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Theme] 트로트 원형, 눈물을 선택한 한국인
[4월 Theme] 트로트 원형, 눈물을 선택한 한국인
  • 구자형(방송작가)
  • 승인 2020.03.26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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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트로트를 신비롭게 느낀 첫 만남은 <목포의 눈물>(1935)이었다. 이난영(1916-1965) 그녀의 목소리는 진달래 꽃잎 같았다. 그 꽃잎 삼학도 바다 위로 지금도 떠돈다. 그 꽃잎 파도 깊이 숨어든다. 다시 “부두의 새악시 아롱젖은 옷자락”을 떠돈다. 지독한 방황이다. 따라서 목포의 눈물은 저항이 아니다. 우주에서 가장 거대하고 원대한 포용이고 미칠 듯한, 포옹을 염원하는 기도이다.

  2.
  내 어린 시절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대중가요는 주로 이미자, 최숙자, 최희준, 배호 등이었다. 그 시절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1964)와 <섬마을 선생님>, <흑산도 아가씨>, <울어라 열풍아>, <서울이여 안녕>같은 노래를 들으면 아직 초등학생이었건만 마치 내가 인생을 꽤나 살아본 것 같은 착각이 들곤 했다. 그때 받은 트로트에 대한 인상은 “아, 내가 살아갈 인생이 굉장히 슬픈가 보다. 그리고 하염없이 가로등 밑에서 서성이거나 혹은 항구에서 연락선을 기다려야 하나 보다” 같은 것들이었다.

  3.
  그때부터였다. 내가 눈물을 두려워했던 시기가 말이다. 더불어 고독, 실연, 불행, 기다림, 그리움도 모두다 무섭게 느껴졌다. 내가 과연 감당해 낼 수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1960년대 온 사방에 트로트의 비가가 넘쳐났기에 나는 완전히 고독한 대기 속에 갇혀버렸다. 그러던 중 1967년 배호의 “소리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 같은 이슬비”로 시작 되는 <누가 울어>(1967, 전우 작사, 나규호 작곡)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팝 트로트였고 고독이라는 성안으로 들어가는 입구 같았다. 그 성안에는 상처라는 배롱나무 꽃이 가득했다.

  4.
  1978년 심수봉의 <그때 그 사람>이 또 들려왔다. 휘청이던 트로트가 흥청이는 스윙 리듬이라는 기차를 타고 사랑의 상실이라는 플랫폼에서 또 다시 어디론가 떠나가고 있었다. 이난영에 이은 이미자 그리고 그 다음 트로트여왕은 심수봉이었다. 심수봉은 멜로디보다는 리듬에 더 의지했다. 멜로디의 깊이 보다 리듬의, 상승의 트로트였다. 그래서 나는 한국 트로트의 원형인 눈물이 심수봉부터 조금씩 사라져가기 시작했다고 본다. 트로트 멜로디의 아름다움은 지극한 것이다. 그것은 밤늦도록 잠들지 못하고 어린 자녀들의 해진 양말을 깁던 어머니의 소박한 노동요였다. 가난을 견디고 남편의 술주정을 견디고 가족들이 다 먹고 남긴 누룽지 몇 술을 뜨는 둥 마는 둥 드시던, 이 땅 어머니들의 피난처 같은 노래였다. 어두운 영화관에서 혹은 달빛 쏟아지는 시골 강둑 첫 데이트에서 손목 한 번 스쳤다고 순정을 바치고, 낭만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남자들을 신처럼 떠받들고 믿었던, 처녀들의 억누른 설렘이었다. 그리고 그 환상이 산산이 부서진 다음에도 여전히 내버리지 않고, 자신의 전설로, 신화로 간직해 온 그녀들의 작은, 오롯한 눈물이었다.

  트로트는 그렇게 비롯되어 누적된 용서가 굽이쳐 흐르는 거대한 강물이자, 가녀린 어깨 들먹이며 밤새도록 뒤척이며 흐느끼는 위대한 바다인 것이다. 성경에는 일흔 번의 일곱 번을 용서하라고 했다. 도저히 인간으로서 해내기 어려운 극한의 용서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의 트로트는 그 까마득한 용서를 모조리 해 낸다. 그래서 발생한 그 용서의 가슴에서 흘러내린 눈물방울만이 위대한 대한민국 트로트인 것이다 그래서 고통을 삼킨 조개가 품어 빚어낸 진주 같은 아름다움의 빛인 것이다. 지난날 우리들의 트로트는 그처럼 눈물을 먹고 살았다. 그 눈물 속에 는 살캉살캉한 봄 햇살도 비치고, 공장 기숙사 창가의 환한 추석달도 비치고, 서울역 무작정 상경한 청춘의 옆구리에 낀 남루한 보퉁이도 비치고, 고향에 두고 왔는데도 여전히 가슴 속에 얼비치는 보고 싶은 사람의 얼굴도 그렁그렁 보이지 않는목걸이처럼 흔들리곤 했었다.

  인간의 가장 깊은 고독, 그 어둑함 속에서 눈물은 왈칵 샘솟는다. 그 눈물 메마른 가슴을 적시기 위해긴 여행, 고달픈 여정을 앞뒤 재지 않고 번지점프하듯 떠난다. 그것은 물의 본성이 그러하듯 아래로, 아래로만 하강한다. 그래서 낮은 것들의 상처를 보듬고 껴안는다. 때 묻은 삶에 젖어들어 선한 눈매로 함께한다. 그 위로의 행로에서, 외로운 삶은 노래라는 득음을 가까스로 얻어 비로소 나비가 되거나 마침내 새가 되어 날갯짓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날개 소리에 귀 기울이기 위해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그 눈물과 숨결과 연애한다.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의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운 그 멜로디를 가만히 만져보곤 하는 것이다.

  5.
  이난영, 이미자, 심수봉 다음은 <비 내리는 영동교>(1985)의 주현미였다. 그리고 <어머나>(2004년)의 장윤정에 이어 이제는 트로트의 대세인 송가인이다. 그렇게 트로트는 타는 목마름의 이 땅을 적셔왔다.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심수봉부터는 리듬이라는 불꽃의 이미지가 더 강해져 왔다. 용서가 너무나 밑지는 장사라고 생각해서였을까? 그랬지 싶다. 이조의 성종 때 편찬된 『악학궤범』(1493)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음)악은 하늘에서 나서 사람에게 붙인 것이요 허에서 발하여 자연에서 이루어지니 이는 사람으로 하여금 혈맥을 뛰게 하고 정신을 유통케하는 것이다.”

  이는 15세기 말의 음악정신이고 시대정신이었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대단히, 유효한 지혜의 예술언어인 셈이다.

  6.
  이제 소개해 드리는 이 얘기는 실화이다. 심수봉의 트로트 가요앨범이라는 80년대 후반의 MBC 라디오 프로그램의 방송작가를 했었다. 하루는 이미자님을 어렵사리 초대했다. 이미자님이 그때 심수봉 mc에게 한 말씀 하셨다. “심수봉씨 그리고 이 자리엔 없지만 주현미씨도 요즘, 트로트를 왜 그렇게 노래하세요? 전통가요답게 하세요.” 난 깜짝 놀랐다. 아마도 이미자님은 자신의 뒤를 잇는 트로트 여왕들의 노래에 무언가 불만이 있으셨던 것 같다. 그러자 심수봉씨는 얼른 “아, 죄송합니다.” 답했다. 물론 시대에 따라 대중의 요구에 따라, 가수의 노래는 거기에 부응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누구보다 그런 점을 잘 아는 이미자님이었겠지만 그래도 무언가, 어떤 아쉬움 때문에 생방송 도중 문득 심수봉, 주현미 두 트로트 여왕 후배들에게 트로트의 원형을, 그 깊이를 이어가길 특별하게 요구했던 것 같다.

  7.
  한때 막장가요라는 말이 난무했다. 서정은 사라지고 오직 자극적인 노래 같지도 않은, 그야말로 낯 뜨거운 저질가요들이 너무 많았다. 아직도 그 흐름은 사라지지 않고 막장가요라는 새로운 장르가 트로트의 한 부분처럼 똬리 틀고 있다. 그 흐름에 편승했고 주도했던 그래서 최고의 막장가요 작곡가 소리를 듣던, 어느 작곡가에게, 어느 제작자가 트로트 신곡을 의뢰했다. 하지만 그 제작자가 보기엔 납품받은 노래가 완전 막장이었다. 그래서 그 작곡가에게 말했다. “저…이번 신곡, 멜로디도 있고 좀 그런 서정적 스타일을 가미해서 다시 써 주시면 안돼요?” 그러자 그 막장가요 작곡가는 두 눈 똥그랗게 뜨고 바뻐 죽겠는데 이게 도대체 뭔소리인가 하는 그런 뜨악한 표정과 귀찮다는 말투로 “아, 그런 건 작곡가한테 가셔야죠. 우리 같은 짜깁기하는 사람들은 그런 거 못하고 안 해요.”했다.


  8.
  눈물의 아름다움을 예전엔 미처 잘 몰랐다. 이미 이 나라의 서해바다에 온통 눈물이 반도 넘게 넘실거리는데도 말이다. 나는 고통의 즙, 그 피 같은 트로트의 멜로디가 거처하는 이 땅이 매우 자랑스럽다. “트로트 원형, 한국인이 선택한 눈물”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는 제국주의 대신에 눈물을 남겨 준 이 땅의 이름 없는 사람들의 그 위대한 지혜에 감사한다. 그렇다. 때로 누군가의 눈물 한 방울은 세상 모든 바다 보다 아름답다. 그 눈물, 별이다. 꽃이다. 참 예쁜 달이다. 하지만 눈물은 절대 그런 이야기는커녕 아예 내색조차 하지 않는다.

 

  9.
  어찌된 셈인지 나는 페라리보다 눈물을 더 사랑한다. 게다가 드넓은 평수의 아파트보다 작은 눈물 하나를 나는 더 좋아한다. 그리고 그 눈물을 격한 가슴으로, 뜨거운 배짱으로 마침내 온몸 쥐어짜는 몸부림으로 노래하는 진짜 제대로 미친 격조 높은 트로트를 사랑한다. 그래서 “I Love Trot” “Thank You Trot” “Thank You Korea” 인 것이다. 이쯤에서 한마디 덧붙이고 싶다. 영화 <이유 없는 반항>, <에덴의 동쪽>, <자이언트> 딱 세편 남기고 사라진 제임스 딘이 이런 말을 남겼다. “배우가 되는 것도 어렵지만 인간이 되는 것은 더 어렵다.” 그렇다. “트로트 가수가 되는 것도 어렵지만 인간이 되는 것은 더 어렵다.”


  10.
  한국대중음악을 들여다보고 맛보다 보니 일본 대중음악으로부터 영향 받은 부분이 적지 않기에 1992년 한동안 일본 도쿄, 오사카, 시모노세키 등에 가서 취재를 했었다. 도쿄에서는 턱수염이 숭숭 난 일본 음악평론가 한사람을 인터뷰했다. 내가 그에게 물었다.

“한국에서는 트로트가 일본 엔카의 모방이라고 비난 받는, 왜색가요 문제가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일본 음악평론가가 바로 답했다.

“전혀 반댑니다. 일본 엔카의 뿌리는 백제의 불교음악 입니다. 일본 대중음악사에 공인된 결론입니다. 백제 불교와 함께 백제 불교음악이 들어 온 이후, 일본 사찰에서 염불하던 스님들 중에 파계승이 생겨나, 저잣거리에 나가 버스킹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그 사람들이 일본 최초의 음유시인들이었고 일본 엔카의 시작, 일본 대중음악의 뿌리입니다.”


  11.
  이 글을 쓰는 2020년 3월 10일, 북한산 기슭의 내 창가에는 밤새도록 그리고 하루 종일 우리들이 버린 우리들의 눈물이 오갈 데가 없어서, 빗방울로 변장하고 봄비인 양 한국인들의 가슴 언저리를,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배회하고 있는 중이다.

 

 

* 《쿨투라》 2020년 4월호(통권 70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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