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월평] 봄봄, 봄이로소이다
[드라마 월평] 봄봄, 봄이로소이다
  • 김민정(드라마평론가, 본지 기획위원)
  • 승인 2020.02.06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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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시리즈 이후 오랜만에 온 국민이 한마음 한뜻으로 ‘누군가’를 찾았던 것 같다. 물론 이번에는 남편이 아니라 살인범, 로맨스가 아니라 스릴러였지만. 그렇다고 그 결과물이 사랑스럽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살인범 ‘까불이’의 등장으로 남녀 주인공의 애정전선은 더욱 돈독해졌으며 그들을 둘러싼 옹산 주민들의 연대의식은 전우애라고 불러도 될 만큼 강해졌다. 그러니까 까불이는 잔인한 연쇄살인범인 동시에 드라마 속 모든 로맨스의 촉매제였다.

그리하여 <동백꽃 필 무렵>에는 다양한 유형의 사랑이 넘쳐났는데, 남녀 사이 로맨스만 사랑이겠는가. 엄마와 아들, 할머니와 손자, 엄마와 딸, 남편과 아내, 친구와 친구… 옹산 게장 골목은 소소한 영웅들이 꽃피우는 사랑과 우정과 인류애로 언제나 시끌벅적했다. 착한 사람들이 이기는 드라마는 많지만 착한 사람이 더 많은 드라마는 별로 없다. 소수의 영웅이 세상을 지키는 이야기가 아니라 소소한 영웅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야기. 한 마디로 <동백꽃 필 무렵>은 소소하고 시시한 일상, 그러니까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은” 평범한 나와 우리의 삶을 향한 따뜻한 찬사였다.

그래서였을까. 진심 어린 격려에 응답하듯 6%대로 시작했던 드라마의 시청률은 점점 상승세를 타다가 마지막 회에 23.8%로 정점을 찍으며 기세등등하게 종영했다. 누가 지상파 미니시리즈의 위기라고 했던가. <동백꽃 필 무렵>의 열풍은 가히 신드롬이라 일컬어질 만했다. 극중 뜨겁게 타오르는 사랑을 고백하는 용식에게 동백은 말한다. “용식 씨, 만두는 김으로도 다 익잖아요. 안 끓여도 익잖아요. 우리 그냥 불같이 퍼붓지 말고 그냥 천천히 따끈해요.” 사랑도 삶도 드라마도 그런 것이다. 천천히 따끈하게. 오래오래.

“아주 죽어요. 행복해서.”

뒤늦게 깨달은 것이지만 이 대사는 ‘황용식’의 입을 빌려 작가가 시청자에게 한 말임이 분명하다. 드라마가 방영되는 동안 우리는 설렘과 떨림, 그리고 두려움 사이에서 수없이 방황하지 않았던가. 향미가, 동백이가, 동백이 엄마가 죽는 건 아닌가, 하고. 이 정도로 집요하게 사람들을 천천히 오래오래 마음 졸이게 했으면 연쇄살인범은 까불이가 아니라 임상춘 작가 본인이다.

드라마의 대박흥행으로 드라마 작가를 향한 관심도 덩달아 높아졌는데, 지금의 <동백꽃 필 무렵>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그녀의 전작 <쌈, 마이웨이>(2017)를 빼놓을 수가 없다. 박서준, 김지원, 안재홍 등 쟁쟁한 배우들이 출연한 것도 화제였지만 무엇보다 대중의 이목을 끌었던 것은 주인공의 직업이었다. 로맨스드라마에 꼭 나올법한 인물들, 즉 재벌이나 연예인 대신 백화점 안내원과 해충 박멸 업체 직원이 남녀 주인공 자리를 꿰찬 것이다. 제목 그대로 그들만의 위풍당당 ‘마이웨이’라고 해야 할까.

사실 <쌈, 마이웨이>의 묘미는 결말 부분인데, 남녀 주인공이 사는 빌라의 집주인이 나중에 여자 주인공 최애라의 엄마로 밝혀진다. 시청자는 드디어 보증금 400만 원에 월세 20만 원을 내며 근근이 살아가던 주인공이 가난을 벗어나 또 한 명의 신데렐라가 되겠구나 예상하고 또 기대했다. 재벌 남친이 없으면 건물주 엄마 정도는 있어 줘야지, 그게 로맨스드라마의 예의지, 하는 마음으로. 하지만 20여 년 만에 등장한 친엄마는 한껏 기대감에 부풀어 “그럼 나 이제 금수저인가?”라고 묻는 딸에게 “빚이 수억”이라는 말로 무덤덤하게 응대한다. “내가 이렇다니깐. 뭔 놈의 인생이 이렇게 반전이 없냐고.”

이렇듯 <쌈, 마이웨이>에는 출생의 비밀이 등장하지만 드라마틱한 성공기나 반전은 없다. <동백꽃 필 무렵>에서도 출생의 비밀이 등장하고 그 결과 미혼모 동백의 아들 필구에게는 연봉 수억 원대의 유명 야구선수 생부가 있음이 밝혀진다. 하지만 동구는 여전히 엄마 동백과 시골 마을 옹산에 살고 동백은 창문 하나 없는 창고에서 술집 까밀리에를 운영한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화려한 출생의 비밀은 인생 역전의 기회가 아니라 지금 여기 그들의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확인하게 해주는 장치로서 기능할 뿐이다. 필구는 아빠네 집에서 살다가 다시 가난한 엄마 곁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그들의 행복은 절대 가난하지 않다. 오히려 유명 야구선수와 SNS스타 부부보다 풍요롭다고 해야 할까. 그들과 비교하면 동백과 필구는 슈퍼리치 수준이다. 그러니까 <동백꽃 필 무렵>은 미혼모 동백의 작지만 당찬 ‘마이웨이’인 셈이다. 한국미혼모가족협회에서 드라마 제작진에게 괜히 감사패를 전달한 게 아니다.

연쇄살인범 까불이가 동백에게 ‘까불지 마’라고 수시로 협박 메시지를 전달하고 동백 옆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살해당할 때도 동백은 절대 주눅 들지 않는다. 언제 어디에서 나타나 자신을 죽일지 모르는 살인범의 존재를 왜 그녀라고 무섭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녀는 까밀리에에서 양파를 다듬으며 꿋꿋하게 자신만의 하루를 살아낸다. 결국 까불이를 잡은 것도 강력계 경찰이 아니라 동백이다. 맥주잔으로 그녀는 무시무시한 그 살인범의 뒤통수를 후려갈겨 버린다. 그리고 그 장면에서 용식의 내레이션이 의미심장하게 흐른다.

“동백 씨는 내가 지킬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동백이는 동백이가 지키는 거다.”

“까불이건 아니건, 북에서 땡크로 쳐 밀고 들어와도 동백 씨는 지”킨다던 그 황용식은 그럼 도대체 여태까지 무얼 한 걸까. 그래도 명색이 드라마 남자주인공인데.

그렇다. 용식은 동백에게 사랑과 존경을 주는 것으로 의무를 다한다. “남들 같았았으면요. 진작에 나자빠졌어요. 근데 누가 너를 욕해요. 동백 씨 이 동네에서요. 젤로 세고 젤로 강하고 젤로 훌륭하고 젤로 장해요.” 스스로 자신을 지키는 동백이지만 그녀가 그렇게 변화하게 된 배경에는 분명 황용식의 사랑과 존경, 그리고 절대적인 지지가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나는 길을 걸을 때 땅만 보고 걷는 사람인데 이 사람이 지금 나를 고개 들게 하니까 이 사람이랑 있으면 내가 막 뭐라도 된 것 같고 자꾸 ‘너 잘났다, 훌륭하다’ 막 지겹게 얘기를 하니까 내가 꼭 진짜 그런 사람이 된 것 같으니까 나도 화딱지가 나. 더는 안 참고 싶어진다고.”

까불이가 까불지 말라고 동백을 협박할수록 동백은 더욱더 참지 않고 까불기 시작한다. 그렇게 까불까불 그녀는 점점 행복해지고 사랑스러워진다. <동백꽃 필 무렵>의 명장면 하나. 동백의 첫사랑이자 필구의 생부가 동백을 찾아와 재결합을 요구할 때 용식은 당당하게 소리친다. “강 선수님, 동백 씨 나랑 있어서 이쁜겨. 잘 함 생각해봐. 동백 씨 니 옆에 있을 때 맨날 울상이었지. 내 옆에 있으면은 맨날 이뻐. 드럽게 잘 웃어.”

우리도 잘 함 생각해보자. 옹산 시장을 꿈꾸던 ‘노땅콩’ 노규태가 잘 나가는 변호사 부인에게 이혼당하고 살인 용의자가 되기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노규태가 향미와 얽히고 얽힌 사이가 된 것, 그러니까 그 모든 사건의 시작은 노규태에게 건넨 향미의 ‘존경해’라는 한마디 말 때문이었다. 자신을 믿어주고 존중해주는 사람, 그런 존재의 유무가 한 사람의 인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고 또 끼칠 수 있는지 노규태의 불행을 통해서 우리는 소름 끼치게 확인해볼 수 있다.

존경, 존중, 믿음, 그리고 사랑. 다섯 살 꼬꼬마도 아는 평범한 진리 안에서 임상춘 작가의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보듬어주는 ‘마이웨이’는 다시 한번 빛을 발한다. <동백꽃 필 무렵>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매력 포인트가 바로 인간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다. 임상춘 작가는 드라마에 나오는 인물 중 누구 하나 소홀하게 넘어가는 법이 없다. ‘영심이’만 해도 그렇다. 그저 그런 이름만 등장하는 엑스트라인 줄 알았는데, 영심이는 범인을 추적하는 결정적인 CCTV 화면을 가진 동네 주민으로 존재감을 과시하다가 나중에는 경찰서장과 썸 타는 관계로 드라마의 훈훈함을 더하며 모든 로맨스의 화룡점정을 차지한다. 이뿐이겠는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향미도 동백과 용식 사이에서 낳은 딸에게 본명 ‘고운’을 물려주는 것으로 부활한다. 이렇게 극중 차지하는 역할이나 비중과 무관하게 모든 등장인물을 따뜻하게 품는 작가가 정녕 신이 아니면 누가 신이 될 수 있겠는가.

아, 그 이름 임상춘(春), 그녀는 봄이로소이다. 아니, 신이로소이다.
동백꽃은 이미 우리 삶 속에 활짝 피어 있다. 아주 믿음직스럽게.

 

 

* 《쿨투라》 2020년 1월호(통권 67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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