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월평] 카운터싸대기를 날려라!
[연극 월평] 카운터싸대기를 날려라!
  • 차성환(시인, 연극평론가)
  • 승인 2020.02.06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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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장실 청소〉

<분장실 청소>(오세혁 작·연출, 2019.11.22-23, 후암스튜디오)는 극장을 철거하러 온 용역 두 명이 우연히 분장실에 들어오게 되고 그곳에서 여배우를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용역들의 말대로 분장실에는 이상한 기운이 느껴지고 아름다운 것이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기 위해 왔다는 여배우는 조금은 비현실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용역들은 철거에 반대하거나 저항하지 않는 여배우가 이해되지 않고 갈등이 격화될 무렵 갑자기 건물의 새 주인인 한류스타의 처남이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급물살을 타게 된다.

세계적인 케이팝 한류스타(매형)는 실제로 등장하지 않지만 CCTV 뒤에서 분장실을 지켜보는 대타자와 같은 존재이다. 이 매형이라 불리는 자는 처남을 통해서 용역들을 고용하고 이것저것 지시를 내리는 등 건물주로서 무소불위의 힘을 과시한다. 여배우 또한 매형의 열렬한 팬이며 그의 연기 칭찬에 기뻐하는 모습을 보인다. 매형은 처남에 의해서 그 존재가 가늠될 뿐이며 나머지 용역들과 여배우도 그의 영향력에 주의를 기울인다. 실제 존재 유무를 떠나 카메라 뒤에 누군가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분장실의 인물들은 움직이고 반응한다. 분장실은 곧 무대가 되어 여배우의 발언은 연기로 치환되고 용역들과 처남도 이 가상 연극에 일부 참여하면서 현실과 무대의 구분은 모호해진다. 아무런 실질적/물질적 토대가 없음에도 사회를 작동시키는 이데올로기의 구조에 대한 완벽한 은유이다. 건물주(대타자)에 대한 믿음의 효과가 이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이 연극이 공연 내내 연기에 대한 진짜, 가짜의 구분에 매달리는 이유는 분명해진다. 자본은 ‘진짜’를 요구하고 ‘진짜’를 팔아먹는다.

여배우는, 지금 연극을 통해 어떤 말을 하고 싶으냐는 용역의 질문에 그들의 뺨을 때리면서 “지금 때리는 싸대기는 당신들을 때리는 것이 아니라 당신들의 뒤에 숨어있는 진짜 당신들을 때리는 싸대기야”라는 요지의 ‘싸대기론’을 설파한다. 황당하긴 하지만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다. 이 ‘싸대기론’은 언젠가는 무대 바깥에 있는 당신들에게까지 싸대기를 날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 자본 중심으로 편재되는 현대예술에서 밀려나는 연극, 그 중에서도 ‘핫’하지 않다는 이유로 천대받는 창작극은 여기서 카운터펀치를, 아니 ‘카운터싸대기’를 날린다. 뒤에 숨은 당신들은 이곳에 ‘핫’한 동시대 유럽 연극을 들여오고 ‘핫’한 아티스트들이 모이는 아틀리에를 만들기 위해 힘없는 예술을 내쫓는다.

대자본이 용역들을 시켜 소상공인들을 몰아내고 ‘핫’한 프랜차이즈를 내거는 것처럼 이 모든 것이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체제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분장실 청소>는 1982년 도쿄에 세워진 ‘타이니 앨리스’ 극장이 2014년 폐관하게 되면서 이 극장을 기리기 위한 한일교류 ‘앨리스페스티벌’의 참가작이다.) 그 속에서 밀리고 쫓기고 두들겨 맞아도 끝까지 계속 연극을 할 거고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도록 태어났다는 여배우의 말에는 어떠한 자기 논리도 합리적인 이유도 찾을 수 없다. 혼자 ‘난 이렇게 살거야’를 계속 반복하는 억지 생떼의 무논리에 가깝다. 오히려 매형에게 기생하면서 살아가는 자신에 대한 처남의 변론이나, 용역들이 말하는 각자의 삶이 가진 목표와 이유가 더 현실적이고 설득력 있다. 막무가내의 여배우와 이들의 부딪침은 기본적으로 희극적인 상황들로 연출되지만 때때로 시퍼렇게 날 선 순간으로 돌변한다. 마감이 덜 된 것 같은, 약간의 거친 불협화음과 리듬이 극의 긴장을 유지시킨다.

‘분장실 청소’라는 제목은 우선 연극에 대한 철거/파괴의 비유로 사용되었겠지만 반대로 새로운 연극을 위해 몸과 마음을 정화하는 소제 의식(掃除 儀式)으로도 읽을 수 있다. 철거되기 전 마지막 남은 30분, 여배우는 정성스럽게 분장을 한다. 안톤 체홉의 <갈매기>에 나오는 ‘니나’의 독백은 바로 여배우가 연극을 하게 만들어준, 입시 때 했던 지정대사이다. 진심을 다하는 여배우의 연기에 처남이 중간 중간에 개입해 대사를 끊고 비아냥조의 말투로 모욕을 주지만 여배우는 이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다. 조금 후면 사라지는 무대에 서서 마지막 연기를 하는 여배우의 심정은 옛 연인 트레고린에게 배반당한 채 연기에 대한 열정을 쓸쓸하게 토로하는 ‘니나’의 독백에 실려 전달된다. 이 독백은 한류스타(트레고린, 자본)에게 잠시 ‘진짜’를 뺏기고 농락당했던 여배우가 스스로 각성하는 극의 맥락과 절묘하게 들어맞는다.

핀 조명이 오롯이 여배우를 비치고 웃음기가 싹 빠진 채 혼신의 연기를 할 때 연극은 소멸한다기보다 새로운 출발을 눈앞에 두고 있는 듯하다. 지금까지의 우스꽝스러운 상황들은 사라지고 무대에는 배우와 독백, 뺨에 흐르는 눈물만이 남는다. 순간 여배우의 얼굴에 안티고네가 겹쳐진다. 연극이라는 죽은 오빠의 시체를 끌어안고 우리시대 크레온의 법인 자본과 시장의 논리와는 아무 상관없이 죽을 때까지 자기 연극을 고수하는 안티고네. 여배우는 이제 곧 사라질 분장실에서 혼자만의 독백을 완성해간다. 이 연극의 진정성을 의심할 수 없게 만드는 대목이다. 이는 타자의 논리가 무엇이든지간에 그것에 장악당하지 않은 채 끝까지 ‘자기 연극을 하라’라는 정언 명령을 무한히 반복하는 칸트적 윤리이자 자기 자신의 죽음도 초과하고 넘어서는 연극에 대한 충동이다. 세계가 무너져도 연극은 계속된다.

여배우 역을 맡은 김히어라의 연기는 단연 돋보인다. 분장실에서 벌어지는 난리법석 속에서도 예의 그 진지한 연기 톤을 잃지 않고 극의 중심을 잡아주면서 결말의 감동을 이끌어낸다. 안티고네는 전적으로 그의 얼굴이 불러온 것이다. 처남 역의 김대곤은 경박하게 보이지만 은근한 공포심을 자아내는 연기를 통해 극에 긴장감을 불어넣어 준다. 용역 1, 2의 장격수와 심우성은 일부러 지나치게 과장된 연기 톤을 선보이면서 극 초반에 부조리극의 느낌을 제대로 살리고 있다. 오세혁 연출은 1시간 남짓의 짧은 단막극이지만 예리한 송곳 같은 작품을 내놓았다. 일견 허술해 보이는 듯하지만 자기 할 이야기를 다 한다. <분장실 청소>는 재치가 번뜩이고 블랙 유머와 고전의 변주, 세태 비판, 메타-연극적 감각이 잘 버무려진 부조리극이다. 무엇보다도 희극과 비극을 오고가는 줄다리기가 미묘하고 낯선 기이함을 준다. 개인적으로, 볼륨을 더 키워 그 기이함이 강화된 업그레이드 버전으로 다시 만나고 싶은 바람이다. 우리에게 또 강력한 울트라 카운터싸대기 한 방을 날려주기를.

 

 

* 《쿨투라》 2020년 1월호(통권 67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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