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Theme] 2020년 한국소설은 어디로 가는가
[2월 Theme] 2020년 한국소설은 어디로 가는가
  • 방민호, 김민정, 허희
  • 승인 2020.02.05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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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오늘의 소설' 좌담

다시 시작하며

김민정(이하 김) 안녕하세요. 오늘 사회를 맡게 된 김민정입니다. 뜻깊은 자리에 함께 할 수 있어 매우 기쁩니다. 경자년 새해를 맞이해 독자들의 끊임없는 요구와 지지에 힘입어 2013년 이후 중단했던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소설』을 다시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오늘의 시’와 ‘오늘의 소설’, 그리고 ‘오늘의 영화’가 함께 모여 한국문학과 문화의 흐름을 살펴볼 수 있는 예술 대통합의 장이 활짝 열린 것입니다. (웃음) 오늘이 그 첫걸음이 되는 역사적인 날입니다. 두 분 평론가님, 덕담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방민호(이하 방) 세간에 화제가 된 《쿨투라》 덕분 아닐까요? 작가 출판사 손정순 대표님 열정에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허희(이하 허) ‘오늘의 소설’ 시리즈는 예전부터 관심 있게 지켜보았는데요. 이렇게 부활하게 돼 반가운 마음이 큽니다. 복간과 더불어 제가 기획위원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되어 영광이고요.

2020년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소설

2020년은 경자년의 해, 쥐의 해라고들 합니다. 쥐는 부(富)와 다산(多産)을 의미하지요. 보름 남짓한 기간 동안 소설가, 평론가, 출판·편집인으로 구성된 100명의 추천위원을 통해 『2020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소설』 추천작을 설문하였습니다. 지금 그 결과가 책상 위에 놓여 있습니다. ‘풍요와 다산’의 해답게 다양한 작품세계를 가진 소설과 소설집 들이 다채롭게 추천되었습니다. 방민호 선생님께서 먼저 ‘오늘의 소설’에 우수작으로 추천된 작품들의 경향에 대해서 간단하게 짚어주시면 좋겠습니다.

한국문학, 소설의 역동적인 흐름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고나 할까요. ‘오늘의 소설’을 선정할 때마다 실감하게 되는 것은 한국 독자들은 물론, 작가나 평론가들도 모두 새로움에 몰두하는 성향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점이지요. 한국 소설을 ‘청년문학’이라고 별칭하는 이유가 있다고나 할까요. 출판계를 주도하는 몇몇 잡지를 중심으로 작품을 읽는 경향도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라 하겠지요. 그러나 이러한 청년성과 편식성 속에서도 시대와 현실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투영하고 있는 좋은 작품들이 해마다 등장한다는 점도 놀랍습니다. lMF 세대로 문단의 주역을 담당한 김애란, 황정은, 김금희의 뒤를 잇는 88만원 세대, Z세대의 작가들에게서 날카로운 작가 정신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한국 소설의 미래는 여전히 약동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듯합니다.

『2020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소설』은 소설을 쓰고 비평하는 작가들이 직접 추천을 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차별점과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독자에게 사랑을 받는 것도 좋지만 문인 동료에게 인정을 받는 것 또한 작가로서 큰 기쁨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작품을 논의해볼까요. 100명의 동료 문인들로부터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은 작품은 조해진 작가의 단편소설 「완벽한 생애」입니다.

조해진 작가는 2008년 출간된 첫 번째 소설집 『천사들의 도시』부터 ‘타자의 작가’라는 애칭과 함께 현실의 논리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삶을 섬세하게 다루어왔는데요. 특히 이번 소설은 그동안 조해진 작가가 정성 들여 쌓아온 작품세계의 진수를 집약적으로 보여준 작품이었습니다. 과연 선은 선의(善意)만으로 진정한 의미의 선이 될 수 있을까. 방황하고 갈등하고, 그러는 과정에서 성찰하고 반성하는 ‘선’, 그런 불완전한 ‘선’이 오히려 꾸준히 성장하는 건강한 ‘선’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완벽한 생애’라는 제목은 이 소설의 화룡점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선과 악의 이분법을 넘어 복잡한 선의 이면을 보여주는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덧붙여, 지난해 출간된 장편소설 『단순한 진심』이 2015년도에 발표된 「문주」란 작품을 토대로 집필되었는데요. 「완벽한 생애」를 읽으면서 이 작품 역시 한 권의 장편으로 확장될 만큼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단편을 읽으며 숨은 이야기를 찾아보는, 매우 흥미로운 경험이었습니다. 두 분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이 소설의 매력은 무엇인가 궁금합니다.

조해진 작가는 얼핏 보면 서로 무관해 보이는 세계가 실은 긴밀하게 얽혀 있다는 진실을 증명해내는 소설을 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인)과 외국(인)의 형상이 교차되는 그의 소설적 특징도 바로 거기에서 비롯되는 것이고요. 「완벽한 생애」도 그 연장선에 있는 소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데 제가 보기에 이 소설은 기존에 조해진 작가가 썼던 작품보다 한 발 더 나아간 부분이 있는데요. 그것은 소설에서 결코 만나지 않는 두 사람—시징과 윤주의 삶이 연동한다는 점입니다. 이메일과 메모라는 매개체로 두 사람은 엮이는데요. 「완벽한 생애」를 통해 상호 영향의 관계성을 재정의해보게 됩니다.

한국에서 단편소설은 인물들의 전 생애를 총괄하고 있는 경우가 많지요. 대체로 그렇습니다. 그런 방면에서 진화를 이뤄 온 것이라고나 할까요? 조해진 작가의 ‘완벽한 생애’는 제목부터 그렇죠. 그래도 저는 이 작품이 좋습니다. 유리조각들을 정교하게 짜맞춘 공예품을 보는 듯한 느낌이라고 할까요, 서울과 홍콩, 서울 중에서도 영등포와 홍콩의 항구, 서울과 제주, 한국의 실직 청년 윤주와 홍콩의 소수자 시징, 촛불혁명과 홍콩 민주화 운동, 윤주, 미정, 은철 등 청년들과 그들의 아버지 세대 386, 이성애자와 그렇지 않은 이들. 이런 이항대립들이 작품에 유리조각들처럼 박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작가는 아마도 ‘문래'를 쓴 작가였죠? 자전적 소설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문래와 영등포가 지척지간인 건 다들 아실텐데요. 이 공간들의 변화는 서울의 변화의 가장 극적인 장면들 가운데 하나죠.

이 영등포를 소설 소재로 쓴 작가로 유영갑이라고 있어요. 강화 살죠. 그 이후 이쪽 동네의 변화를 이만큼 실감나게 묘사해 보여준 작가는 없습니다. 묘사라기보다는 스케치지만 말이죠. 또 하나, 소설 속 윤주가 촛불혁명과는 ‘어쩔 수 없이‘ 다른 쪽에 서 있으면서도 그렇다면 응당 대척적이어야 할 미정과 친구사이라는 것, 이 미정이 외국인 노동자를 지원하는 투쟁의 ‘의도치 않은’ 결과에 휩싸여 ‘선’ 대한 신녕에 혼란을 겪는다는 것. 이 같은 설정은 시징과 은철의 퀴어적인 고민들과 어울려 이 시대 청년들, 늙은 청년들이죠, 30대 중반까지에도 이르니까요, 또 의지와 신념 대신 떠밀리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들은 벌써 ‘늙었습니다’, 그들의 내적 혼란을 정심하게 잡아챈 것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들에서 조해진 작가는 짧은 이야기 속에 가장 많은 이야기를 응축해 놓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 할 만합니다. 이 시대의 가장 우수한 단편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나 할까요.

 

오늘의 ‘소설’

앞서 대상작인 조해진 작가의 「완벽한 생애」를 살펴보았는데요. 이 작품과 더불어 최은영 작가의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와 강화길 작가의 「음복」을 읽으면, 지난 한 해 동안 한국문학이 소수자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그들을 문학적으로 어떻게 형상화하고자 노력했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먼저 최은영 작가의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에 대해 허희 선생님께서 말씀해주시면 어떨까요.

최은영 작가의 섬세한 문장은 캐릭터의 내면을 드러내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항상 그는 거기에 조응하는 외부의 사건을 같이 응시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첫 번째 소설집 『쇼코의 미소』부터 그랬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를 그 예로 들 수 있겠지요. 이처럼 내면의 풍경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역사와 젠더를 교직해 많은 소설을 썼다는 사실에서, 최은영 작가가 가진 문학의 정치성을 검토해볼 수 있을 듯합니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역시 그렇습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드린 최은영 작가가 가진 문학의 정치성은 계몽의 속성을 띠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독특성을 지닙니다. 그는 내면의 풍경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역사와 젠더의 윤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지만, 독자를 강제하는 화법 또한 취하지 않아요. 이번 소설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대학 수업에서의 토론 장면이 대표적이지요. 최은영 작가는 재현의 방식과 태도에 민감합니다. 재현의 방식과 태도 그 자체가 메시지일 수 있음을 그가 명민하게 인식하기 때문이겠지요.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가 ‘용산 참사’라는 특정 사건 안에 여성의 이야기를 넣었다면, 강화길 작가의 「음복」은 가장 평범한 일상 속에서 여성의 자리를 되짚어보고 있습니다. 너무나 소소하고 시시하기까지 한 일상을 배경으로 우리 안의 균열을 발견해내는 것이 강화길 작가의 특장점이지요. 그중 「음복」이란 작품은 대물림되는 여성의 억압과 희생, 그리고 그 모든 걸 모른 채 살아가는 남성 - 정확히 말하면 모른 채 살아가고자 하는 남성-을 다루고 있는데요. 남성의 내면화된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와 순진성으로 재미있게 그려낸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작품의 매력은 무작정 해피엔딩 혹은 새드엔딩을 그리기보다는 우리 삶에 내면화된 가부장 이데올로기 안에서 누구도 미워할 수 없는 ‘악역’에 대한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주며 우리가 성찰해야 지점을 정확히 짚어주는 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너는 아무것도 모를 거야”라는 소설의 첫 문장을 읽을 때부터 심장 부근께가 간질간질하더라고요.

선정된 ‘오늘의 소설’ 중 소설화자 여섯 명 모두가 여성이라는 점에서 시선을 끄는 작품이 있습니다. ‘꼬장꼬장 셋째 동서’를 시작으로 ‘파란만장 시누이’까지 이어지는 여성 인물 열전을 보여주는 작품인데요. 바로 김종광 작가의 <성님들>입니다. 방민호 선생님께서는 이 작품을 어떻게 읽으셨는지요.

김종광 씨는 우리 작업에서 가장 올드한 세대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겠지요. 박형서나 김이은 같은, 거의 X세대에 육박한다고나 할까요. 작가 한강처럼 386에서 갓 벗어난 세대의 일원이죠. 이 정도 되면 ‘살아남기’ 어려운데 끈질기게 쓰고 있다고 할까요? 무엇보다 작가적 근성이 놀랍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자신의 작가적 정체성에 대한 인식이 가장 확고한 작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김유정에서 ‘발원하여 이문구를 지나 자신에게로 흘러오는 농촌문학의 계승자로 자신을 명료하게 설정합니다. 잘된 도시소설이란 도시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력이 명징하게 드러나는 소설이라 할 때, 잘된 농촌소설 또한 농촌의, 삶에 대한 영향력이 잘 드러나야 하겠지요. 그런데 그 농촌은 또 도시의 ‘배후지'이자 근원이고 그 연동된 메커니즘의 중요축입니다. 김종광 씨는 자신의 소설이 소재 공간으로서의 농촌에 한정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시대나 현실만 아니라 삶 그 자체의 진진함을 보여줄 줄 아는 힘을 갖추고 있습니다. ‘성님들’은 여성들, 나이든 여성들이죠. 하지만 여성이라는 하나의 추상적 기호로 환원할 수 없는 구체성을 가지고, 그 다수성 자체의 힘으로 독자들을 상대하고 있습니다. 그런 힘의 중심점에는 그의 구어체 구사력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미 이 세상사람 아닌 이문구 선생 말고 누가 이렇게 흥미진진한 ‘말씀’의 향연을 펼쳐 보일 수 있을까요

2020년 경자년(庚子年)은 '하얀 쥐의 해'입니다. 옛날 어르신들 말씀이 꿈에서 흰쥐를 보면 조상의 도움을 받는 길몽이라고 하셨는데요. 그동안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소설』에 선정되셨던 작가분들의 도움을 받아 오늘의 소설이 다시 시작될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2013년 ‘오늘의 소설’ 대상을 받은 작품이 김애란 작가의 「하루의 축」이었습니다. 마지막(2013)과 처음(2020)을 훈훈하게 장식해준 고마운 작가입니다.

이번 수상작인 「숲속 작은 집」은 몰입감이 아주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남편과 여행 간 여자의 이야기인데, 시청 청소를 하는 엄마와 숙소를 청소해주는 외국인 메이드, 현지 메이드들과 소통하지 못하는 숙소 주인 외국인 프랭크와 회사를 그만두고 부모 돈으로 커피숍을 차린 금수저 남편 등 소설 속 인물들의 관계가 잘 맞물려 있습니다. 플롯이 너무 겉으로 드러나면 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몸처럼 부자연스러운 인상을 주는데, 이 작품은 관계의 어긋남에 대한 섬세한 심리묘사가 탁월해서 작품을 읽는 내내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형식(정교한 플롯)과 내용(관계의 어긋남)이 절묘하게 미끄러지고 비틀리면서 깊은 여운을 남기는 효과를 발휘하는데요. ‘메이드에게 팁 주기’라는 아주 평범한 모티프에서 시작된 이야기인데, 저는 아주 스릴감 있게 흥미진진하게 읽었습니다.

지난해 대중들의 눈도장을 확실하게 찍은 작가들이라고 하면 이분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tvN 예능 <요즘 책방: 책 읽어드립니다>에 출연 중인 장강명 작가와 『일의 기쁨과 슬픔』으로 화제의 정점에 선 장류진 작가. 우수작으로 선정된 장강명 작가의 「한강의 인어와 청어들」과 장류진 작가의 「연수」에 대해 한 분씩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장류진 작가는 등단작부터 지금까지 ‘일’에 관한 소설을 계속 쓰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것은 마르크스주의 생산양식의 경제적 ‘노동’ 개념과는 다른, 그야말로 생활에 밀착한 미시적 일의 의미망을 형성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에 대해 누군가는 구조를 사유하지 않아 시야가 좁은 소설만을 써낸다고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기보다 저는 장류진 작가가 과거의 노동소설의 관점과 연결되지 않는 본인만의 독특한 프레임을 갖고 있다는 입장입니다. 드라마로도 만들어진 웹툰 <미생>을 볼 때의 느낌과 비슷하다고 할까요.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립 구도를 넘어서는 생활에 밀착한 일의 의미망은 거기에도 있으니까요. 「연수」도 그렇게 보입니다. 무엇보다 직업에 상관없이 일하는 사람들끼리의 교류·화해라는 장류진 작가 특유의 방식은 이 소설에도 어김없이 적용되고 있고요. 이를 그 나름대로의 전망적 리얼리즘이라고 명명한다면 이렇게 평가해볼 수도 있을 듯합니다. 대안 없는 비판적 리얼리즘의 기율에 지친 독자들이 이제는 장류진 작가가 제시하는 전망적 리얼리즘에 호응하고 있다고요.

저는 작법이 특이해 보이는 작가에게 약한 습벽이 있습니다. 그런 작가를 좋아한다는 말이지요. 한 십 년 전쯤. 권리라는 이름의 작가가 있었죠. 『싸이코가 뜬다』라는 장편소설을 냈습니다. 『왼손잡이 미스터 리』라는 작품도 있었고요. 알레고리와 상징이 넘쳐나는 작품들이었습니다. 장강명 씨의 단편소설 「한강의 인어와 청어들」도 비록 단편이라 해도 숨겨진 메시지가 강합니다. 이 소설 주인공 ‘나’는 작가 자신을 가리키는데요. 소설 속에 고유명사 ‘장강명’이 ‘나’의 이름으로 등장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밑도 끝도 없이 이현수라는 자를 통해 한강 인어를 만나고 이 인어들이 중국쪽에 근거지를 둔 청어 군체들과 전투를 벌이는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한강이며 밤섬에 인어가 이백 ‘마리’씩 살 리 없으니 이 소설은 차라리 봉준호 감독 영화 <괴물> 같은 설정이라고나 할까요? 알레고리, 상징을 추구하는 이 작품은 말미에 가서 ‘’아주 오래전에 알았던 것과 다른, 어딘가 뒤틀리고 뭔가 이상한 세계에 내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합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꾸며낸 ‘환’이고 이 환상 속의 기이한 경험담이죠. 이 소설 속의 인어며, 청어란 무엇일까, 이것이 이 수수께끼 풀이의 요체겠죠. 저는 뭔가 알 것도 같지만 여기서는 말을 줄여놓고 싶습니다. 무엇인가 투명하게 드러나면 아니되니까요. 다만 올해의 소설에 이와 같은 독해 요구형 소설이 한 편쯤 섞여 있는 것이 고마울 따름입니다.

 


오늘의 ‘소설집’

오늘 좌담은 지난 한 해 동안 한국소설이 지나온 발자취를 돌이켜본다는 데 의미를 둘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이제부터는 소설집 부문에 선정된 단행본에 관해 이야기해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제일 먼저 오랜 시간 독자와 문단의 사랑을 받아온 중견 작가들의 소설집이 눈에 띕니다. 허희 선생님이 먼저 권여선 작가의 『레몬』과 은희경 작가의 『빛의 과거』에 대해 말씀 나눠주시면 좋겠어요. 오랜 시간 동안 사랑받는 비결이 뭘까요. 굉장히 로맨틱하게 들리는 질문 같네요. (웃음)

신형철 평론가의 말을 빌린다면, 권여선 작가와 은희경 작가가 한국문학의 어떤 장르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답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근작을 예로 든다면 권여선 작가는 『안녕 주정뱅이』라는 소설집을 통해 내밀한 동시에 흥이 돋는 ‘음주문학’(웃음)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고요. 은희경 작가는 시니시즘을 갈고 닦아 세련된 통찰이 빛나는 『중국식 룰렛』이라는 소설집을 출간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두 작가가 전작과는 결이 다른 소설로 독자들을 만났어요. 예컨대 권여선 작가는 『레몬』에서 미제 살인 사건을 모티프로 애도, 나아가 신의 존재를 질문하고 있고요. 은희경 작가는 『빛의 과거』에서 2017년의 현재와 1977년의 과거를 오가며 기억의 정치·문화사를 새로 쓰고 있습니다. 이처럼 능수능란하게 문학적 변신을 거듭해나가기 독자의 사랑을 오래 받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2020년 ‘오늘의 소설’은 중견 작가들의 저력에 감탄하는 동시에 젊은 작가를 환대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박상영 작가의 『대도시의 사랑법』과 장강명 작가의 『산 자들』에 주목해보았습니다. 두 작가의 공통점을 여러 가지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무엇보다 두 작가 모두 상복이 엄청난 작가들인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웃음)

두 작가의 가장 큰 장점은 ‘이야기성’이 아닐까요. 소설이란 게 원래 이야기지만 두 작가의 작품은 소설의 본래적인 특성으로서 ‘이야기’가 강조된다고 생각합니다. 잘 읽히고 재밌잖아요. 차이점은 그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방식이 아닐까 싶습니다. 장강명 작가의 소설이 시의성이 뛰어난 소재를 채택하여 간결한 문체로 강하게 밀고 가는 ‘사건’ 위주의 스토리텔링이라면, 박상영 작가는 한국소설에서는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성소수자’를 주인공으로 ‘캐릭터’ 중심의 스토리텔링을 선보입니다.

‘오늘의 소설집’에 선정된 두 작가의 작품집 모두 ‘연작소설’이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는데요. 장강명 작가의 『산 자들』은 서로 다른 인물과 사건이 “노동현장에서의 갈등과 그에 대처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라는 창작 의도에 복무하며 병렬식으로 나열됩니다. 반면에, 박상영 작가의 『대도시의 사랑법』은 "모두 같은 존재인 동시에 모두 다른 존재"인 30대 초반의 작가 '영‘이 등장하여 소설집 전체를 이끌고 있습니다.

박상영 작가의 소설을 읽기 시작할 때 이미 주인공이 누군지 알고 읽는 듯한 느낌을 받잖아요. 그것은 소설에 반영된 자전적 요소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독성 좋은 웹스토리텔링과 유사한 서사 전개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전통적인 서사는 사건이 축적되어 그것의 결과로 캐릭터가 창조됩니다. 하지만 박상영 작가의 경우에는 그와 반대로 캐릭터가 먼저 있고 그 캐릭터에 따른 사건아 발생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서로 다른 스타일을 보여주는 장강명 작가와 박상영 작가지만 그 스타일이 ‘지금 여기’ 한국이 직면한 현실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2020년 한국소설의 현 위치를 잘 보여주는, ‘트랜디한’ 작가들이라고 생각합니다.

2008년 방민호 선생님께서 ‘오늘의 소설’ 기획위원으로 계실 때 윤이형 작가의 <큰 늑대 파랑>이 대상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이때 책 서두에 쓰신 글의 제목이 ‘신진, 신예 쪽으로 옮겨간 한국문단’이었습니다. 십여 년이 지난 지금, 윤이형 작가의 『작은 마음 동호회』를 통해서 보는 윤이형 작가의 작품세계에는 어떤 변화가 감지되나요. 그리고, 김금희 작가의 『너무 한낮의 연애』를 인상 깊게 읽었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이번 세 번째 소설집 『오직 한 사람의 차지』는 어떻게 보셨는지 궁금합니다.

 

윤이형 작가의 『작은 마음 동호회』는 독일 비평 개념 가운데 하나인 ‘작은 인간’을 떠올리게 하더군요. 독일 나치즘 체제에 길들여진 순응하는 시민들을 가리키는 이 개념은 어째서 독일 사회가 전체주의. 지배 아래 들 수 있었는가를 보여줍니다. 헌데 윤이형 작가의 이야기는 이 ‘작은 인간’들의 ‘작은 진실’에 관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자 합니다. 말하자면 작은 인간이 어떻게 큰 인간이 될 수 있는 가, 아니, 작은 인간 안에 큰 인간은 어떤 식으로 숨었다 나오는가, 같은 이야기, 개인들이 자기를 넘어 공통성으로 나아갈 때 어떤 일들이, 과정이, 우여곡절이 있을 수 있는가. 이런 것들을 쓰고 싶어 합니다.

그것을 리얼리스틱한 방식으로 아니고, 일종의 로망스 형태로, 그 몽상 같은, 단순한 긍정의 서사로 보여준다는 데 이 작가만의 특질이 있습니다. 그 놀라운 긍정의 단순함, 간결함이 좋은 거지요. 다른 한편 김금희 작가의 ‘’오직 한 사람의 차지‘’는 똑같은 현실을 앞에 놓고 디테일에 까지 ‘리얼’을 보여주고 그 다음에 이것이 어떻게 지양될 수 있는가를 말하고자합니다. 현실은 이 작가에게 냉동고 속에 들어 있는 책들이 느낄 법한 영하의 온도를 계속해서 유지합니다. 겨울이 언제 끝나 봄이 올지, 언제 안개가 걷힐지, 언제 자신들의 집에 도착하게 될지 모릅니다. 현실을 디테일에까지 리얼하게 그리면서 그 너머를 꿈꾸는 약동이 있다는 점이 이 소설집, 작가의 미덕이라 하겠지요.

좌담을 마무리하면서 기획위원 셋 중 가장 젊은 허희 평론가님께 조금 거창한 질문을 하겠습니다. 2020년 한국소설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까요. (웃음) 너무 뜬금없기도 하고 너무 추상적이기도 한데, 원래 새해에는 이런 질문 하나쯤 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김초엽 작가의 SF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 평단의 호평과 대중의 인기를 모두 얻은 가운데, 한국소설의 지평이 어떤 모습으로 넓어지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요즘 어떤 일이 발생하고 나서 그걸 예언한 듯한 글을 찾아가는 걸 ‘성지글’ 찾아간다는 표현을 쓰는데, 허희 선생님 말씀이 올 한 해 화제가 되어 이 책이 성지순례되듯 많은 독자의 관심을 모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웃음)

저의 짧고 얕은 소견이 부끄러워질 따름입니다.(웃음) 저는 사실 김초엽 작가의 SF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 독자들의 많은 관심을 받은 것이 그다지 특별한 사건으로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그 이전에도 듀나·배명훈·정소연 등의 SF작가들의 이름이 잘 알려져 있었으니까요. 또 윤이형·정세랑·장강명 등 이른바 문단문학 작가들도 SF소설로 독자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제는 SF소설이라고 문단문학과 구획 짓는 것 자체가 촌스러워졌다고 할까요. 커트 보니것 혹은 테드 창의 소설처럼 작품이 좋으면 그것의 장르적 속성과 상관없이 작품을 읽는 경향이 매우 커지고 있는 듯합니다. 젊은 작가들과 비평가들은 SF소설을 소위 리얼리즘 문학의 하위 장르로 전혀 여기지 않으니까요. 설령 그런 편견에 기반을 둔 위계가 여기 남아 있다고 한들, 이것은 머잖아 사라지리라 믿고 있습니다.

박민규 작가가 일찍이 말한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문학은 복싱 경기장이 아닌 무규칙이종격투기장으로 바뀌고 있고, 앞으로 그렇게 더 빨리 바뀌어 갈 것이라고 봅니다. 물론 이전처럼 오서독스한 복싱 스타일로 싸워도 되지만, 그보다는 하이킥을 연마하고 그라운드 기술을 익히는 것이 생존에 더 유리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따지고 보면 끊임없이 회자되는, 앞으로 그럴 것이라고 예상되는 카프카도 무규칙이종격투기 선수라고 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니까 저는 당장 유행하는 것보다는 자기의 무기가 될 만한 것을 벼려낸 소설이 생명력을 가질 거라고 봅니다. 오늘의 소설에 선정된 작가들은 이를 꾸준히 해나가고 있는 분들일 테고요.

 김 한국문학에 피와 살이 되는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두 분 모두 오랜 시간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내년에 새로운 ‘오늘의 소설’로 만나 뵙기를 기대합니다.

 

 

 

* 《쿨투라》 2020년 2월호(통권 68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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