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Theme] 2020년 한국 시의 미학
[2월 Theme] 2020년 한국 시의 미학
  • 유성호, 홍용희, 함돈균
  • 승인 2020.02.05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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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오늘의 시' 좌담

유성호(이하 유) 안녕하십니까? 오늘 좌담은 지난 한 해 동안 펼쳐졌던 우리 시의 동향을 개괄적으로 점검하고, 또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던 시집들을 큰 틀에서 검토함으로써, 현재 우리 시의 지향이랄까 좌표랄까 하는 것을 성찰하는 자리로 마련되었습니다. 우리 평단에서 가장 활발하고 역량 있는 현장 비평을 해오신 두 분 선생님을 이 자리에 모시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최근 한국 시단은 내외에서 활력과 모순이 함께 점증했고, 문학장 전체의 지각변동이 숱하게 일어난 것 같습니다. 지난해에는 중견에서 중진을 포괄한 층위에서 활달한 자기 성취가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오늘의 시’에 선정된 시와 시집의 목록을 살펴보면, 중진과 중견과 신진 시인들이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씩 이야기해보지요. 먼저 홍용희 선생님께서 신달자와 이태수 그리고 김용락 시집부터 이야기해주시겠습니까?

중진 시인들의 시세계

홍용희(이하 홍) 신달자 시집 『간절함』에는 여느 시집들처럼 다양한 소재와 이미지들이 등장합니다만, 공통적으로 간절한 정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시인은 세상 만물들이 “시간의 최선 1초의 간절함” 속에서 탄생된다는 것을, “모든 역부족들조차 아리아리 간절함”이 배어 있다는 것을 체험적 진정성으로노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러한 간절함은 그의 시 창작 방법론이기도 합니다. 그가 “팔순 정상이 저기쯤인데”(「망치」)도 시적 긴장력과 절조를 잠시도 잃지 않는 주된 배경이 여기에 있다고 할 것 입니다.

특히 그는 이번 시집에서 자신의 내면 정서를 직정적으로 드러내는 작품을 전면에 배치하고 있어 주목됩니다. 「막막함」, 「아득함」, 「심란함」, 「불안함」, 「외로움」, 「적막함」, 「졸여짐」 등등의 가장 보편적인 정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보편적 정서들이 마치 사금파리처럼 매우 내밀하고 견고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그는 “졸여짐”에 대해 “무지근한 내 나이가섭섭잖게 정(情)도 들었으니/소나무 껍질로 마음을 둘렀으니/저 혼자 타다 숯이나 되지 않겠는가.”라고 전언합니다. 졸여져 마침내 “숯”덩이가 되는 절대고독의 인생론입니다. “나이가 섭섭잖게 정(情)도 들었”다는 이유로 현학적인 관조나 초탈의 포즈를 취하는 일반적인 관행과는 거리가 멀지요. “외로움”에 대해서도 “무서움은 이내 골수 속으로/깊이 길을 내는 하얀 피/소름이 굳어 그 안에 짓눌려/무숴-어 무숴-어 깡마른 여자”라고 표백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사실은 더욱 강렬하게 엄습하는 “외로움”을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신달자 시집 전반에서 배어나오는 “간절함”의 정감은 어떤 젊은 시인보다 투명한 자기 응시와 정직성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점이 또한 그가 연륜이 더할수록 모든 존재자의 보편적 정서를 더욱 치명적으로 날카롭게 느끼고 노래할 수 있는 저력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태수 시집 『내가 나에게』는 근자의 우리 시에서 만나기 어려운 자연물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옛 우물, 눈, 향나무, 비비추꽃, 기차역, 홍매화, 벚나무, 달맞이꽃, 별 등등이 환하게 펼쳐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시집의 정조와 어감은 맑고 순연하고 소박합니다. 그는 이러한 자연의 기운과 미감을 감상하고 동경하면서 스스로 내적 동일화를 지향합니다. 그렇다면 그가 자신을 자연물들과 동일화하는 방법론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연의 섭리에 순명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물을 마신다/아래로 내려가는 물,/나는 물과 더불어 흘러간다/물은 언제나 멈추기를 싫어한다/개울물이 아래로 흘러가고/강물은 몸을 비틀면서 내려간다”(「물, 또는 내려가기」)고 노래합니다. 노자의 상선약수(上善若水)를 연상시킵니다. 아무리 높은 산정에서 쏟아 부어도 낮게 낮게 아래로 흐르지만, 마침내는 그 무엇도 감당할 수 없는 큰 힘을 지닌 강물을 이루어내는 이치이지요.

시인은 “물을 마시”면서 물의 이치를 내면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시적 화자 역시 자연의 리듬과 공명하면서 스스로 자연과의 동일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러한 자연과의 동일성 회복은 곧 자신의 본모습에 대한 발견을 가능하게 하게합니다. “때마침 저녁놀보다도 느릿느릿/저만큼서 누군가가 다가온다/하지만 가까이 오지는 않고/다가올 때처럼 손을 흔들며 멀어진다/나는 어렴풋이 그를 느낀다/알 듯하고 모를 듯도 하지만/내가 기다렸던 나였던 것 같다”(「다시 부재(不在)」)고 하면서 시인은 “내가 기다렸던 나”를 만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이태수의 자연의 화음을 노래하는 순백한 서정은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원로 시인의 평명한 삶의 일상과 정신세계의 그윽함을 유감없이 만나고 느낄 수 있는 시집입니다.

 

김용락 시집 『하염없이 낮은 지붕』은 하염없이 낮고 유순하고 착한 정조가 시적 중심음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는 “선(善)한 것들이 남모르게 이 세상을 이끌어”(「양」)간다는 잠언을 믿으면서 이를 스스로 실현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인식하는 “선한 것들”의 본질과 실체는 과연 무엇일까요? 이에 대해 김용락은 자신의 경험의 지층을 구성하는 기억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에게 과거의 기억은, 이를테면 베르그송이 『물질과 기억』에서 설명한 ‘지속으로서 본성’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지속으로서 본성’에 해당하는 기억을 환기하는 방법론은 의지적이 아니라 무의지적입니다.

다시 말해 그는 현재의 상황 속에서 비지각적으로 유사성이 열리는 순간들을 맞이합니다. 마치 그에게 시적 이미지들은 무의지적 기억을 불러내는 공간이며 계기로 이해된다는 것이지요. 이를테면 그는 “캄보디아”에서 “한국에서 온 축구공과 학용품/그걸 기다리는 아이들의 피곤한 표정”을 보는 순간 “단촌초등학교 운동장/미제 우유와 옥수숫가루 배급을 줄 서 기다리던”(「캄보디아 시편2」) 풍경과 만나고, “큰 느티나무 한 그루”(「인생」) 아래에서 친구와의 이별, 소년의 독서, 아버지의 죽음과 애도 등의 화석화된 풍경들이 수런수런 깨어나는 것을 목도합니다. 그의 시편에서 이처럼 현재가 과거의 순박하고 순정했던 주변 사람들의 인생사를 불러내는 계기로 작용하는 경우는 매우 빈번하게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의 시세계가 과거의 시학에 침잠하고 있음을 가리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에게 과거는 스스로 「서울 촛불」에서 직접 언급하고 있는 바처럼 “환지본처(還至本處)” 즉 본래의 자리가 미래의 이정표라는 인식에 기반합니다. 발터 벤야민이 힘주어 강조했던 말이기도 하지요. “과거는 구원으로 지시하는 어떤 은밀한 지침이 있다”고. 김용락 역시 과거는 현재적 역동 또는 미래를 향한 묵시적 원형으로서 존재합니다. 그가 세계 구석구석에 “착한 한류”(「베트남 붕따우 예수상」)의 확산을 향해 나아갈수록 과거의 기억을 소환하는 것은 이를 반증하는 것이라고 하겠지요. 이를테면, 그에게 미래지향적인 지속가능한 한류미학의 원형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환지본처의 본모습을 제시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다음으로 최문자 시집으로 가보겠습니다.

함동균(이하 함) 최문자 시집 『우리가 훔친 것들이 만발한다』는 ‘고백’의 시집입니다. 시집의 제목 ‘훔친 것들’은 그 고백의 내용들과 대상들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훔친 것들’은 내밀한 것이며 남에게 함부로 보여줄 수 없는 것이라는 점에서 누구에게도 쉽게 드러낼 수 없는 ‘고백’과 동류의 차원에 있습니다. 드러낼 수 없는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삶의 ‘진실’의 층위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바꿔 말해 진실을 드러내기 어려운 것이 일상이며, 진실이 억압되거나 왜곡되어 있는 모양이 삶의 통속성을 이룹니다.

시는 진실을 드러내는 탈일상의 특별한 장이자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시 자체가 고백의 한 형식일 수도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고백’은 호모로게인(homologein)이라는 말로 불렀는데, 이는 ‘같은 것(진실. 실재)을 말한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시인은 시집에서 드러내고자 했으나 고통과 억압으로 인해 드러낼 수 없던 것을 드러냄으로써 자기 진실과 화해하고, 그럼으로써 그것이 그 자체로 시적인 것이며, 신과 만나는 길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자기 일치의 형식은 그러므로 고통의 발화이기도 하지만 진정으로 시의 자아가 자유와 만나는 한 감동적인 장을 보여줍니다. 개인의 슬픔과 고통이 미래의 희망으로 만발할 수 있는 가능성과 신비를 보여주는 성숙한 언어의 한 경지를 보여주는 숙연한 시집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노향림 시집 『푸른 편지』와 최동호 시집 『제왕나비』에 대하여 말씀드려보겠습니다. 먼저 노향림 시집은 시인 자신이 경험한 시적 순간에 대한 언어적 재현의 결실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노향림의 시에서 경험하게 되는 것은 사물이나 상황을 고유하게 해석하고 판단하는 주체의 활달하고도 심미적인 정서적 반응입니다. 나아가 시인은 그러한 순간에 대한 기억에 매진하면서 그것이 어떠한 파생적 의미를 지니는지 깊이 질문해갑니다. 사물의 표면을 뚫고 들어가 가장 근원적인 존재 자체를 궁구하려는 시편의 경우에는, 현란한 언어적 실험 의지를 넘어 근원적 생의 기억을 되묻는 노향림만의 시적 위의가 빛을 발합니다. 그렇게 그의 이번 시집은우리의 공동체적 기억을 묘사하면서 그 기억의 근원적 의미를 묻는 대표 사례로 각인되어오는 것입니다.

시인이 가닿은 기억 속에는 구체적 일상의 힘겨운 무게를 지고 느릿하게 통과해가는 시간이 농울치고 있는데, ‘폐염전’이나 ‘무량리’는 그 기억이 가득한 ‘시간의 공간’인 셈이고, 시인은 그 안으로 직핍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근원적 시간 경험을 밀도 있게 치러내게끔 해줍니다. 결국 노향림의 시는 근원적 시간을 지워버리는 세속적 효율성에서 훌쩍 벗어나 흔적이나 그림자를 따라가며 헤아릴 때 비로소 나오는 시간 개념을 복원합니다. 그렇게 “한겨울에도 빛을 발하는 저 나무들”(「힐링 캠프」)처럼 “매시간 숨죽이며 듣는 내 안의 낙타 소리”(「시계는 낙타 울음소리로 운다」)를 “생의 미궁을 보아버린 자의 의연함으로/적멸을 향한 자의 처연함으로”(「꽃이 지면 날개만 남는다」) 듣고 노래한 노향림 시집은, 존재론적 원적으로서의 사랑의 기억을 융융하고 아름답게 담아낸 심미적 풍경으로 남을 것입니다.

최동호 시집 『제왕나비』는 오랜만에 펴낸 시인의 야심작입니다. 최동호의 시세계에는 단형 서정시, 서술시, 이야기시 등이 고루 발견됩니다. 『비단불꽃벌레』에서부터 여러 형식의 시편들이 주밀하게 배열되는 경향이 지속적으로 보입니다. 일관된 형식 미학적 의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시인이 정신주의 기획 이후 30년간 천착해온 형식의 문제에 대한 답을 제공한 것 같습니다. 그동안 최동호 시학은 ‘극서정시’라는 형식적 독자성과 ‘정신주의’라는 태도나 지향성으로 많이 설명되어온 것 같습니다. 이번 시집도 크게는 그러한 범주에 흔연히 귀속할 것 같습니다.

이번 시집에는 ‘빛’이 가득합니다. 먼 밤의 빛, 환한 대지의 빛, 그리고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푸른빛 들이 일렁입니다. 빛의 형이상학을 향한 고독한 시인의 길이 여기저기서 비쳐옵니다. 시집의 또 다른 키워드인 ‘나비’는 가녀린 날갯짓으로 그 모든 빛의 시간을 뜨개질하고 있을 터입니다. 「플라스틱 명찰」 같은 작품을 보면 ‘자연인 최동호’의 최근 모습이 실감 있게 떠오릅니다. 서정시의 일인칭 문법을 본격적으로 도입한 시라고 할 수 있겠지요. 시인의 연령이나 삶의 어떤 이력을 반영한 시편들도 이번 시집에는 불가피하게 많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중학생」이라는 아름다운 시도 있고요. 저는 그동안 최동호 시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극서정시’와 ‘정신주의’에 대한 담론적 적용이 너무 과하여 개별 시편의 육체성을 향유하는 데는 좀 소홀하지 않았나 하는 점을 비평적으로 반성해 볼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이제 촘촘한 읽기에서 출발하여 개별 작품 속에서 담론을 재질서화하는 읽기가 필요한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해봅니다.

 

중견 시인들의 시세계

이제는 한국 시의 중간 세대라고 할 수 있는 시인들로 가볼까요? 이분들의 성취는 한국 시의 자산을 예감케 한다는 점에서 퍽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먼저 함돈균 선생님께서 나희덕 시집에 대해 의견을 말씀해주시지요.

많은 서정시가 시인 개인의 일상 경험을 중심으로 길어 올린 것들이라면 나희덕 시집 『파일명 서정시』는 문학의 공동체성을 증언하는 기록입니다. 이 경우에 시인이 지극히 한 개인의 목소리로 말할지라도 그것은 시대적 증언의 성격을 띱니다. 「파일명 서정시」에서 한 시인의 삶의 세부적 시간은 그것이 자연과 나눈 대화일지라도 공동체성을 띨 수 있음을 드러냅니다. 지극히 인간적인 사랑의 고뇌조차도. ‘서정시’는 개인적 에고를 넘어서서 역사적 인간의 공동성을 드러내는 ‘파일’입니다. 나희덕 시인의 이 시집에서 시의 언어는 망실된 기억, 불가능한 목소리, 억압된 말, 재현되지 못한 실재를 소환하는 언어입니다. 한 시대의 비극, 한 사회의 비극이 인류적 비극의 역사와 병치되며, 한 시인의 목소리가 비극적 공동성을 환기합니다. 어떤 사건을 통해 비극이 ‘발생’하지 않아도, 삶의 일상에 억압과 폭력은 편재합니다.

시인은 “귀를 틀어막고 지나는 사람들”에게 “이 노래를 들어보세요”(「붉은 텐트」)라고 말합니다. 일상인들의 생각과는 달리 시인은 시가 ‘힐링’의 기대를 배반하고 삶의 실재를 자각하게 하는 쎄이렌의 소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회적 재난이나 역사의 비극은 생각보다 쉽게 잊힙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안온한 일상이 시간의 층위 밑으로 그 비극성을 가리고 덮어버립니다. 그러나 비명은 휘발된 듯하지만 상처는 공동공간 속에 상재합니다. 이 시집은 ‘서정시’에 대한 낭만적 오해를 불식시키는데 사력을 다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정시의 한 표정과 좌표를 보여줍니다.

다음으로 홍용희 선생님께서는 조정인의 시세계를 개관해주시지요.

조정인 시집 『사과 얼마예요』의 시적 언어와 이미지들은 제각기 살아서 활동하는 “말의 뼛조각”이며 “말의 검은 담즙” 같은 사물로 존재합니다. 시적 언어와 이미지들이 의사소통의 수단으로서 기호이기보다 창조하고 명명하는 주체에 가깝습니다. 다시 말해, 그의 시적 언어는 태초의 ‘아담의 언어’의 속성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지요. 책 제목을 비롯하여 시집 도처에 등장하는 “사과” 역시 에덴동산의 선악과였던 아담의 사과를 떠올립니다. 성서는 「창세기」에서 ‘되라 하매 되었고, 있으라 함에 있었다’고 설명하지요. 에덴동산에서 사물은 자신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말을 통해 드러났던 것이지요. 언어가 소통의 수단이 아니라 창조의 주체였던 것입니다. 조정인이 ‘아담의 언어’를 지향한다는 것은 창조적 언어, 기표와 기의가 분리되지 않은 신성한 근원의 언어를 지향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의 언어관에 대해 스스로 직접 다음과 같이 상술하고 있어 주목됩니다.

“고독의 흰 목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신은 말을 발명했다. 그의 떨리는 성대에서 싹튼/첫, 발성으로부터 말은 나를 꿈꾸고 예감하고 나를 수소문해 오고/있었다. 누구라도, 세상이 같은 말을 쓰던 단순하고 아름다운 기원에서 온/빛의 낱말들을 쓰는 시절이 있지만 이내, 언어의 슬픈/살점들이 고함을 치며/모였다가 흩어지는 바벨의 붕괴를 맞게 된다.//고립이 참혹한 인간은 책을 발명했다.”(「책이 왔다」) 아담의 언어가 와해되는 태초의 내력을 전언하면서 동시에 책이 이를 대행하고 있다고 전언합니다. 이러한 인식을 전제하기에 그의 시세계는 기호 속에 있는 탈기호적 속성을 최대한 추구하고 구가하는 양상을 보입니다. 이를테면, “온몸으로 구강인 사과가 몰려온다. 사과들의 식욕을 누가 다 감당하랴. ------ 일만 페이지의 구약에서 신약을 곧장 먹어치운 사과의 소화기관은 얼마나 유구한가”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사과가 사과가 아니라 기원의 사과, 에덴의 사과의 흔적인 것이지요. 또한 이런 표현도 있지요. “안개는 천겹 베일을 둘러 주며 입속말을 흘렸다 나는 너의 애초의 입자 너의 정직한 총체, 너를 바라보는 텅 빈 눈동자”(「알비노 보호구역」) 안개가 안개가 아니라 절대자의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조정인 시세계의 이와 같은 아담의 글쓰기의 지향성은 오늘날 비속화된 “신의 폐허” 속에서 “신생의 출몰”(「페이지들」)의 요구와 당위성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신진 시인들의 시세계

이번에는 가장 젊은 세대라고 할 수 있는 시인들로 가보겠습니다.

하재연의 『우주적인 안녕』은 우주적 거리로 측정된 사랑의 생성-소멸에 관한 독창적인 멜랑콜리를 제공합니다. 매우 쓸쓸하지만 특별하게 아름다운 감성을 통해 생명의 감각을 깨어나게 하고 독자를 정화하는 시집입니다. 시집은 사랑의 드라마를 우주에서 일어나는 에너지의 생성-소멸, 에너지의 이동처럼 묘사합니다. 사랑의 드라마는 만상의 이동 경로이며 존재의 메타포이기도 합니다. 예컨대 한때 “흘러넘쳤던 빛의 입자들”(「빛에 관한 연구」)은 이제 어디로 갔을까요. 유한한 빛만으로도 무한한 공간에 충만하게 존재를 드러냈던 그 빛은. 아마 우주의 먼지가 되었을 것입니다. 우주의 그 어떤 것도 예외가 될 수 없는 이 사실은 우주적 운명에 대한 공허를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나 그것을 ‘팩트’로 인식할 때 멜랑콜리는 신파가 아니라 존재의 진리에 대한 각성이 됩니다.

모든 존재는 우주의 먼지가 되며, 우주의 전 존재는 또한 애초에 먼지로부터 왔습니다. 사랑의 유한성은 그러므로 무한한 세계의 투명한 공기, 그것이 일시적으로 연출하는 찬란한 드라마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유한성은 무한성에 참여합니다. 더불어 이 시집에서 한국 시의 어떤 의미심장한 종합이 일어나고 있음이 인지되는 것도 흥미로운 일입니다. 이 시집을 읽으면서 일상의 무한성에 관한 이장욱의 지성적 감각, 외계와 교신하는 김행숙의 낯선 언어, 생의 부조리와 낙천적으로 만나는 이근화의 다정함을 모두 함께 느낄 수 있다면, 하재연의 동료들이기도 했던 그들과 시인이 함께 연대-생성했던 2000년대 한국 시의 전성기 우주를 탐사했던 열혈독자라는 증거일 겁니다.

김민정의 『너의 거기는 작고 나의 여기는 커서 우리들은 헤어지는 중입니다』는 한국 시에서 중견의 자리에 들어선 시인의 독자적인 화법을 보여줍니다. 시집이 출간되어가며 작법의 갱신을 꾀하는 시인들이 있고, 작법의 일관성을 통해 시작 행위 자체를 정체성으로 삼는 시인들이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 이 일관성은 물론 심화됨으로써만이 진화를 보여줄 것입니다. 김민정 시인의 경우 후자에 속하는 시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시집은 결론적으로 말해 진화를 보여주는 시집으로 평가할 만합니다. 시인에게 작법의 일관성은 생활인의 언어감각으로 쓰이는 구어체 화법이 큰 영향을 줍니다.

쉽게 말해 시인은 고상한 말을 쓰지 않는 육두문자 화법으로 유명합니다. 가식과 기만은 이 시인이 가장 혐오하는 세계이며 그가 말을 통해 돌파하려는 적대적 대상이기도 합니다. 말은 사유되기 전에 먼저 구사되고, 구사된 말은 다시 그 말의 물질성을 따라 뒤집어지기도 하고 에너지를 따라 더 나아가기도 합니다. ‘사유된’ 세계가 도처에서 가식적 형상을 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생각하지 않고’ 쓰는 게 시인의 전략인 것입니다. 통통 튀는 언어감각은 유희성을 띠는데, 이것은 ‘생각 없는 시적 자아’, 즉 ‘에고’를 떨쳐내는 중요한 시적 전략입니다.

그러나 정작 말의 유희는 삶의 실재가 존재하는 아이러니에 천착합니다. 있음이 없음이고, 보이는 게 안 보이는 거고, 사는 일이 죽는 일이 됩니다. 시인에게 있어 생은 모순이며 늘 어긋납니다. 어긋남의 감각이 그의 세계관이며, 언어유희조차도 이 페시미즘과 어긋나는 말의 몸짓을 드러내는 한 형태입니다. “너의 거기는 작고 나의 여기는 커서 우리들은 헤어지는 중 입니다”라는 시집 제목은 이 어긋남의 극적인 표현이며 시인다운 형태입니다. 시집의 모든 시에 부제로 쓰인 ‘곡두’라는 ‘환영’은 그 탐구의 다양한 실례들입니다. 2019년 말에 출간되었는데, 에너지의 집중성과 무르익은 화법의 독창성에 있어 가장 주목할 만한 시집 중 하나로 소개하고 싶습니다. 시가 무엇인가, 라는 원론적인 질문을 자주 듣습니다. 여러 가지 규정이 있겠지만 어떤 일상성의 탈각 같은 게 ‘시적 상태’를 일컫는 중요한 조건 중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박소란 시집 『한 사람의 닫힌 문』은 조금은 무뚝뚝한 표정의 말짓을 하고 있습니다. 대개 이 말의 표정은 자기도 모르는 자기에 대한 질문이나, 일상적 풍경의 소소한 대상에 대한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묻건, 풍경의 대상을 묻건, 이 질문에서 현재 삶의 실재성은 의문에 붙여집니다. 실재에 대한 의문은 상실의 감각과 관련됩니다. 여기에는 역시 어떤 사랑의 실종에 관한 경험이 근간을 이룹니다. 빛이었으며 그 빛이 들어오던 열린 문이자 회랑이었던 사랑의 시간은 삶의 현전에 관한 감각을 제공해주었던 시간입니다. 한 사람의 열린 문이 닫힌 문으로 바뀌는 경험, 그것이 역설적으로 시적 각성을 가져옵니다. 환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현실이 문득 가상적인 것으로 느껴지는 소외와 죽음의 낯선 경험. 이 세계의 문이 닫히면서 어떤 살아있는 것과도 진정으로 닿지 않는 고독의 언어가 이 시집의 세계입니다. 감정을 드러내는 형용사도 거의 쓰지 않으면서 시인은 뼈저리게 무뚝뚝하게 묻습니다. “울음소리는 멈추지 않고/더욱더 선명하고/어떻게 웃을 수 있나/어떻게//나는 태어날 수 있나.” 모처럼 ‘고전적 현대시인’의 표상을 보는 것 같은 시집입니다.

권성훈의 『밤은 밤을 열면서』는 제목부터 흥미롭습니다. 밤은 밤과 밤을 여는 밤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밤의 질서는 밤을 지속시키는 힘과 밤으로부터 이탈하는 힘의 “두 갈래 모순된” 긴장의 산물인 것이지요. 실제로 권성훈 시세계의 존재 원리는 앞쪽과 뒤쪽, 삶과 죽음, 안과 밖, 욕계와 환생, 달과 해, 이승과 저승, 입구와 출구 등등이 “뫼비우스 띠”처럼, “배꼽”처럼, “지퍼행간”처럼, “한길 순대”처럼, “변기”처럼 서로 연속성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를 나무의 형상에 빗대어 표현하면 “땅에서 동력을 얻은 뿌리가 하늘로 가지를 치고 가지는 다시 줄기를 키워 땅으로 뿌리를 내린”(「그래서 환생」) 둥근 원형의 형상이 됩니다. 그래서 권성훈 시세계의 음조와 이미지들은 밝고 명랑하고 탄력적이지만 동시에 그 누구의 시세계보다 어둡고 느슨하고 하강적인 속성이 산재합니다. 이 점은 그가 세계의 존재 원리를 대면하고 인식하는 방법론이면서 또한 그만의 시 창작 방법론이라고 할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 인생은 구멍 뚫린 삶이라고 할 것입니다. 인체에서 배꼽은 탄생에 지불되는 흔적이고 다시 되돌아가야할 죽음의 구멍의 표식이지요. 인간은 탯줄을 자르면서 현실계에 진입했다가 현실 삶을 마감하면 다시 탯줄이 잘리기 이전으로 돌아가지요. 그래서 권성훈은 “무엇이든 흔들리는 상처가 구멍을 막고/어디에든 깊어 가는 구멍이 상처를 안”(「배꼽의 각도」)는 것을 노래하고, “비워 내고도 충만한 생애 입김”(「한길 순대」)을 직시합니다. 틈, 결여, 구멍 등의 타나토스적 하강이 전제될 때 채움, 의지, 소유등과 같은 에로스적 상승이 활성하는 이치를 전언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의 시편에서는 “저승가는 길”의 “고적한 슬픔의 문장”도 슬픔의 정조에 갇히지 않습니다. “시작과 끝을 둥글게 포개는 몸피” 같은 “바퀴의 환승”이 세계의 존재 원리라는 것을 이미 통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권성훈 시집은 세계의 존재론적 비의에 대한 날카로운 질문과 발견의 비망록이라고 할 것입니다.

『밤이 계속될 거야』는 신동옥의 네 번째 시집입니다. 신동옥의 시는 음악과 역사 중간쯤에 있거나, 독백과 연설을 가로지르는 어법을 띠고 있거나, 세속의 정치와 신성의 초월을 동시에 욕망하거나 하는 활달한 언어로 남아 있습니다. 이번 시집 역시 자신의 가파른 실존적 외곽성을 증언하면서도 텍스트의 안과 밖에서 무수히 명멸하는 존재자들의 심미적 순간성을 잡아내는 단정함과 민활함이 느껴집니다. 이때 그의 목소리는 소박한 자기 긍정으로 귀결되거나, 대상 자체에 대한 미적 외경으로 나아가거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가혹하게 마멸되어가는 일상의 삶을 포착하는 것을 거부하고, 언어와 사물의 존재 형식을 끝없는 ‘다른 문장’의 불연속적 연속성으로 보여줍니다. 그 불연속적 연속성에서 언어의 따뜻함과 감각의 견고함과 사유의 무량함이 함께 묻어납니다.

그의 시는 현실의 가공할 폭력성을 맵차게 증언하는 정치적 사유와 결합하기도 하고, 열정적인 자기 개진을 스스럼없이 욕망하기도 합니다. 당신의 빛나는 눈동자가 밤이라는 뼈마디를 밝히는 순간, 삶의 연민을 통해 스스로를 빛나게 하는 순간, 신동옥은 “가장 좋은 시는 아직 쓰지 않은 시”(「시작노트」)임을 예감하면서 지금으로서는 최선을 다해 “앙상한 웅얼거림이 모여 숲이 되는 꿈”(「봄빛」)을 꿉니다. 세상의 “입법자고 예외자”(「까메오」)인 시인으로서의 특권과 책무를 가지고 “꿈 속에나 살아 숨 쉴 물신(物神)을 이편 현실로”(「눈 내리는 빨래골」) 구축하면서 “말씨보다 울대가 먼저 지은 몸의 내력”(「화살나무」)임을 입증하는 소리꾼으로서의 면모를 완성해갈 것입니다.

이은규 시집 『오래 속삭여도 좋을 이야기』입니다. 이번 시집은 단아하고도 깊은 언어와 형식을 개성적으로 보여주었고, 특별히 첫 시집 『다정한 호칭』(2012)과 함께 나란히 읽을 때 이은규의 확연하고도 개성적인 미학적 집념과 지향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은규는 역동적 상상력을 통해 사물들의 새로운 질서를 구안하는 창의적 시법을 줄곧 보여온 시인입니다. 이번 시집에서는 내면의 섬세한 감각과 외계의 소소한 흐름을 구체적으로 연결하면서 사라져가는 것들의 애잔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 속에서 새로운 경이를 발견해가는 시인의 시선을 만나게 해줍니다.

선행 시편들의 정성들인 섭렵과 상호텍스트적 확장의 경험들은 그의 언어가 이루어가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되어주었습니다. 절묘하게 이어지고 끊어지는 이야기들이 생의 만만찮은 고통과 치유의 과정을 은유적으로 들려주기도 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우리는 특별히 「오는 봄」, 「매화 풀리다」 등이 단연 뛰어난 가편들이었습니다. 젊은 시인으로서 가지는 섬세한 시선과 감각의 변주, 경쾌함과 어둑함을 결속하는 복합적 시법, 다소 길어진 화법과 의미론적 해석을 지연시키는 사선(斜線)의 미학, 삶과 죽음의 양상을 역설적으로 바라보는 태도, 우울과 명랑이 교차하는 어조 등을 매력적으로 읽을 수 있었습니다. 결국 이은규의 근작들은 매끈하고도 유려한 서정적 언어에 보편적이고 심미적인 순간성과 삶의 깊이를 모두 담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시단의 매우 귀한 존재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정형 미학의 세계

이번에는 제가 정형시 쪽의 성취를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먼저 김영재의 『목련꽃 벙그는 밤』입니다. 이 시조집은 서정시가 가지는 이러한 심미적 역설의 미학을 집약하고 있는 조찰하고도 아름다운 풍경첩이 아닐 수 없겠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시인은 자연 형상의 심미적 잔상들 안에서 번져 나오는 다양한 풍경들을 채집하고 그것을 감각적으로 표현하면서, 그것들로 하여금 근대가 상실한 느릿하고도 풍요로운 역설의 미학을 구축하게끔 하고 있습니다.

김영재 시인이 견지하고 있는 사랑의 힘은 어떤 근원적 귀속처에 대한 오랜 그리움으로 자연스럽게 나아갑니다. 그 그리움 안에는 오래 경험해온 시간이 온축되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시인에게 ‘시’의 시간이란 경험적 시간 자체가 아니라 작품 내적으로 변형되고 재구성된 미학적 시간입니다. 박시교 시인도 강조하였듯이, 김영재는 절벽 낭떠러지 소로를 걸으면서, 삐끗하면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기 마련인 길에 “푸르른 실핏줄들이/ 반대편에서 나를 지킨다”라고 노래합니다. 말과 사람의 위태로운 동행을 통해 이른바 전인미답의 길을 보여줍니다. 시인은 의식 저편에 깃들인 이러한 시간의 형상을 상상적으로 복원하여 현재형을 유추하는데, 그러한 유추는 과거 어느 시간을 향한 매혹으로 나타났다가 그 시간으로 하여금 다시 현재의 삶을 반추케 하게끔 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그의 시력은 일관된 ‘서정’의 원리를 그 나름으로 지켜가면서도, 우리 시조 시단에서 가장 이채로운 실험적 언어들을 선보여온 시간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다른 이들의 시선이 채 가닿지 않은 소재를 응시하면서 새로운 기억을 창출해내고 있는 사례가 될 것입니다.

이달균의 『열도의 등뼈』는 원숙한 시력에 접어든 시인의 견고한 언어적 매무새와 활달한 서정 그리고 심층적 전언의 세련성이 정점을 성취를 이룬 정형 시단의 돌올한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찍이 시조의 본령인 정형성을 충실하게 유지하기도 하고 확장시키기도 하는 탄력적 태도를 보여온 그는 이번 시조집에서도 삶의 본질적 형식과 비의를 통해 주체와 대상이 적극적 관계를 형성하고 관철하는 복합성의 세계를 노래합니다. 이러한 그의 시선과 역량은 이제 우리 시조시단의 우뚝한 범례로 기억할 만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가파른 예술성 고양과 묵직한 현실 관조의 예각성을 강화하면서 그러한 순간이야말로 가장 오랜 시간의 흐름이 함축되어 있다는 것을 증언함으로써 우리 시조시단을 대표하는 사화집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가령 시인은 생의 단조로움을 벗어나 복합적인 겹의 속성을 깊이 인식하면서도 그것을 단호하고 힘찬 정신의 상승 과정으로 직조해가는 역동성을 보여줍니다. 이 점, 이달균의 미학적 수일함을 증명하는 장점입니다. 시인은 좌고우면하거나 머뭇거리지 않고 자신의 시상을 직핍의 힘으로 밀어갑니다. 그런가 하면 이달균 시인은 이번 시조집에서 매우 근원적이고 또 명징한 삶의 이법에 대해 노래합니다. 그것은 시인이 내밀하게 견지해온 그만의 경험과 기억의 몫일 터입니다. 우리가 기억이라고 부르는 것도 사실 시인의 마음에 남아 재구성된 미학적 흔적일 터인데, 시인은 의식 건너편에 있는 이러한 기억을 소환하면서 우리에게 그 세계를 상상적으로 경험시켜줍니다. 그것이 바로 소멸해가는 가치들에 대한 매혹적이고도 아득한 경험을 가져다주게 되는 것입니다.

안희연 시편의 세계

마지막으로 이번에 ‘2020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시’에서 동료 문인들로부터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은 안희연 시편에 대한 이야기로 한번 옮겨볼까요? 이 작품에 대해서는 홍용희 선생님께서 대표로 의견을 주시면 좋을 듯합니다.

안희연의 「스페어」는 “스페어”의 열린 존재성, 가능성, 필요성을 흥미롭게 개진하고 있습니다. “스페어”에 주목할수록 “진짜라는 말”의 허구와 억압이 환기됩니다. “진짜라는 말”은 주변을 온통 무수한 가짜로 조장하고 전락시키지요. 그리하여 “단 하나의 무언가를 갈망하는 태도”를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다른 세계로 향하는 계단” 같은 새로운 통로는 모두 차단됩니다. 이것은 또한, “진짜라는 말”이 없었다면 모두가 “진짜”가 되었을 것임을 가리킵니다. “단 하나의 무언가”가 아니라 다양한 가치가 경계를 넘어서 살아 숨쉬고, “다른 세계로 향하는 계단”이 자유롭게 펼쳐져 있었을 것임을 가리키는 것이지요. “진짜라는 말이” 다양한 가치와 가능성을 차단시키면서 “나를 망가뜨리는” 억압적 대상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짜라는 말이” 가장 진짜가 아니라는 명제가 성립됩니다.

시적 화자는 이러한 명제를 “식탁 위”에 놓인 “싹이 난 감자 한 봉지”를 통해 실감 있게 전언합니다. “저 감자는 정확함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나 본래 어디에도 정확함은 없습니다. 감자 싹은 싹이면서도 독이 아니던가. 감자 싹의 존재성 역시 다양한 속성이 유기적으로 중첩되고 혼재되어 있음을 드러냅니다. 감자 싹을 도려냅니다. “도려낸 모양 그대로의 감자가 남는다”. 감자 싹은 다시 돋지 않습니다. 싹이 있을 때와는 다른 감자입니다. 감자에는 또 다른 “스페어” 감자가 동시적으로 공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스페어”는 “숨겨놓은 조커일 수도” “이미 잊혀진 카드일 수도”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것이 진짜일 수는 없습니다. 이점은 시적 화자 자신의 경우에도 동일합니다. “나를 도려내고 남은 나”, 즉 나 역시 싹이 도려진 감자처럼 나를 도려낸 이후의 나를 살고 있습니다. 나를 구성하고 있는 또 다른 나입니다. 이 또 다른 나를 도려내게 되면 또 다른 나로 살게 될 것입니다. 물론 이때 무엇이 진짜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모두가 진짜이고 모두가 가짜입니다. 어차피 진짜와 가짜의 경계는 없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개성과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단 하나의 무언가”가 아닌 다양한 가치, “다른 세계로 향하는 계단”들이 다채롭게 있을 뿐입니다. 가치의 다원화와 탈중심을 웅변처럼 내세운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유를 흥미롭게 개진하는 언어 감각과 감성이 표나게 빛나는 작품입니다.

감사합니다. 두 분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 《쿨투라》 2020년 2월호(통권 68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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