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형욱 작가의 와인 인문학] 보졸레 누보
[고형욱 작가의 와인 인문학] 보졸레 누보
  • 고형욱(작가, 와인평론가)
  • 승인 2018.12.27 14: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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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졸레 누보 도착!”(Le Beaujolais Nouveau est arrivé!) 매년 11월이면 파리 시내의 와인 숍과 선술집, 작은 레스토랑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포스터 문구다. 그해 가을 수확한 포도로 갓 만든 햇와인이 도착했다는 소식이다. 미국에서는 “보졸레 누보 타임!”(It’s Beaujolais Nouveau Time!)을 외친다. 추수 감사절과 함께 즐기라는 의미로 쓰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추석 때 햅쌀로 밥을 짓고 햇과일로 잔치를 벌이는 것과 유사하다. 술이라는 관점에서 보졸레 누보를 보면 갓 수확한 햅쌀로 빚은 햇막걸리와 가까워 보인다. 김장을 담글 때 먹는 겉절이처럼 보졸레 누보는 신선함이 생명이다. 이듬해 초까지 두고 마시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해에 다 마셔 버리는 게 보졸레 누보의 신선함을 즐기기에 더 어울린다. 1930년대부터 보졸레 누보가 처음 출시되는 날짜는 12월과 11월 사이에 변화가 있었다. 지금처럼 공식적인 출시일이 11월 셋째 주 목요일로 확정된 것은 1985년도의 일이다. 이제는 파리나 뉴욕 쿨투라은 물론 서울의 24시간편의점 에서도 프랑스와 같은 날 보졸레 누보를 구입할 수 있다.

보졸레는 부르고뉴 지방의 남쪽이자, 리용 북쪽에 자리 잡고 있는 지역이름이다. 부르고뉴에서는 피노누아Pinot Noir로 와인을 만들지만, 보졸레에서는 가메Gamay 품종으 로 와인을 만든다. 피노누아가 깊고 그윽한 맛이 장점인 반면, 가메는 떫은맛이 적고 가벼워서 쉽게 숙성되는 품종이다. 그래서 보졸레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햇포도로 와인을 만들어 마시고 동네잔치를 벌이면서 일년 농사를 자축해 왔다. 2차 대전 전까지만 해도 햇와인 잔치는 보졸레 지역에서만 치러지는 작은 축제에 불과했다. 프랑스 사람들에게조차 그해 딴 포도로 만든 와인을 같은 해에 마실 수 있다는 사실은 생경했다. 그런데 유통의 발달로 파리를 비롯한 대 도시까지 보졸레 누보가 공급되고, “보졸레 누보 도착!”이라는 단순 명료한 마케팅이 수반되면서 도시 사람들도 농촌의 축제를 공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일개 지역의 축제가 파리를 중심으로 프랑스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이제는 비행기로 공수되어 전 세계 사람들이 11월 셋째 주 목요일 자정을 기해 보졸레 누보 한 잔을 놓고 건배하는 세상이 되었다.

 

보졸레 지역에서는 전반적으로 무난하고 가벼운 와인이 생산된다. 보르도나 부르고뉴 같은 최고급 와인들은 찾아보기 어렵다. 오래 보관한다고 해봐야 10년가량 숙성시킬 수 있는 와인이 고급에 속한다. 그만큼 보졸레 와인은 대중적이며 가격 또한 저렴한 것이 장점이다. 색깔도 지나치게 짙지 않은 빨간빛이다. 딸기나 체리 같은 향이 주조를 이루며 과실 향을 풍부하게 발산한다.

우리나라에 보졸레 누보가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은 2000년대 초반의 일이다. 11월 셋째 주 목요일이 되면 온 서울이 떠들썩해지곤 했다. 최고급 호텔 연회장이나 한강 유람선을 빌려서 선상 파티를 벌이면서 밤새도록 와인을 즐기곤 했기 때문이다. 유행은 급변하는 것일까. 아니면 지나치게 대중적인 와인이라는 이미지 때문일까. 보졸레 누보 붐은 급속도로 사그라지고 말았다. 와인 문화가 다변화되면서 보졸레 누보에 대한 인기가 예전 같지는 않지만 전 세계에서는 여전히 보졸레 누보 파티가 열린다. 국내에서도 편의점에서 쉽게 보졸레 누보를 구할 수 있다. 대표적인 보졸레 와인 생산 자는 조르주 뒤뵈프Georges Duboeuf다. 전체 보졸레 누보의 20% 가까운 양을 생산하면서 ‘보졸레의 왕’ 이라고 불리는 회사다. 항상 라벨에는 꽃 디자인이 있어서 화사함을 더하던 곳. 2018년 보졸레 누보 라벨 디자인은 샤갈의 그림처럼 밝고 칼라풀하다. 밝은 태양, 하늘을 나는 새, 포도송이와 와인 병, 꽃송이들까지 파란 하늘 아래에서 풍요로움을 뽐내고 있다. 불고기라도 구워 먹으면서 보졸레 누보 한 잔 곁들이면 남프랑스의 풍요로움이 우리의 식탁에 스며들지도 모른다.

 

 

* 《쿨투라》 2018년 12월호(통권 54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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