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환의 시조안테나 6] 혼자 울기도 하는 큰 산, 아픈 역사의 상징인 무명천의 노래
[이정환의 시조안테나 6] 혼자 울기도 하는 큰 산, 아픈 역사의 상징인 무명천의 노래
  • 이정환(시인)
  • 승인 2020.03.10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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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이 삼 할
나머지는 바위로 된 산


품에는
두꺼비와 구렁이가 함께 산다


눈보라 몰아칠 때는
혼자 울기도 하는


큰 산
-홍사성, 「설악산」 전문

 

  「설악산」에서 시의 화자는 ‘흙이 삼 할’이고 ‘나머지는 바위로 된 산’이라고 살피면서 바위가 주를 이루고 있음을 넌지시 강조한다. ‘설악산’은 실로 사내대장부의 골격을 갖춘 산이다. 그 품에 ‘두꺼비와 구렁이가 함께 산다’는 진술은 어떤 의미일까? 왠지 모르게 구렁이와 두꺼비가 친근하게 느껴진다. 그런 산이 ‘눈보라 몰아칠 때는/ 혼자 울기도’ 한다. 산이 울때 산만 울었을까? 흙도 울고 바위도 울고 ‘설악’과 함께 사는 두꺼비와 구렁이도 울고, 온갖 꽃과 나무와 새들도 울었을 것이다. ‘큰 산’이 혼자 운 까닭은 ‘눈보라’가 몰아쳤기 때문인데 비단 눈으로 보이는 눈보라이기만 할까? 그렇듯 큰 산은 크게 운다. 인물 중에도 큰 인물은 일생을 두고 한 번 크게 울 거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시편이 「설악산」이다. 결구 끝 ‘큰 산’은 몇 해 전 입적한 무산 큰스님을 떠올리게 한다.


턱 괴고 생각한다느니 한 턱 낸다는 말
그녀에겐 당찮은 슬픔의 관용어였지
씹어서 삼키지 못할 아픔이 우물거렸네


따뜻한 포유류의 둥근 턱이 사라진 뒤
어류의 아가미처럼 변해버린 입 언저리
죄 없는 사람이었다고 조아릴 틈 없었네


살아야 할 신념에 비할 바 없던 이념
오랜 총성 그 환청 무시로 관통하는
무명천 얼굴에 감싼 미안한 역사였네
-이숙경, 「진아영」 전문


  「진아영」은 투철한 역사의식의 산물이다. 제주 ‘4·3사건’ 당시 토벌대 총탄에 턱이 소실되어 평생 무명천으로 턱을 감싸고 살다 간 할머니 이름을 시 제목으로 삼았다. ‘턱’은 일상에서 흔히 쓰는 말이다. 즉 ‘턱 괴고 생각한다느니 한 턱 낸다는 말’에서 보듯 ‘턱’은 ‘진아영 할머니’에게는 ‘당찮은 슬픔의 관용어’임에 틀림없다. ‘씹어서 삼키지 못할 아픔’만을 ‘우물거’리게 할 뿐이었기 때문이다. ‘따뜻한 포유류의 둥근턱이 사라진 뒤/ 어류의 아가미처럼 변해버린 입 언저리’라는 구체적인 비유에는 이미 아픔이 깊게 배어있는데, 화자는 ‘죄 없는 사람이었다고 조아릴 틈 없었네’라고 진술하고 있다. 끝수에서 ‘살아야 할 신념에 비할 바 없던 이념’이라는 대목은 참으로 의미심장하여 일순 호흡을 멈추게 만든다. 그 어떤 이념보다 앞서는 것은 ‘삶’ 자체가 아니던가? ‘오랜 총성 그 환청 무시로 관통하는/ 무명천 얼굴에 감싼 미안한 역사’ 앞에서 우리는 입이 있어도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음을 뼈저리게 느낀다.

 

 

* 《쿨투라》 2020년 2월호(통권 68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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