을 간직하는 방식이 ‘책’이라는 사물로 드러나는 게 아닐까 싶어요. 이를테면 책은 누군가에게 바로 읽히지 않는다면 영원히 도서관에 잠들어 있어야하지만, 또 누군가에게 읽히는 순간 완전히 다른 세계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되는, 그런 잠재적인 형태로 있는 사물이니까요. 안희연 시인에게 ‘책’이라는 단어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여쭙고 싶었어요. ‘책’이라는 단어에 대한 이야기 뿐 아니라, 최근에 읽는 책은 무엇인지, 어떤 책으로부터 영감을 많이 받고 있는지도 함께 들려주세요.

모든 존재는 비밀을 품고 있다는 생각을 정말 자주 하고요, 그런 비밀을 파헤치고 드러내려 하기보다는 그것을 훼손 없이 잘 보관할 수 있게 울타리를 마련해주는 방식으로 시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한 존재의 삶을 한 권의 책으로 비유할 수 있다면 그중 단 하나의 페이지, 단 한 줄의 문장, 단 하나의 단어에 육박해 들어가고 싶은 욕망이 있어요. 아름다움이라는 책을 펼치면 아름다움의 궁극에 다다르고, 슬픔이라는 책을 펼치면 슬픔의 궁극에 다다르는 방식으로요. 그러니까 제가 꿈꾸는 책은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책 중 하나가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였고 마지막까지 하나일 것이며 복제되거나 소멸되지도 않는 단 하나의 책에 가까울 거예요.

최근에는 메리 올리버의 신작 『긴 호흡』(마음산책, 2019)을 읽으며 큰 감동을 느꼈는데요. 책 쓰는 일을 “개를 목욕시키는 일”에 비유하면서 너무 깨끗하기만 한 책보다는 “편향과 열정이, 그리고 저자의 결함이” 담긴 책을 지향한다는 서문 글이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제가 써 내려갈 책도 편향, 열정, 결함이 고루 담긴 책이었으면 좋겠고요.

 안희연 시인의 최근 소시집을 읽다가, 시 속 화자에게 누군가가 다가오는 일들이 벌어지면서 형성되는 장면들이 인상적으로 느껴졌어요. 화자는 누군가에게 먼저 다가가는 대신에, 자신에게 다가오는 누군가를 느끼고, 그렇게 다가온 누군가를 절대 거부하지 않죠. 그 대신 찬찬히 뜯어보고 마주합니다. 그런 시들을 읽다보면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외부로부터 내게 다가오거나, 달려들거나, 주어지는, 불가피한 일들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요. 삶의 속성이 어떤 ‘불가피한 것’ ‘타율적인 것’에 더 가깝다고 여기시는 편일까요? 그리고 그런 생각에 잠길 때, 시인이 붙잡고 있는 생각은 무엇일까요?

다소 경직된 발언이기는 하지만 저는 세상엔 두 부류의 시인이 있다고 생각해요. 스스로 신이 되어 세상을 축조해나가는 재미를 느끼는 시인과 불가피하게 불시착한 세상에서 여기가 어디지 나는 누구지 끊임없이 두리번거리며 불안해하는 시인. 당연히(?) 저는 후자입니다. 그래서 최근에도 계속 ‘닫힌 세계’ 안에 ‘갇힌 인간’을 그려내는 일에 열중하는 것 같고요. 첫 시집을 묶을 때는 ‘갇힌 인간’ 쪽에 방점이 찍혀 있었던 것 같은데 최근에는 ‘닫힌 세계’ 쪽으로 천천히 시선을 옮겨보고 있어요. 그러니까 무엇이 인간을 길들이는지, 무엇이 이 세계를 떠받치고 있는지를 좀 더 거시적인 차원에서 탐색해보는 중이랄까요. 카메라 기법으로 따지면 줌인이나 클로즈업이 아니라 줌아웃에 가까울 것 같네요. 그것이 권력이든 자본이든 또 다른 무엇이든 인간을 가두고 길들이는 메커니즘을 알면 더 이상 속지 않고 삶 자체를 바라보게 되는 것 같아요. ‘건강하지 않은, 썩은 부분은 도려내야 한다’가 아니라 ‘도려내고 남은 나로 살아간다’ 쪽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거죠. 이런 고민들을 경유하면서 묶을 다음 시집은 이전보다는 좀 더 확장된 것이었으면 싶은데 야심(?)만큼 작품이 잘 따라와 줄지는 영 자신이 없지만요.

마지막으로 드리는 질문이에요. 시인으로서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시인으로서,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우선은 오래도록 쓰는 시인이 되고 싶다는 게 1차적인 소망이고요. ‘오래도록’이라는 말이 새삼스러울 순 있지만 한 편 한편 시를 써 내려갈 때마다 두렵지 않았던 적이 단 한 번도 없거든요. 첫 문장을 쓰기까지도 너무 힘들고 간신히 첫 문장을 쓰고 나면 마지막 문장을 쓸 수 있을까 두렵고요. 그런 두려움을 잘 이겨내면서 어쨌든 오래오래 쓰는 것이 가장 큰 소망입니다. 그리고 제 시를 읽으시는 분들이 제가 쓴 문장에 찔리거나 상처 입지 않도록, 가능한 정직하고 정확한 문장을 써 내려가는 것이 그다음 소망이에요.

 올해는 새 시집 출간이 예정되어 있으니, 무사히 책이 발간될 수 있도록 맘과 몸을 잘 다스려볼게요. 연초에 주신 크디큰 응원을 밑거름 삼아서 좋은 작품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그때까지 건강하고 평안하세요.

 

 

* 《쿨투라》 2020년 2월호(통권 68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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