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한국영화를 유럽에 알린 영화 외교관
[INTERVIEW] 한국영화를 유럽에 알린 영화 외교관
  • 한경미(시네아스트, 객원기자)
  • 승인 2020.03.31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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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제전문가 임안자

   스위스에서 50년 넘게 거주하고 있는 올해 77세의 임안자씨는 1990년대부터 한국영화를 유럽에 소개한 장본인이다. 영어, 독일어, 불어, 이탈리아어 4개 국어를 구사하는 이 분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유럽에서 한국영화 보기가 가능했을까? 작년 11월 초에 파리에서 열린 파리 한국영화제에서 마스터 클래스를 여셨는데 그 덕분에 흥미로운 이 분의 삶을 알게 되었다. 작년 12월 27일, 연말연시라 바쁜 상황에서도 스위스 바젤Bale에 전직 의사인 남편과 함께 살고 있는 임안자씨가 시간을 내어주셨다. 라인강이 넓게 흐르는 물가 옆에 위치한 자택에서 맛있는 국수도 얻어먹고 2시간이 넘는 귀중한 시간을 할애해 주셔서 흥미로우면서도 귀중한 인터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스위스에는 어떤 계기로 언제 오시게 되었는지요?

  스위스에는 1969년 7월에 왔어요. 제 전공이 원래 간호사인데 그보다 3년 전인 1966년에 교환간호사로 미국 시카고에 3년간 가 있었어요. 임기가 끝나고 한국에 들어가려고 하고 있는데 독일에 간호사로 나갔던 친구가 스위스로 옮기면서 나보고 와서 1년 같이 일하고 유럽여행을 한 후 한국에 들어가자는 제안을 하는 거예요. 거기에 혹해서 스위스로 오게 되었죠. 원래 저는 문학을 꿈꾸던 사람이었는데 집안이 가난해서 그 꿈은 이루지 못하고 대신 간호사가 된 거죠. 직업적으로는 괜찮은 직업이었어요. 그 이후에 프리부르그Fribourg 대학에 들어가서 신문학 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전공이 아키라 구로사와Kurosawa였어요. 세계영화사였고 졸업 논문은 구로사와의 초기 작품 4편에 대해서 썼습니다. 당시에는 한국영화라는 걸 볼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었거든요.

  1980년에 남편이 교환의사로 13개월 런던에 가게 되었는데 당시 어린 자식 둘을 저녁에 베이비 시스터에게 맡기고 BIF(British Film Institute)에 거의 저녁마다 가서 야간학교 다니듯이 숱한 영화를 봤는데 그 때 구로사와의 전편을 회고전을 통해 봤어요.

  한국영화와의 첫 접촉은 어떻게 이루어지셨나요?

  1980년대 중반에 여기 바젤에는 “Le Bon film”이라는 독립영화 클럽이 있었어요. 이 도시가 원래 영화 학문의 역사가 깊어서 영화 페스티벌이 열릴 뻔 했다가 결국은 아름다운 호수가 있는 로카르노에 자리를 빼앗겼죠. 이 영화클럽에서 좋은 영화를 많이 상영했는데 거기서 처음으로 한국영화를 봤어요. 이장호의 <바보선언>과 장선우의 <서울예수>였는데 그걸 보면서 한국에도 이렇게 좋은 영화가 있구나 하고 처음 알게 되었죠.

  본격적으로 한국영화를 유럽에 소개시키게 된 계기는 뭐였나요?

  1989년 여름에 제가 한국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 전에 바젤 일간지 영화담당자인 친구를 우연히 만나게 되었어요. 마침 친구는 일간지를 그만두고 비상업 배급사 ‘트리곤 필름Trigon Film’의 대표가 되어 그해 칸느 영화제에 초청되었다가 반응이 별로 안 좋았던 배용균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을 수입해서 로카르노 영화제에 올려놓았는데 그에 대해 아무런 자료가 없으니 한국 가면 배 감독을 인터뷰 해달라고 간곡히 부탁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졸지에 배 감독을 어렵게 인터뷰하고 기사를 친구에게 넘겨줬어요. 이게 제 첫 인터뷰였는데 이 기사가 영화제의 공식 일간지에 실렸고 프레스 박스에까지 게재되었죠. 그런데 이 영화가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황금표범상을 받으면서 배용균 감독이 초대되고 이 분을 통역하게 되면서 (배감독은 파리에서 미학을 전공하신 분이라 불어로 통역했어요.)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 거죠.

  한국 최초의 작가영화로 볼 수 있는 이 영화는 배 감독이 시나리오에서 촬영, 편집까지 다 혼자 만들었는데 한국에 배급되기도 전에 스위스에서 배급되어 관객 동원면에서도 성공했어요. 스위스 관객에게 한국이라는 나라, 불교라는 종교를 각인시키는 영화가 되었죠. 배 감독은 “내 영화는 하나의 템플이다”라는 아주 아름다운 말을 하셨던 게 아직도 기억에 남아요.

  스위스 바젤은 독일어권인데 불어는 어떻게 배우셨어요?

  독어는 바젤에서 간호사로 1년 넘게 일하면서 배웠습니다. 그러다 1971년 프리부르그 대학에서 신문학을 시작했습니다.

  푸리부르그 대학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모든 학과가 독어와 불어로 동등하게 나눠져 있는데 나는 1974년까지 독어로 신문학을 배웠습니다. 내가 불어를 배우기 시작한 건 1973년 여름 하계 방학 때였습니다. 프리브루그 대학은 해마다 정부의 지원으로 외국유학생들에게 7월에서 9월까지 3개월 동안 독어와 불어 코스를 무료로 제공하는데 나는 1973년 그 코스를 통해 불어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프리브루그 대학의 <L'Institute Française>에서 4 Semester동안 불어를 공부했습니다. 그 때부터 프랑스 작가들의 책에 빠지기 시작했고 물론 프랑스 영화도 좋아합니다.

  그 이후로 1989년 11월 프랑스 낭트 영화제에 임권택 감독의 13편 영화의 회고전이 소개되고 1990년 7월에 독일 뮌헨에서 <길소뜸> 등 임권택 감독의 9편 영화 회고전, 1992년 이태리 페사로 영화제에서는 신상옥, 이장호 등 한국영화 30편이 회고전으로 소개되었고 1993년 6월에는 프랑스 라로셀 영화제에서 이두용 감독 회고전이, 1993년 10월에는 파리 퐁피두 센터에서 임권택의 <서편제>를 비롯해서 한국영화 89편이 소개되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셨어요.

  우리 영화가 늦게 유럽에 소개되긴 했지만, 그게 저를 통했든 아니건 간에, 굵게, 내로라하는 유럽 영화 평론가들에게 대대적으로 소개되고, 이들의 노력으로 유럽 관객을 만날 수 있게 된 거죠. 또 처음부터 관객들의 반응도 아주 좋았어요.

  당시 한국문화를 모르는 유럽인들에게 한국영화의 진면목을 이해시키려면 한국사회에 대한 이해 없이는 불가능했을 텐데 임권택 감독이 선생님을 완벽한 통역가라고 하셨어요. 어떻게 유럽 영화 평론가들에게 우리 영화 내용을 이해시키셨나요?

  전문가가 아니면서 통역을 맡았을 때 처음엔 솔직히 떨릴 때가 많았어요. 잘 다듬어진 영화가 엉터리 자막 때문에 관객들의 이해에 문제가 생길 수 있듯이 부족한 통역으로 관객이나 미디어 기자들에게 감독의 말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래서 저는 언어 면에서 모자라는 점이 있겠지만 적어도 영화를 미리 보고 감독과 사전에 이야기를 나누면서 영화에 대한 공부를 미리 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던 편이에요. 제 경험으로 외국영화에 초청된 감독들은 시차, 언어문제, 몇 천 명의 관객 앞에서 간혹 멍할 때가 있어요. 그럴 때 저는 무료한 침묵을 막기 위해 감독님을 대신해 한국에서의 감독과 작품의 평가나 호평에 대한 이야기로 때우곤 했어요. 물론 사전에 감독의 이해를 얻고 했기 때문에 감독들이 고마워했어요.

  결국 한국영화를 유럽에 소개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셨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꼽자면 무엇인가요?

  우선 배용균 감독님을 만났다는 걸 들 수 있죠. 제 인생이 180도로 바뀌게 해 준 분이세요. 이 분이 워낙 생각이 깊은 독특한 분인데 타인과 커뮤니케이션을 별로 안하세요. 얼마 전부터 이분 행방이 묘연해졌어요. 아무도 이 분이 어디 있는지 모른대요. “감독님 덕분에 제가 한국인들에게 사랑 받는 사람이 되어서 고마워요.”라는 말을 꼭 전하고 싶은데 전할 방법이 없는 거예요.

  그리고 페사로 영화제의 유명한 영화평론가 아프라와의 만남도 빠질 수 없죠. 그 분과는 1989년 낭트영화제의 임권택 감독 회고전에서 만난 뒤 1991년 11월 초에 같이 한국에 들어가서 5주 동안 50여 편의 영화를 같이 봤어요. 다음 해에 있을 페사로 영화제의 한국영화회고전 준비를 위해서였죠. 당시 한국영화는 대부분이 자막처리가 되기 전이어서 제가 즉석에서 통역뿐 아니라 한국의 사회적, 문화적 상황까지 설명해야 되었어요. 하루에 4-5편의 영화를 보면서 즉시통역을 해야 해서 나중에는 목이 쉬기까지 하는 너무 힘든 일이었으나 그때 많은 걸 배웠어요.

  한번은 이두용 감독의 <장남>을 같이 보고 있는데 어머니의 죽음을 지키지 못한 장남이 어머니의 관 앞에서 오열하는 장면에서 우리 엄마가 치매로 돌아가신 생각이 나서 울음이 앞서 통역을 못하고 있는데 이 분도 눈물을 흘리면서 손짓으로 통역 안 해도 된다고 하시는 거예요. 17살에 가출한 이 분도 그동안 뵙지 못한 엄마 생각이 나서 같이 울었다는 거예요. 이 영화를 보면 부모와 자식의 관계 등 한국의 사회법칙이 한 눈에 보인다며 한국에 와서 한국영화를 보면서 처음으로 가족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고 하더라구요. 이 후에 이분이 이태리로 돌아가서 그동안 사귀던 여자와 결혼을 하고 늦은 나이에도 아이를 하나 낳으셨어요. 그래서 내가 그 아이를 made in Korea라고 했죠. 정말 순수하고 좋으신 분이었어요. 영화 볼 시간을 아끼기 위해 남산에서 매일 국수로 떼웠는데 그것도 너무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어요.

  세 번째로 잊을 수 없는 분이 임권택 감독님. 우리가 같은 성이고 임 감독님이 우리 조카와 항(열)이 같아서 자기보다 나이 어린 나를 항상 고모할머니라고 존중해 주셨어요. 그리고 퐁피두 센터의 장 루 파섹도 한국영화의 해외증진 차원에서 잊을 수 없는 분이죠. 결국 이 바탕에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서 인간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게 가장 좋은 기억으로 남아요.

  그래서 훌륭한 인맥관계를 동원해서 나중에 부산국제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에 고문으로 있으시면서 도움을 많이 주신 거네요.

  예, 그렇게 말할 수 있지요. 모든 국제적 조직체가 그렇듯이 영화제를 국제적인 차원으로 넓히는 데는 튼튼한 인맥관계가 아주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해요. 저는 132번 정도 국내외 영화제에 참가함으로 유럽, 러시아, 중앙아시아, 남아메리카, 아랍지역의 영화제 책임자들과 친구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도움으로 부산과 전주영화제에 수준 높은 영화를 끌어왔고 친구들을 심사위원이나 특별프로그램 대표자 또는 기자로 초청할 수 있었습니다.

  작년에 봉준호의 기생충이 칸느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이후로 프랑스에서의 한국영화의 위상이 한층 높은데 현재의 한국영화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이번에 파리 한국영화 페스티벌에 가서 보니까 여자 감독의 활동이 많이 눈에 띄었어요. 여성이 찍히는 게 아니라 여성이 찍은 영화라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그리고 사회성 문제, 가족 문제들이 제법 깊게 다루어지는 것 같아요. 그리고 이제는 한국에도 씨네필 세대가 생성된 것 같아요. 내가 1990년 중반에 부산영화제에서 일했을 때에는 관객이 젊은이들밖에 없었어요. 그만큼 한국은 중장년층들이 영화관에 다니지 않는다는 거죠. 유럽과는 정반대예요. 근데 이제는 한국도 노인세대들이 서서히 영화관에 나온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어요. 또 한 가지는 한국영화의 위상이 외국에서도 높아지니까 자랑스러운데 외국에 산다는 이유로 한국영화를 한국에서처럼 자유롭게 보지 못해서 좀 서러운 입장이에요.

  이렇게 많은 일들을 하시다가 과로하셔서 2008년에 뇌경색으로 인해 모든 활동을 중단하셨는데, 하고 싶었는데 못하신 일 있으신가요?

  네, 전주영화제에서 제가 5개 특별 프로그램을 만들었는데 (2004년부터 쿠바, 마그레브, 터키 영화특별전과 소비에트 연방의 금지된 영화 특별전, 포스트 소비에트 중앙아시아 영화특별전 기획을 하셨다) 그루지아와 아프리카 영화 상영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그게 중단되어서 무척 아쉬워요. 그 외에도 체코, 아르메니아 등 한국에는 알려지지 않은 훌륭한 영화 제작국이 많은데 그 영화들을 한국에 소개하지 못한 게 걸리네요.

  전주영화제가 김영진 전 수석프로그래머, 이상용·장병원 전 프로그래머가 7년간 몸담았던 전주영화제를 떠나면서 영화제의 자율성을 둘러싼 논란이 불거진 바 있고, 새로 부임할 이준동(나우필름·파인하우스필름 대표) 집행위원장은 이들의 빈자리를 메울 새 인력을 찾는 것은 물론 명확한 비전까지 보여줘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현재의 상황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전주영화제는 독립, 소통, 자유를 내세우는 색채가 짙은 영화제에요. 일종의 아이덴티티가 확실한 영화제인데 이 일로 그게 무너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아직 할 일도 많고. 우리나라에서 제일 크고 다양성이 많은 부산영화제를 큰 집에 비유하자면 전주영화제는 크기도 적당하고 아주 오래된 도시에서 오히려 자기 고집성이 있어서 그대로 남아주었으면 좋겠어요.

  선생님 자신을 어떻게 규정하시나요?

  전 영화 애호가예요. 영화는 제게 음식처럼 필요하고, 없으면 배고픈 관계에요. 한국영화에 대한 배고픔은 말할 수가 없어요. 정말 보고 싶어요. 제가 25년 동안 한국영화 배급을 위해 일했을 동안에는 많이 봤는데 요새는 제가 노력을 안 하면 못 보게 돼요. 이번에 바젤에서 상영된 <기생충>도 3번이나 가서 보고 지난번에는 이창동 감독의 <버닝>을 2번이나 봤어요. 한국영화가 상영된다고 하면 무조건 쫒아가서 보는 거죠. 물론 DVD로 영화를 볼 수도 있지만 영화는 역시 대형화면에서 봐야 돼요.

  스위스에서 살아서 좋은 점과 나쁜 점이 있다면?

  내가 스위스에서 50년 이상을 살고 있지만 스위스가 정들기에는 힘든 나라예요. 물론 스위스에서 대학 공부도 하고 불어 교육도 무료로 받아서 평생 감사하는 마음이 있긴 하나 사람들과의 관계가 일종의 거리감이 있어서 따듯한 친구 관계를 맺기는 드물어요. 이번에 파리 한국영화제에 갔더니 거기서 일하는 한국과 프랑스 학생들이 서로 귀를 잡아당기고 치고 당기며 허물없이 사귀는 걸 보고 무척 부럽다는 생각을 했어요. 난 학생시절에도 그런 허물없는 친구 관계는 없었거든요. 그리고 의사인 남편이 사회주의사상과 마르크시스트 경향이 있어서 항상 가난한 사람, 특히 이민 온 사람들을 도와주려고 하는데 결국 남편에게 많은 영향을 받아서 제가 보는 스위스는 결국 남편이 보는 스위스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바젤에 살아서 좋은 점이라면요?

  바젤은 안정적이고 스위스 제네바와 마찬가지로 성숙한 문화도시에요. 아무리 걸어 다녀도 지치지 않는 도시죠. 사람들과의 관계도 감정적이지는 않지만 이성적 면에서 진중한 친구를 사귈 수가 있어요. 위기가 왔다고 해서 친구를 하루아침에 버리지는 않죠. 또 전주처럼 종이박물관이 있어서 친근한 느낌이 들어요. 그런데 특히 좋은 것은 제가 라인강 바로 코 앞에 산다는 것이에요. 막혀 있지 않아서 좋아요. 여름에는 저녁 먹고 산보하는데 그게 커다란 위로가 되어요. 이게 흘러서 어쩌면 한국으로도 흘러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이건 좀 과장이지만, 트여 있다는 느낌이 아주 좋아요. 그리고 우리가 지금 사는 집이 남편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집인데 1926년에 지어졌어요. 거의 백 년이 다 된 집이죠. 우리 마당에 고추, 깻잎, 오이도 심어서 한국음식을 애들에게 먹일 수 있었다는 게 무척 좋았죠. (임안자씨는 경제학 석사 아들과 사회언어학 박사 딸이 있고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손자들이 있는데 K-pop을 즐긴다고 한다)

  앞으로의 계획이 있으시다면?

  전라도에서 발행되는 잡지 《문화저널》에 올 1월부터 자서전을 연재하고 있어서 그 글을 써야 돼요. 스위스에서 50여 년 간 살아온 얘기를 쓰는 건데 한국에서는 스위스에서 산다고 하면 무슨 파라다이스에서 사는 것처럼 여기는데 어디나 삶의 고통이 없는 곳이 없죠. 한국인에게는 좀 생소한 스위스를 한국과 연결시키는 일종의 정서적인 다리를 놓는다는 의미에서 이 글을 쓰려고 해요.

  잘하셨어요. 그 내용이 기대되네요. 2시간 넘는 시간 동안 좋은 얘기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인터뷰를 끝내고 나오니 벌써 짧은 겨울 해가 어둑어둑 넘어가고 있었다. 원래 시간이 남으면 바젤 시를 구경할 예정이었는데 그럴 시간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아주 유익한 인텨뷰였기에 후회는 없었다. 다음에도 기회가 있을 것이다. 선생님 내외가 역으로 바래다 주셔서 기차를 타고 프랑스로 돌아왔다.

 

 

* 《쿨투라》 2020년 3월호(통권 69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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