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 신중현 7] 음악의 힘, 음악의 빛
[아티스트 신중현 7] 음악의 힘, 음악의 빛
  • 장석원(시인·광운대 교수)
  • 승인 2020.03.31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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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 신중현과 뮤직파워, 1집. 뒷면 2번 트랙, <신중현 힛트곡 메들리>. 이것은 하드 코어이다. 하드 코어 디스코이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무정형체인, 융합된, 펄펄 끓는 플라즈마이다. 연쇄된 노래의 질량과 부피와 무게와 밀도와 습도. 늘어난다. 숨이 막힌다. 맥박이 빨라진다. 몸이 달아오른다, 팽창한다. 나는 두려움을 지우고 아픔도 모르고 달려간다.

   대중가요라 하면 술좌석이나 놀이에서 부르는 노래라 생각하거나 천시하는 경향이 있겠지만 가요는 오랫동안 대중의 사랑과 아낌을 받아왔고 앞으로도 사랑을 받아갈 것입니다.(이하 고딕체는 이 앨범 뒷면에 실린 신중현의 ‘인사말씀’에서 인용)

   저 명칭 ‘대중가요’를 곱씹는다. ‘대중’과 ‘가요’가 합쳐진 말이다. ‘가요’는 ‘팝송’과 대비되는 맥락이라도 있다. ‘대중’과 비교해야 하는 단어는 무엇인가. 들어맞는 개념이 떠오르지 않는다. ‘클래식’이라는 단어를 명사로 사용하는 서양 ‘고전음악’의 대타항으로 사용하는 경우 외에 ‘대중음악’이라는 어의語義의 범위는 너무나 넓어서 다른 것과 갈라지는 그 경계를 획정劃定하기가 불가능하다. 클래식이 ‘one’이었을 때, 그것이 아닌 대중적인 음악을 ‘the other’라고 구분할 수 있었다. 우리가 신중현의 글에서 읽은 대중음악은 고급스럽다고 여겨졌던, 일부 계층만 들었던 ‘그런’ 음악의 반대편에 있는, “술좌석이나 놀이에서 부르는 노래”라고 “천시”받는, ‘나머지 하나’를 지칭하는 것이다. 지금 대중음악은 ‘(대중)음악’이 되었다. 조금 넓혀 얘기하면 ‘대중’이 제거된 음악 그 자체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음악의 향유, 소비 주체가 말 그대로 우리들의 집합, 즉 대중이기 때문이다. 신중현이 말한 대중음악은 이제 ‘the other’가 아니라 ‘another’이다. 그 모든 것을 합친 거대한 하나(the one)가 된, 예술이 된, 무한한 음악이 여기에 있다. 신중현이 말한 대중음악이다.

   가요는 대중예술입니다. 더욱 아름답고 삶에 활기를 불어넣어주며 마음의 절실함을 나타내어주며 마음과 마음을 통하게 해줄 것입니다.

  “가요는 대중예술입니다”를 바꾼다. ‘우리가 하는 음악은 예술입니다.’ 신중현과 뮤직파워가 창조한 음악은 대중예술이 아니라, 예술이다. “아름답고” “활기” 가득하여 “마음의 절실함을 나타내”는 음악이 들려온다. “마음과 마음”이 하나가 된다.

— 앞면

 track 01 아무도 없지만 : 신곡. 신중현과 뮤직파워 1집이 키보드와 브라스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앨범임을 알려주는 표지곡. 기타는 부드럽지만 박력있다. 남자의 노래는 아래에서 여자의 목소리는 위에서 그림자와 빛처럼 조화를 이룬다. 도입부의 짧은 기타 연주 뒤에 따라오는 외로움 묻은 신중현의 목소리가 스산하다. 가수 신중현을 발견한다. 코러스는 메인 보컬의 노래를 반복하고 강조한다. 저음과 고음 중간을 가르는 색스폰 소리. 음악이 있기 때문에 외로워하지 않을 거예요. 가능하다. 영원한 애인은 음악이기 때문이다.

 track 02 아름다운 강산 : 다른 말이 필요 없는 곡. 1980년에 도래할 미래를 선취한 작품. 나는 형용사 하나를 두고 머뭇거린다. 많은 사람들이 아무 때나 수식어로 사용해서 의미가 희석된 단어이지만, 아껴두었다가 꺼내놓는 단어. ‘위대하다’.

   이 작품은 우리나라 가요의 특성과 예술성을 더욱 강조하는데 힘을 썼습니다. 사람의 목소리와 악기 그 외에 기계에서 나오는 소리 등을 총동원하여 음의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운 마음으로서 자기가 표현하고자 하는 음을 연주하는 것이지요.

  신중현의 말대로, 이 작품은 “예술성”으로 집약된다. “조화”의 궁극이 감상자에게 “아름다운 마음”을 품게 하는, 예술의 본래적 가치를 실현하게 하는…… 서술어를 찾을 수가 없다. 나는 지금 금관악기와 건반의 활주滑走 위로 불거지는 단단한 베이스를 따라가는 중이다. 신중현의 목소리와 여성 코러스가 어우러진 노래 속을 전진하면서 행복에 젖는 중이다. 시간은 흘러가지만, 음악은 시간 속으로 사라지고 있지만, 나는 영원한 현재를 온몸으로 감지한다. 빛이 충만하다. 살아 있다. 음악 때문이다.

   이번 함께 연주한 젊은 음악인 뮤직파워들도 예술을 사랑하고 힘과 노력으로써 함께 도와준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음악의 힘’을 창조한 사람들. 신중현(기타 보컬), 박태우(베이스), 이승환(드럼), 김정희(올갠), 이근희(트럼펫), 홍성호(알토 색스폰), 한준철(테너 색스폰), 김문숙과 박점미(보컬).

  track 03 저무는 바닷가 : 찬란한 「아름다운 강산」을 지나 맞이한 슬픔. 처연하다. 소소리바람 뒷목을 타고 내린다. 겨울, 빈 바다, 하얗게 밀려오는 서늘한 서러움. 파도소리 같은 기타를 혼자 듣는다.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흉기처럼 파고드는 연주. 배경에서 번뜩이는 금관의 율동이 고독을 명징하게 확인하는 ‘나’를 도드라지게 한다. 석양 속에 못 박혀 있는 나의 외로움을 부조浮彫한다. 뜯어낸 그림자의 실루엣. 기타 소리가 나의 맨몸을 더듬는다. 기타가 잦아들자 검은 구멍이 생긴다. 함몰되고 만다. “밀려오는 파도만이 발밑을 적”신다. 나는 천천히 바다로 들어간다. 파도가 발자국을 지운다. 바다가 나를 안아준다. 뒤돌아본다. 기타가 재등장한다. 나는 눈물방울이 되어 비산飛散한다. “나만이 여기에서 무엇을 기다리나.” “아무도 없다.”

  인간의 힘으로 소리를 움직여 사랑의 아름다운 마음을 말하지 않으면 음악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문장의 ‘인간’이 신중현이다. “소리를 움직여 사랑의 아름다운 마음”을 표현한 신중현. 그것을 음악이라고 그가 말한다. 사랑, 이별, 상처 그리고 외로움…… ‘나’를 찢어버리는 고통을 포옹하는 아름다운 소리, 음악이다. 그 음악이 사랑이다. 그것을 창조한 사람, 신중현이다. 감사하다, 이 실존이.

  track 04 떠나야 할 사람 : 블루스blues의 말뜻에 우울이 들어 있다. 우울의 빛깔은 파랑. 음악 장르 블루스는 아니지만, 이 곡은 파랑들blues이다. 색 이름 파랑의 동음이의어 파랑波浪. 파도와 물결. 얼룩과 주름. 코러스와 브라스가 어우러진다.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이 얼룩을 만든다. “보내야 할 마음”과 “잊어야 할 마음”이 주름을 빚는다. 기타가 공간을 쪼갠다. 슬픈 자의 얼굴이 나타난다. 파란 얼굴. 고독을 짊어진 사람, 이별의 슬픔을 이겨낼 수 없는 사람. “붉은 태양 변함없이 뜨겁게 타”고 있지만, 나는 고통에 시퍼렇게 질린 자, 사랑에 실패한 우울한 자. 한없이 파란 하늘에서 투명한 기타가 음악을 연주한다. 마음의 형태가 보인다. 마음의 파동이 쏟아진다. 파랑 속에서 검은 몸이 밀려 나온다. 나는 블랙 블루.

— 뒷면
 track 01 너만 보면 : 도입부 베이스 라인의 그루브가 돋보인다. 신중현의 ‘싸이키’한 보컬이 뿜어내는 민트 향기. 귀에 박힌다는 말을 할 때가 있다. 신중현의 목소리 뒤에서 솟구치는 여성 코러스가 그렇다. 3분. 간주. 기타와 베이스가 한 몸이 되어 음악을 듣는 나의, “널 보면 그렇게도 좋더라”고 말하는 나의 희열을 ‘부러져 넘어질 정도로’ 표현하고 있다. 브라스가 곡 후반을 배웅한다. 균형과 조화, 이 두 단어가 핵심이다.

  긴 겨울이 지나는 동안 봄을 기다렸고 봄이 지나는 동안 여름에 희망을 걸었고 여름이 지나는 동안 가을에는……. 결국은 오년이란 세월이 흘러 80년대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 이 기회에 나의 모든 것을 동원하여 곡을 오랜만에 선보이게 된 것을 나로서는 큰 기쁨이라고 생각합니다.

  1975년 대마초 파동에 연루되어 고초를 겪었던 신중현이 해금 후에 밴드와 함께 창작한 앨범. “나의 모든 것을 동원”했다는 발언의 현실화. 당시 세계적으로 유행하던 디스코를 습합習合한 음악. 중간 템포지만 흥겨워 춤추고 싶게 하는 이유. 신중현이 음악으로 귀환해서, 5년 동안의 강요된 침묵 이후에, 시간을 삭제하고 공간을 월경越境하는 음악을 들려준다. 초현대적이다.

  track 02 신중현 힛트곡 메들리 : 빗속의 여인, 님아, 커피 한 잔,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미련, 소문났네, 님은 먼 곳에(1), 봄비, 마른 잎, 님은 먼 곳에(2). 10곡의 메들리. 13분. 열광할 시간이다. 신중현은 왜 이전 작품을 재창조하려고 했을까. 새로운 창작곡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펑키한 비트에 실려 두 여성 보컬이 흐드러지는 꽃처럼 노래를 쏟아낸다. 님아! 다른 곡, 다른 분위기, 다른 리듬. 서로 다른 둘이 하나로 연결되어서 음악 사슬의 파노라마를 펼친다. 금관악기가 커피 한 잔을 호출한다. 디스코 분출. 신중현의 기타가 조명이다. 등대이다. 키보드의 항적航跡을 따라가는 노래. 아, 전위적이고 격렬하다. 행진곡 드럼을 따라 김상사가 월남에서 돌아온 다. 아트 락 분위기의 키보드가 브리지이다. 미련. “너무나도 그리운 사람”. 보컬을 위한 악기들. 협연하는 장치들. 쇄골처럼 튕겨나온 베이스. 메들리의 두 번째 장이 열린다. 발라드 휘장이 펄럭거린다. 다시 업 템포. 어쩔 줄 모르게 하는, 춤추게 하는, 경쾌하게 날개를 펼치는, 음악. 소문났네. 브라스가 전면에 나선다. 님은 먼 곳에. 노래의 절정부가 짧게 스쳐 지난 후, 봄비가 내린다. 뜨거운 봄비. 끝없는 봄비 꿈의 끝자락을 적시고 떠나가고, 키보드 선율이 따라온다. 마른 잎이다. 서글픔이 자리잡는다. 슬픔이 여기서 전소全燒한다. 슬픔이 불안을 데려온다. 기타가 스포트라이트 속으로 들어온다. 신중현의 기타가 듣는 이의 온몸을 감싸 안는다. 유려하다. 가시 철망을 두른 것 같다. 두 번째, 님은 먼 곳에, 없다. 님은 이곳에 있다. 음악이 있다.

  track 03 커피 한 잔 : 디스코 결정체. 나는 드디어 일어났다. 춤이어도 좋고 아니어도 좋다. 움직여야 한다. 비지스Bee Gees의 디스코에 맞춰 『토요일 밤의 열기』 속에서 춤추는 존 트라볼타John Travolta가 떠오른다. 원곡을 지워버리는 뒤틀림이 좋다. 브라스와 키보드와 드럼과 베이스의 합연이 이 세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열기를 쏟아낸다. 새로움이다. 한국적인 울혈이 느껴진다. 내게는 마땅한 감탄사가 필요하다. 표정뿐이다. 언어가 사라진다. 내가 지워진다.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그대 올 때를 기다”렸는데, 오지 않는 그대 때문에, 나는 부서지고 마는데, 음악이 들려오네. 그대보다 아름다운 음악이 나에게 사랑을 가르쳐주네.

  후세에까지 영원히 대중예술은 현대인의 생활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술성이 없는 음악은 소리이지요.

 나는 신중현의 이 말에서 ‘영원’과 ‘현대’를 뜯어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리한 칼로 오려낸다. ‘예술성’. 그 모든 것이 그때 이루어졌다.

  또 외국에서만 Beat(리듬의 힘)가 가능하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우리 고유의 피가 흐르는 리듬을 현대화하는데 많은 노력과 힘으로 도와준 것은 큰 기쁨이었습니다. (……) 현대음악은 어느 특정인의 연주자 음악이 아니라 주위의 누구든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 모여 합작하는 것이지요. 이 음반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시도되는 합작음악입니다.

  비트, 리듬. 그것의 힘. “우리 고유의 피가 흐르는 리듬” 그리고 “현대화”. 이것이 신중현이 의식했던 새로움이었을 것이다. 그것 때문에 신중현은 역사를 관통한다. 시간을 초월한다. <커피 한 잔>과 메들리의 초반 세 곡에서 나는 “불덩이 같은” 가슴으로 꺼지지 않는 영혼의 불꽃을 감지한다. 음악의 빛. 신중현이 이룩한 역사성, 현대성, 예술성의 삼위일체. 우리에게 긍지를 선사한다.

 

 

* 《쿨투라》 2020년 3월호(통권 69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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