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월평] 관계의 끝자락에서 비로소 시작되는 것
[영화 월평] 관계의 끝자락에서 비로소 시작되는 것
  • 김시균(매일경제 기자)
  • 승인 2020.02.06 10: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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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 바움백 감독의 〈결혼 이야기〉 (2019)

 

 

끝이 끝이 아닐 때가 있다. 관계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렇다. 더는 볼 수 없을 것 같은데, 이제 정말 마지막인 줄로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아니었다. 얽히고설킨 애증(愛憎)의 연쇄, 그 끝모를 영겁회귀. 시작은 사랑이었으되, 환멸이 싹을 틔워 서로를 구속한다. 견디다 못한 한 쪽이 무너지니, 다른 한쪽 또한 무너진다.

무너져내린 폐허에도 봄은 오는가. 모를 일이다. 다만 그럴 때라야, 어떤 이야기는 비로소 시작된다.

노아 바움백 감독의 <결혼 이야기>(2019)가 바로 그런 경우다. 끝자락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시작되는 이야기, 그러나 더는 이전과 같을 수가 없다는 어떤 비애(悲哀)가 이 영화엔 있다. 이것은 그 어떤 노력과 발악으로도 복원하기 힘든 아련한 상실감과 같은 것이다.

화면이 불을 밝히면 한 부부의 단란한 일상이 펼쳐진다. 그러면서 알게 되는 건 이것이 현재가 아닌 과거라는 점이다.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빛바랜 풍경, 그 아스라한 파편들. 남편 찰리(아담 드라이버)가 매 장면 각주를 달듯 아내 니콜(스칼렛 요한슨)에 대해 술회한다.

“니콜은 선물도 잘 고른다.” “진짜 잘 놀아주는 엄마다. 놀다가 마는 일이 없고, 힘들다는 말도 안 한다. 때로는 지칠법도 한데 말이다.” “니콜은 내 엉뚱한 실험 정신에 기꺼이 장단을 맞춘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배우다.”

찰리가 말하길 니콜은 한 때 ‘올 오브 더 걸’이라는 영화를 찍고 로스앤젤레스(LA)에서 스타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전부 포기하고선 연출가인 그를 따라 뉴욕으로 가 연극배우가 됐다. 이윽고 발화자와 발화 대상이 바뀐다. 화면에 나오는 이는 찰리이고, 내레이터는 니콜. 회고가 이어진다.

“찰리는 굴하지 않는 성격이다.” “거울도 잘 안 들여다본다.” “영화를 보며 잘 운다.” “내 감정을 서서히 받아들이고 져 주거나 폭발했다고 자괴감을 주지 않는다.” “찰리는 옷을 잘 입는다.” “찰리는 곧장 자기 세계에 빠진다.”

서로가 서로를 반추하는 초입을 지나면 시일이 얼마간 흐른 현재다. 이들은 지금 파경 위기에 놓여 있다. 소파에 멀찍이 거리를 두고 앉은 이들 모습에 마음의 간극이 여실하다. 둘은 지금 별거 중이다. 남편은 여전히 아내와 같이 살길 원하지만, 아내는 그렇지 않다. 그녀는 이미 지쳤다. 그것도 상당히. 찰리는 그런 그녀를 어떻게든 되돌리려 하나, 녹록지 않다.

노아 바움백은 둘 사이 멀어진 심리를 물리적 거리에 대응시킨다. 아방가르드 작품의 주인공인 아내가 무대에서 연기 중일 때, 남편은 저 멀리 객석에서 그런 아내를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다. 그날 밤, 술집에서 멀찍이 떨어져 앉던 이들은 귀갓길 지하철에서도 거리를 둔다. 왼편에 앉은 니콜은 시선을 옆으로 돌린 채고, 오른쪽에 선 찰리는 말없이 아내 쪽을 바라본다. 침묵이 에워싼 시간, 위아래 기둥이 화면을 반으로 구획짓는다. 마치 외딴 섬에 있는 것처럼. 이들의 심리적 간극은 거주지와도 조응한다. 아내는 아들 헨리와 서부 끝자락 LA로 가버린 상태고, 남편은 동부 끝자락 뉴욕에서 산다. 두 도시 사이 거리는 4500km. 심리적 거리와 물리적 거리가 그렇게 동기화된다.

단란했던 부부의 일상부터 보았던 터라, 우린 어쩔 도리 없이 희구한다. 이들 관계가 하루 빨리 회복되기를. 저 침울한 표정들을 거두어 다시 서로에게 가닿을 수 있기를. 꼭, 그러기를.

그러나 또한 아는 것이다. 한 번 무너진 인연이 복원되기란 대단히 어렵다는 것을. 아니,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그것은 노력과 의지로 복구될 차원이 아니다. 영화는 이 같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긍한다. 관계의 리얼리즘을 기꺼이 껴안으려 한다. 러닝타임이 흐를수록 보게 되는 건 그리하여 더더욱 깊어져만 가는 관계의 구렁이다.

이혼 소송이 진행된다. 니콜과 찰리를 맡게 된 변호사들은 이 둘을 어떻게든 떼어놓으려 혈안이다. 여분으로 남은 사랑과 인정조차 낱낱이 없애려 한다. 어떻게든 승소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부부의 말들을 곡해하고 행위를 부풀려 해석한다. 변호 아닌 변호가 이어진다. 그럴 수록 당사자는 점점 더 참담해질 뿐이다. 니콜의 눈물이 늘어가고, 찰리의 눈 밑 그늘 또한 짙어간다. 날짜를 정해 아빠와 엄마 품을 오가는 헨리도 우울감을 감추기 힘들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니콜이 털어놓는다. 청자는 변호사다.

“처음에 난 스타 배우였고 특별한 사람이라 관객들이 보러 온다고 느꼈어요. 근데 난 잊혀갔고, 극단이 호평 받으면서 난 점점 보잘 것 없어졌어요. 한때 잘나갔던 반짝 스타로 남았어요. 그리고 찰리가 주목받았죠... 내가 작아졌어요. 생각해보니, 내가 살아난 게 아니라 찰리에게 생기를 더해줬던 거죠… 우쭐했었어요. 찰리 같은 사람이 내 아이디어를 존중하고 내 의견을 중시해줘서요. 그러다 임신을 했죠.”

이 대목이 핵심이다.

“그는 저를 인정하지 않았어요. 별개의 독립적인 인격체로서요.”

그러나 여하한 관계도 일방의 문제일 수만은 없다. 니콜에겐 니콜 나름의 논리와 합리화가 있다. 남편 또한 마찬가지일 테다. 다만 부부로서 인연이 아니었을 뿐. 니콜은 이를 안다. 그래서 사려 깊다. 이별이 임박했으되 어떻게든 남편을 헤아리고 존중해준다. 그러려고 노력한다. 야심한 밤, 헨리를 데리러 온 찰리의 머리가 덥수룩한 것을 본 니콜은 그를 앉혀 묵묵히 머리를 잘라준다. 둘 사이 침묵이 에워싼 채다. 그 순간 슬픔으로 물든 이들 표정은 무어라 형언하기 힘들다.

부부가 끝끝내 인내심을 잃고 서로에게 으르렁댈 때, 종래에 나란히 무너지고 말 때, 이를 보는 우리도 기어이 무너진다. 공간은 이혼 소송 차 LA에 머물고 있는 찰리의 임시 거처. 감정의 칼날을 겨누는 부부 간 감정이 최고도로 차오른다. 프레임 안팎으로 세찬 정념(情念)이 휘몰아친다. 뼈저린 절망과 슬픔이, 이글대는 증오가. 그럴 때 스칼렛 요한슨의 클로즈업 연기는 실로 경이롭다. 노아 바움백은 마치 그 순간을 <잔 다르크의 수난>(1928·감독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 속 마리아 팔코네티처럼 찍었다. 드레이어에게 바치는 경외의 오마주일까. 금방이라도 혼절해버릴 것만 같다. 그녀와 마주한 아담 드라이버의 격정 또한 마찬가지다. 그동안 보아온 심드렁하고 건조한 연기는 없다. 지금껏 쌓아올린 감정이 일거에 폭발한다. 찰나의 괴물이 돼버린 스스로를 혐오하듯 그는 자리에 주저앉고, 눈물과 콧물로 뒤범벅된다. 그러면서 오열. 뒤이은 술집 신에 이르면 즉흥인지 대본인지 모를 말들로 그는 노래하고 있다. 이 애통한 비가(悲歌)에 어찌 목이 메지 않겠는가.

범상한 영화라면 이들 관계가 적당히 회복되는 선에서 그쳤을지 모른다. 관객의 소망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비록 현실과 유리된 판타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끝끝내 영화는 설익은 해피엔딩은 지양한다. 관습적 드라마를 저 멀리 밀쳐낸다. 그건 마치 정직하지 않다는 듯이. 그래서 최대한 쌉싸름하면서도 열린 결말이 우리에게 제시된다. 너무나도 현실적인 관계의 리얼리즘이. 그런 것이다. 니콜은 새 남자를 들였고, 찰리는 이제 막 LA에 터를 잡았다. 둘 사이 관계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아들 헨리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예전과 같을 수만 없을 뿐이다.

요컨대 <결혼 이야기>는 부정하기 힘든 진실한 갈무리와 함께 도착한 노아 바움백의 시리고 아린 걸작이다.

 

 

* 《쿨투라》 2020년 1월호(통권 67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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