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중문화의 결정적 사건들 2] 일제강점기, 이난영과 남인수의 사랑과 노래
[한국 대중문화의 결정적 사건들 2] 일제강점기, 이난영과 남인수의 사랑과 노래
  • 오광수(경향신문 부국장, 시인)
  • 승인 2020.03.10 09:4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대중음악은 사회의 거울이다. 일제강점기에도 스타가 배출됐고, 대중들이 즐겨 부르던 노래가 있었다. 그러나 그 시절의 노래가 즐겁고 행복한 얘기를 담고 있을 리 없었다. 또 일본 엔카(演歌)의 영향을 받아 슬로풍의 단조에 이별을 노래한 곡들이 많았다.

 일제강점기를 관통한 가수이자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수가 이난영과 남인수다. 남녀 가수를 대표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일제강점기 한국 대중음악을 일별해 볼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이난영은 누구인가? 그녀는 일본강점기 기생 출신 가수들과는 달리 모던한 재즈풍의 음악으로 일찍이 한국 대중음악의 지평을 넓힌 여가수였다. 이난영이 활동하던 1930년대는 당연히 레코드회사가 스타를 발굴하고 배출하던 시기였다. 오케레코드, 콜럼비아사, 빅터레코드사, 포리돌 레코드사, 시에튼레코드사 등 기업화 하기 시작한 레코드 회사들이 경쟁적으로 신인가수를 발굴했다. 1934년 조선일보 주최 전국 6대 도시 애향가 가사 공모전에서 목포 시인 문일석의 <목포의 눈물>이 당선됐다. 오케레코드는 이 가사에 손목인이 곡을 붙여 목포 출신 가수 이난영에게 부르게 했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 삼학도 파도 깊이 숨어드는데/ 부두의 새악씨아롱 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

 식민지 조선의 한을 대변하는 듯한 이 노래는 이난영의 애절한 목소리와 어우러지면서 크게 히트했다. 지금까지도 항구도시 목포를 얘기할 때마다 맨 앞자리에 자리 잡는 노래다. 한때는 왜색 논쟁에 휘말리기도 했지만 목포에서는 매년 난영가요제가 열리고, 유달산에는 노래비도 건립되는 등 그 영향력이 지속되고 있다 .

 이난영은 그의 대표곡 때문에 트로트 가수로 자리매김했지만 원래 배우를 지망했고, 재즈와 블루스 등 다양한 장르의 노래도 소화한 신여성이었다. 1940년 발표된 노래 <다방의 푸른 꿈>은 블루스풍의 노래로 보컬리스트의 역량을 마음껏 펼쳐 보인다. 이난영은 이 노래를 만든 작곡가이자 가수인 김해송과 1936년 12월 24일 결혼한다. 서구음악의 영향을 받은 김해송은 해방 직후 악극 <카르멘>과 <로미오와 줄리엣>을 제작하여 이난영을 주인공으로 무대에 세웠다

 또 김해송·이난영 부부의 자녀들은 훗날 김시스터즈와 김브라더즈로 활동하면서 한국 대중음악사에 굵은 발자국을 남긴다. 두 사람도 그들이 소속됐던 오케레코드에서 결성한 아리랑보이즈, 저고리시스터즈의 멤버로 활약, 지금도 보이그룹과 걸그룹의 효시로 거론된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김해송이 납북되어 끌려가다가 사망, 두 사람의 인연이 거기에서 끝난다. 이후 이난영의 삶에 남인수가 끼어든다. 남인수는 누구인가?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명가수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남인수는 경남 진주 출신이다. 뛰어난 가창력과 수려한 외모로 일제강점기의 스타로 군림했다. 1936년 데뷔하여 1938년 <애수의 소야곡>으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뒤 1천여 곡의 노래를 남겼다. ‘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오마는’로 시작되는 ‘애수의 소야곡’은 원래 데뷔곡인 ‘눈물의 해협’에 이부풍이 다시 가사를 붙여 히트했다 .

 한 시대를 풍미한 이난영과 남인수가 처음 만난 건 1934년 목포가요제에서였다. 남인수는 16세, 이난영은 18세였다. 훗날 한국 대중음악계를 풍미한 두 사람의 연정이 싹텄던 시기였다. 그러나 이난영이 김해송과 결혼하면서 두 사람은 멀어졌다.

 이들이 다시 만난 건 김해송의 사망으로 혼자 된 이난영을 남인수가 도와주면서 부터였다. 이난영은 남인수의 보살핌을 받으며 남편이 운영하던 악단을 이끌어 가면서 노래 활동에 나선 자녀들을 지원했다. 1955년 작곡가 백영호는 <추억의 소야곡>을 만들어서 폐결핵으로 투병 중인 남인수를 찾아갔다.

 ‘다시 한번 그 얼굴이 보고 싶어라/ 몸부림치며 울며 떠난 사람아/ 저 달이 밝혀 주는 이 창가에서/ 이 밤도 너를 찾는/ 이 밤도 너를 찾는 노래 부른다.’

 누가 봐도 다시 만난 남인수와 이난영을 주인공으로 엮은 노랫말이었다. 그 영향 때문이었는지 남인수는 1958년 아내이자 동료 가수였던 김은하와 이혼한다. 훗날 김은하는 이난영을 잊지 못하는 남편과 더는 살 수 없었다고 토로했다. 그러나 남인수와 이난영은 소위 ‘불륜관계’로 낙인찍히면서 세인들의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다 .

 남인수는 1962년 폐결핵을 이겨내지 못하고 44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난영은 그가 작고하는 순간까지 지극정성으로 병간호를 했다. 이난영 역시 1965년 남인수의 뒤를 따랐다. 사인은 심장마비였지만 일각에서는 자살설도 나돌았다 .

 두 사람은 한 시대를 풍미하던 불세출의 명가수들이었지만 이들도 친일문제를 피해 가지 못했다. 1941년 일본이 태평양전쟁 승리를 위해 총력전을 펼칠 때 강화된 검열로 미국 팝 음악을 추종하는 노래를 부를 수가 없었다, 또 일본은 당대 최고의 가수 남인수와 이난영에게 일본식 이름을 쓰도록 강요하고,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군국가요를 부르도록 강요했다. 나라를 되찾은 기쁨이 끝나기가 무섭게 남과 북이 나뉘어 치열하게 싸우던 시기를 관통한 두 사람도 다른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결코 녹록지 않은 삶을 살았다 .

 각설하고, 자신의 딸들을 김시스터즈라는 걸그룹으로 키워낸 이난영의 노고는 지금 살펴봐도 대단한 성과였다. 어머니의 조련을 받아 무대에 서기 시작한 김시스터즈는 미국 라스베이거스 무대로 진출하여 큰 성공을 거둔다. 이난영은 딸들을 춤 실력과 노래 실력은 물론 다양한 악기연주까지 가능한 걸그룹으로 키워낸 것이다. 김시스터즈는 비틀스가 미국을 강타할 때 교두보가 되었던 <에드 설리번 쇼>에 무려 스물두 번이나 출연했을 만큼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다 .

 어쩌면 오늘날 BTS 등의 세계적인 성공이 있기까지 우리 대중음악의 여명기에 활약했던 이난영이나 남인수의 노고가 숨어 있었던 것이 아닐까.

 

 

* 《쿨투라》 2020년 2월호(통권 68호)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