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문화 에세이] "비전 2020"은 끝나지 않았다
[사회문화 에세이] "비전 2020"은 끝나지 않았다
  • 설규주(경인교대 교수)
  • 승인 2020.02.06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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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으로 돌아온 ‘쥐의 해’

‘쥐의 해’가 돌아왔다. 12년 만에 한 번씩 반복되는 것이라 새삼스러울 건 없다. 12년씩 앞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쥐의 해에 굵직굵직한 사건들도 참 많았다. 2008년에는 그 유명한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가 석 달 넘게 광장에서 열렸다. 인종차별이 심한 미국에서는 사상 최초로 흑인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미국발 금융위기가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 세계를 뒤흔든 것도 2008년이다.

앞선 1996년은 우리나라가 두고두고 자랑하는 OECD에 가입한 해이다. 이 해에는 놀랍게도 전직 대통령에게 무려 ‘사형’이 구형된 일도 있었다. 연말에는 당시 여당이 국회에서 노동법을 날치기로 통과시킨 탓에 해를 넘기면서까지 온 나라가 파업으로 들썩였다. 1984년에는 한국 천주교 200주년을 맞아 교황이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이처럼 쥐의 해는 그동안 수없이 많이 있었고 당연히 이런 저런 일도 많았다. 그런데 이번 쥐의 해 2020년은 무언가 색다른 느낌을 준다. 당연히 처음 맞이하는 해임에도 불구하고 예컨대 <비전 2020>이라는 있어 보이는 구호(?) 때문인지 오래전부터 꽤 익숙해져 있던 연도이다. 새천년이 시작된다며 온통 호들갑을 떨었던 2000년과는 좀 다른 측면에서, 그러니까 많은 이들이 조금은 더 차분하게, 그러나 더 거창하게 앞날의 ‘비전’과 2020년을 결부시켰고 이를 기다려 왔다.


<비전 2020>에서 꿈꿨던 ‘비전’

2020은 반복되는 숫자 덕분에 나름 운율도 있고 2000년을 기준으로 할 때 20년이라는 제법 긴 간격이 있어서인지 꽤 오래 전부터 여기저기서 <비전 2020>이라는 말과 함께 저마다 긍정적이고 실제적인 변화를 기약했던 해이다. 우리나라만 그랬던 것도 아니고 정부 차원에서만 그랬던 것도 아니다. 많은 국내외 기업, 단체들도 각각 2020년을 획기적인 성장, 혁신, 도약 등의 키워드와 연결하곤 했다.

2020년에 이른 지금, 그 결과는 어떤가? 무엇이 성장했고 무엇이 새로워졌으며 무엇을 뛰어넘었는가? 경제와 기술이 그 답일까? 경제 규모는 훨씬 더 커졌고 기술은 날로 변화를 거듭하고 있고 상상 속에서나 가능했던 사물 인터넷, 자율 주행 자동차까지 코앞에 와 있을 정도니까?

그로 인해 우리의 삶도 나아졌을까? 아마도 평균적인 수치상으로 본다면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3만 달러를 넘어선 1인당 GDP, 세계 최고 수준의 인터넷 사용률과 스마트폰 보급률 등 경제적으로, 기술적으로 주목할 만한 성과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그 성과가 널리 공유되고 있는지 묻는다면? 그렇다고 자신 있게 답하긴 어렵다. 분명 어떤 이는 더 풍요로움과 편리함을 누릴 것이다. 반면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일상인 풍요와 편리를 그저 꿈으로만 그려 보는 이도 적지 않을 것이다.

이건 결국 성장과 분배 문제다. 20여 년 전 여기저기서 많은 이들이 지향했던 숱한 <비전 2020> 속에 분배는 없고 풍요와 편리함만 가득했던 것일까. 아니면 풍요도 편리도 분배도 모두 목표이긴 했지만 우리가 아직 분배를 넉넉히 감당할 만큼의 풍요에 도달하지 못한 것일까. 분배 관련 사안은 늘 그랬듯 지금도 논쟁 중인데 아쉽게도 생산적이지는 않은 것 같다. 진영 논리와 정쟁에 휩싸여 논의도 실천도 의미 있는 진전을 이루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정치가 나서야 할 때

이 문제에 정치가, 특히 국회가 답을 해야 한다. 마침 2020년은 총선이 있는 해이다. 뻔한 처방일 수 있지만, 총선을 계기로 시민사회와 재계, 각 정당 등이 성장과 분배 문제를 더욱 공론화하면서 건설적인 공방을 치열하게 벌였으면 좋겠다. 단지 정부의 정책 위주로 분배와 성장을 논의하고 정부 홀로 이끌고 가는 방식은 외롭고 험난하다. 그래서 설사 그것이 옳은 방향이었을지라도 여기 저기 벽에 부딪히고 비효율을 야기하기 쉽다.

물론 성장과 분배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면 아마도 우리는 늘 들어왔던 주장을 또 마주하게 될 것이다. 한쪽에서는 그동안 많이 견뎌 왔으니 이제 더 많은 분배를 통해 성장을 견인하자고 할 것이고, 다른 한쪽에서는 국내외 경제 여건이 안 좋으니 분배에 대한 욕구를 잠시 보류하고 기다리며 성장을 더 일궈내자고 할 것이다. 둘 중 어느 쪽이 늘 옳고 다른 쪽은 늘 그르다고 말하기 어렵다. 성장이나 분배 어느 한쪽에 무게를 둔 어떤 정책 하나를 실시하느냐 마느냐, 언제부터 실시하느냐로 인해 우리의 평범한 이웃 누군가는 활짝 웃을 수도 있고 고통의 눈물을 흘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위에 언급한 수준의 양측 주장이 성장과 분배 논의의 종착점이 아니라 출발점이 되었으면 좋겠다.


정치의 <비전 2020>은 무엇?

여기서 한 가지 고민을 하게 된다. 그동안 숱하게 국민을 실망시키는 데 앞장서 온 정치권을 믿을 만한가? 그들에게 우리 사회의 커다란 화두 중 하나인 성장과 분배 문제에 얽힌 첨예한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일을 맡겨도 되는가? 한국언론진흥재단(2006년, 2016년)의 7개 직업군(교육자, 종교인, 법조인, 언론인, 경제인, 고위 공직자, 정치인) 신뢰도 조사에서, 정치인은 두 번 모두 1점대의 최하점을 기록했다. 이처럼 신뢰도가 낮고 후진적이라는 말을 듣는 정치권에 (총선이 있다는 이유로) 새로운 기대를 걸어도 되는 걸까?

2016년 초, 19대 국회가 끝나갈 무렵 당시 국회는 역대 최악의 국회였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당시 국회 하면 몸싸움, 폭언, 폭력, 거짓말, 비리, 갑질 등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20대 국회라고 다를까? 그들의 임기가 막바지에 이른 지금 또다시 똑같은 평가가 나온다. 역사는 반복된다더니 왜 하필 이런 역사가 반복되는가.

그렇게 보면 우리 시민들이 좀 불쌍해 보인다. 4년마다 후진성을 개선하기는커녕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는 국회를 견뎌 내야 하니 말이다. 그런 걸 생각하면 정치에 대해 관심을 꺼버리고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차마 그렇게 못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주인은 정치인이 아니라 시민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선거 때마다 TV 토론과 선거 공보물을 챙겨 보며 투표에 참여하는 이유는 정치인이 예뻐서가 아니다. 정치를 혐오하며 정치인이 밉다고 내버려두면, 좋아하는 건 그들이고 손해 보는 건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정치인은 깨어 있는 시민을 귀찮아한다. 주인 노릇을 제대로 하려고 하는 시민을 두려워한다. 여기서 플라톤의 경고가 되레 우리에게 힘을 준다. “정치를 외면한 대가는 가장 저질스러운 정치인에게 지배당하는 것이다.”

정치권의 <비전 2020>이 무엇이었는지, 그런 것이 있기는 했는지 궁금하다. 2020년이 시작된 지금, 이미 누군가는 <비전 2030>, <뉴 비전 2050>을 향해 가고 있을 것이다. 이 시점에서 아직도 <비전 2020>을 논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정치권의 <비전 2020>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열두 달 뒤 2020년이 다 지나더라도 끝이라고 말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2020이라는 숫자가 아니라 비전 자체이기 때문이다. 정치권은 2030, 2050 대신 <비전 2020>이라는 구호 속에 머물러 있어도 좋으니, 그 비전이라는 것을 선언적으로라도 제시하고 거기에 도달하기 위한 시늉이라도 해 봤으면 좋겠다. 성장과 분배를 비롯한 삶의 절실한 문제로 한숨 쉬며 마음앓이하는 수많은 시민이 참고 견디며 (어떤 의미에서는 벼르며) 지켜보고 있다.

 

 

* 《쿨투라》 2020년 1월호(통권 67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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