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묘지와 나눈 침묵의 대화
[북리뷰] 묘지와 나눈 침묵의 대화
  • 손희(본지 에디터)
  • 승인 2020.02.06 11: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희인 묘지 기행에세이 『세상은 묘지 위에 세워져 있다』

 

당신은 어린 시절 왕릉이나 거대한 무덤에서 뛰놀았던 추억이나 혹은 소풍이나 수학여행지로 다녀온 추억이 있는가.

광고 카피라이터이자, 20여 년간 90여 개국을 다닌 이희인 여행작가는 묘지를 “대화의 공간”이라고 말한다. 즉 ‘오늘, 여기’를 살아가는 이들이 ‘오래전, 거기’ 살았던 인물들의 삶과 죽음을 상상하고, 잠든 그들과 침묵의 대화를 나누는 곳이라고….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의 우주이듯 그들이 누운 무덤 한 기 한 기 또한 봉인된 또 하나의 우주일 터다. 그런 무덤들이 거대한 은하계를 이루는 공동묘지의 세계는 말해 무엇하랴. 이곳이야말로 광대무변한 코스모스요, 위대한 빅뱅의 현장이 아닌가. 아,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사라져버린 얘기, 영원히 묻힌 비밀과 진실은 얼마나 많을까. 그중엔 우리가 철석같이 믿고 따르는 진실을 완벽하게 뒤집을 만한 것들도 있지 않을까.
- 본문 215쪽, 「13 죽음은 어째서 늘 이기는가」

이희인 작가는 숱한 묘지 여행 경험을 추리고 추려, 프랑스를 위시한 유럽과 중국 등 유럽 외 국가 13개국 31곳의 묘지에서 60여 명 망자들과 만난 이야기를 한 권의 책 『세상은 묘지 위에 세워져 있다』(바다출판사 펴냄)에 담았다.

꽤 오래전부터 묘지 앞에 서면 알 수 없는 전율을 느끼곤 했다는 저자는 세계 곳곳에 있는 유명인들의 묘지를 작정하고 찾아다니며 ‘묘지 기행 에세이’를 쓴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여행기지만, 여기에 인문학적 요소를 묵직하게 더했다. 작품이나 사상을 통해 저자에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친, 그리하여 오래도록 가슴에 남게 된 유명인들의 삶과 죽음, 그들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까지 그 묘지 앞에서 책처럼 다시금 읽어내며 사색과 명상과 성찰의 시간을 갖고, 무덤 주인들과 침묵의 대화를 나눈 것이다.

그 과정들을 저자만의 화법과 시선으로 풀어내고, 직접 찍은 사진들을 곁들여 그날 그곳에서 느낀 감동과 소회를 생생하게 전한다. ‘묘지’를 매개로 새롭게 써내려간 ‘묘지인문학 여행에세이’인 셈이다. 그가 묘지에서 만나고 온 인물들을 살펴보면 매우 화려하다. 셰익스피어, 헤르만 헤세,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괴테, 오스카 와일드, 카프카, 스탕달, 수전 손택 등 작가들을 비롯한 헤겔, 마르크스, 쇼펜하우어, 니체, 벤야민 등 철학자들, 그리고 볼테르, 루소, 마키아벨리 등 사상가들, 바흐와 베토벤부터 짐 모리슨과 에디트 피아프까지 음악 안에서 살아간 인물들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묘지 앞에서 침묵을 선택하지만 또다른 여행 동반자를 만나기도 한다. 화가 고흐, 샤갈, 미켈란젤로 등과 혁명 영웅인 레닌, 마오쩌둥, 호찌민, 체 게바라 등 이름을 일일이 나열하기만도 벅찬 이들의 흔적들을 찾았다.

생각해보니, 오랜 세월 무시무시한 적성국이었던 러시아의 국가 묘지를 이렇듯 자유롭게 활보할 수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따지고 보면 이곳 사람들도 생로병사의 사슬 속에서 사랑과 행복을 추구하며, 때론 문학과 예술의 향기를 좇았다는 점에서 우리와 다를 바가 없는데 말이다. 모두에게 평등하게 찾아오는 죽음 앞에 이념과 당파 같은 것은 그저 무력하게만 보였다. 어느새 그쳐버린, 대단했던 아침 모스크바의 눈발처럼.
- 본문 102쪽 「05 원고는 불태워지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책은, 그것이 인생의 어느 시기에 씌었든 간에, 그 저자의 유언장과 같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다. 누군가는 책이야말로 한 기의 묘지라고도 말한다. 찬찬히 여행하다 보니 그 반대도 성립된다고 느꼈다. 묘지야말로 모두 저마다 한 권의 책일 수 있을 거라고.
- 이희인, 「세상은 묘지 위에 세워져 있다」 , 《조선일보》

그의 화두처럼 “죽음이야말로 가장 평등한 생의 과정”일까? “정말 평등”할까? 또한 그의 말처럼 “묘지는 책이요, 갤러리이며, 학교”일까? 저자의 해답 없는 질문이 세계 각국 묘지를 찾아 끝없이 펼쳐진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