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에세이] 프로방스의 겨울
[12월 에세이] 프로방스의 겨울
  • 곽광수(불문학자)
  • 승인 2018.12.27 14: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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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 앙 프로방스에서 프랑스에서의 첫 겨울을 보낼 때, 나는 남불의 겨울에는 시정詩情이 없다고 생각했다. 거기에는 눈이 내리지 않기 때문이다. 눈 대신 가끔 비가 내린다. 억수 같이 쏟아지거나, 아니면 그렇지 않더라도 추적추적 무겁게, 차갑게 몸 속으로 스며드는 그런 비다. 어쨌든 그것은 우울하기까지 한 비다. 남불의 이런 겨울을 이야기하면, 남불의 참 모습을 돌아가는 것 같고 남불의 매력이 사라지는 것 같을지 모른다. 사실 누구나 알 고 있는 남불의 참 모습은 이 예외적인 겨울비에 있지 않다. 이 겨울비를 제외하고는 사철 대부분 맑은 기후, 특히 여름의 건조 한 대기 속에 부서져 터지는 햇살, 우편엽서에 총천연색으로 찍혀 팔려 나가는 하늘의 푸름, 영미인들이 프렌치 리비에라라고 부르는 코트 다쥐르(청색해안)의 계속되는 모랫벌을 핥으며 넘실 거리는 짙푸른 지중해… 아마 이런 것들이 누구나 머리에 떠올 리는 남불일 것이다.

그러나 남불 사람들이 자랑하는 그런 남불은 나 개인에게는 그리 큰 인상을 주지 못했다. 기온이 사철 온화하니, 그것 하나 만은 공부하기에 좋아 실제적인 면에서 유리한 점이었다고 할까?… 남불 사람들이 자랑하는 남불의 맑은 기후나 하늘의 푸 름은 우리나라의 그것에 비하면 떨어진다(물론 공해의 오염으로 탁해진 서울의 그것보다는 훨씬 낫지만). 물론 우리나라에서처럼 더할 수 없이 해맑기만 하지 않은 남불의 대기에는 그것대로의 별난 분위기가 있다. 무슨 베일에 가려져 있는 것 같은 그 어렴풋한 하늘의 푸름은, 뭐랄까, 어쩌면 신비롭게 보인다. 그러나 어 쨌든 전체적으로 날씨가 나쁜 유럽에서는 뚜렷이 드러나는 남불 의 맑은 기후와 하늘의 푸름은, 우리나라의 그것에 익숙해져 있 는 내게는 풍토적인 면에서 우리나라에서 멀리 떨어져 와 있다 는 이양감異樣感을 일으키지 않을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남불의 여름은 우리나라에서와는 달리 건조하다는 것이다. 태양은 그 건조한 대기 속에서 그의 밝음과 뜨거움을 글 자 그대로 부스러뜨리고 터뜨려서 흩뿌려 놓는다.

이 대기의 건조함을 엑스가 있는 프로방스 지방에서 한결 두드러지게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북쪽에서 지중해 연안으로 사철 불어 내리는, 미스트랄이라는 남불 특유의 메마른 강풍이다. 그리고 이 미스트랄이 바로 프로방스의 겨울을 내 인상에 깊이 새겨놓았던 것이다. 사철 때가 없는 미스트랄이지만, 특히 겨울의 프로방스의 들판에서 요란스레 낙엽들을 밀어 제치고 큰 나무들을 휘어 놓으며, 밋밋하게 끝없이 펼쳐진 저지低地 프로방스의 산야 가운데서 무슨 야수처럼 웅웅대며 달려가는 이 바람의 모습을 보았을 때, 나는 프로방스의 겨울에 눈의 시정 대신에 이 미스트랄의 시정이 얼마나 더 아름다운 것인가를 느꼈던 것이다. 나는 거기서 장엄함이란 어떤 것인지 새삼 알았다.

엑스 주위의 산야를 알기 전에 나는 엑스에서의 생활이 단조로웠다. (조그만 교육도시인 이 도시는 조용하고 큰 특징도 없어, 미구未久에 지방적인 나른함이 느껴진다.) 그러던 것이, 언제부터인가 주말마다 엑스 주위의 들판을 하루종일, 몇 십킬로나 헤매 고 다니는 다소 야생적인 산책의 버릇이 붙은 다음에 나는, 내가 귀국한 후 언제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와 볼 수 있을까 하고 미리 엑스에의 그리움을 슬퍼하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아직도 그때 그 들판에서 본 어느 풍경에서 받은 감동이 생생히 느껴진다. 겨울날 석양 무렵이었다. 나는 오전에 내 방을 떠나와 그때까지 들판을 헤매어 다닌 탓이어서, 이제 피로가 몸전체로 덮쳐오기 시작한 참이었다. 그리고 그 무렵의 내 마음은 다소 비장한 데가 있었다. 장학금은 끊어졌고, 동시에 기숙사에서도 쫓겨나 엑스 빈민가의, 난방도 없고 햇빛도 들어오지 않는 두더지 소굴 같은 방에 들어가 있었고, 서울 집에서는 아버님 회사가 문을 닫고 부채 때문에 아버님 자신은 시골로 몸을 피하고 계시다는 소식이 왔고, 마지막 남은, 학위논문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서문과 결론은 마음대로 빨리 씌어지지 않고…. 나는 지평선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서 이제 주위의 후광을 잃고 차갑게, 푸른 겨울 하늘 속에서 얼어가는 듯한 태양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 태양이 던지는 길게 빗긴 햇살은 강한 흰 빛을 잃고 짙은 주홍빛을 띠어, 그 가운데는 이미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진 것 같았다. 앞에서 말한대로 우리나라에서처럼 그 냥 해맑기만 하지 않고 무엇이 그 가운데 드리워져 있는 것 같은 남불의 하늘의 푸름은 그 때문에, 가을, 겨울이 되면, 강한 질감質感과 양감量感을 띠게 된다. 대기의 한랭으로 푸름이 한층 짙어지기 때문이다. 그래 그 푸름은 우리나라에서처럼 가을, 겨울에 높 이 치솟기는 해도, 한층 깨끗해져서 투명하고 가볍다는 인상을 주지는 않는다. 그 짙은 질감으로 하여 그것은 어쩌면 짓누르는 듯한 무거움을 띠고, 그래 그 차갑고 무거운 동시적인 인상 때문에, 말하자면, 뭐랄까, 비장한 위협이라고 할만한 것을 나타낸다. 그 가운데서 정녕 태양은 얼어붙는다, 파묻힌다. 그리고, 그렇다, 미스트랄이 미친 듯이 불어대고 있었다. 그것이 엄청나게 휘어 놓는 나무들의 덜 떨어진 잎새들이, 그것에 쫓겨 수선스레 궁글어가는 땅위의 낙엽들이 쏴쏴하고 울어대는 요란한 소리보다는, 그것 자체가 허공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더 처절하게 들려왔다. 그때 내가 따라가고 있던 들판의 소로小路가 왼쪽으로 한번 꺾였다가 다시 오른쪽으로 되꺾이면서, 내 앞에 조그만 철교가 가로로 나타났다. 소로는 그 밑을 지나가고 있었다. 철교 좌우로는 둑이 계속 이어지고, 그것은 철로였다. 그 소로 위를 건너가는 아주 조그만 철교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신호등마저 없었다. 이 대수롭지 않은 대상 앞에서 그러나 나는 멈춰 섰다. 나는 거기서 도 스토예프스키의 어떤 인물들이 순수한 눈물로써 부여안는 얼어 붙은 <대지>를 보았던 것이다. 아마 그것은, 그 철교를 받치고 있 는 둑의 두 단면을 이루며 차곡차곡 쌓여 있는 돌들의 모습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그 돌들은 그 하늘과 그 미스트랄의 극적인 위 협 속에서도 다소곳하게 철교를 지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죄없는 그들을 거부하는 이 세계를 원망없이 바라보며, 울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이 〈대지〉가 내 몸의 한 부분인 것을 보는 것 같았다…. 나는 카뮈가 『반항인』 의 서두에 인용한 횔더를링의 그 감동적인 말을 문득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괴로워하는 장중한 대지에게 숨김없이 내 마음을 바쳤다. 그리고 때로 거룩한 밤에 나는 대지를 향하여, 죽음에 이르기까지, 두려움 없이, 성실하게 대지와 그의 숙명의 무거운 짐을 함께 사랑해 주마고 약속했다. 그리고 또 그의 어떤 풀수 없 는 수수께끼도 멸시하지 않으마고 다짐했다. 이리하여 나는 죽 음에 이르기까지의 유대로써 대지에 연결되었던 것이다.>

그때 이후로 그 대단치 않은 풍경은 그 프로방스의 미스트랄로 하여 깊은 감동으로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래 그것은 내 엑스 추억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이미지의 하나인 것이다. 언제고 다시 프랑스에 갈 기회가 있을 때, 우정 겨울을 기다려 그 풍경을 되찾아 보리라 다짐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 1975년 

 

 

* 《쿨투라》 2018년 12월호(통권 54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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