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게 시나리오 쓰기 3] 영화의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는가!
[재미있게 시나리오 쓰기 3] 영화의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는가!
  • 이무영(영화감독)
  • 승인 2020.03.31 12: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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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인물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한 가지를 고르라면 단연코 인물, 즉 캐릭터다. 영화 속 등장인물, 그 중에서도 주인공은 관객의 관심을 끄는데 가장 효과적인 무기다. 만약 작가가 매우 흥미롭고 매력적인 인물 하나를 생각해냈다면, 이보다 더 훌륭한 첫 출발은 없다.

 주인공이 실존인물이든, 완전 허구로 창조된 인물이든 상관없다. 하지만 그 인물은 관객이 그들의 소중한 2시간을 맡길 만큼 영화에 매력을 불어넣는 특별한 존재여야 한다.

 그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 혹시 어떤 사명감을 갖고 있는가? 어마어마한 아픔을 지닌 채 살아가는가? 아니면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인가? 특별한 능력이나 지식을 지닌 인물인가? 절체절명의 순간, 그는 어떤 행동을 선택하는가?

<밀양>(이창동 감독)의 이신애는 남편에 이어 아들까지 잃는다. 그녀는 이 엄청난 불행을 기독교에 귀의, 신앙으로 극복하려 한다.

<복수는 나의 것>(박찬욱 감독)의 류는 신부전증을 앓는 누나를 돌보며 사는 청각장애인으로 직장을 잃고, 장기밀매조직에게 사기까지 당한다.

<마더>(봉준호 감독)의 엄마는 지능이 떨어지는 어수룩한 아들 도준 때문에 매일 애간장을 태운다. 그런 와중에 도준이 살해범으로 몰리게 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그녀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무시무시한 ‘대한민국 엄마’의 본능을 드러낸다.

<카사블랑카>(마이클 커티스 감독, 1942)의 릭은 프랑스에서 자신을 배신한 옛 연인 일사의 등장으로 괴롭다. 과거 정의를 위해 싸웠던 그는 양심에 따라 그녀와 남편 빅터를 도울지, 복수심으로 매몰차게 외면할지 고민한다.

 영화의 가장 큰 핵심은 주인공의 행위다. 영화, 드라마, 연극 등에서 주인공의 행위보다 더 매력적인 건 없다. 주인공은 관객의 관심을 온통 자신에게 쏠리게 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사명을 띤 채 영화 마지막까지 고군분투해야 한다.

 그런데 많은 작가들이 흥미로운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입체적이며 복잡한 플롯(드라마의 구성)을 창조해야 한다고 믿는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흥미로운 플롯은 대체적으로 매력적 인물이 지닌 특성으로 인해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길을 걷다가 현금 1백만 원을 발견했다고 치자. 그렇다면 과연 내 영화의 주인공은 어떤 행동을 할까!

 돈을 주워 주인을 찾아주라고 경찰서에 갖다 줄까? 아니면 슬그머니 자기 주머니에 넣고 사라질까?

 주인공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드라마의 전개가 달라진다. 즉, 플롯에 영향을 준다는 말이다.

 성경 누가복음 10장 30-37절에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길을 가다 강도 만나 쓰러진 사람을 신앙심 깊다는 제사장과 레위인은 모른 척하고 지나친다. 그러나 멸시천대의 대상인 사마리아인은 다친 사람의 상처를 치료해주고, 주막에 그를 돌봐달라며 돈까지 건넨다.

 이 비유에서도 알 수 있듯 인물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플롯이 완전히 달라진다. 관객은 두 시간 내내 주인공이 어떤 결정을 내리며, 또 어떻게 행동하는지 다 지켜본 후에 영화를 평가한다.

 

 2) 사건

 인간은 살며 크고 작은 사건들을 무수히 겪는다. 그중에서 삶에 큰 변화나 깨우침을 불러일으키는 특별한 사건을 만나는 경우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이별을 통보하거나, 가장 가까운 친구가 사고를 당해 죽기도 한다. 사기를 당해 온 재산을 하루아침에 다 잃거나, 반대로 복권에 당첨돼 억만장자가 될 수도 있다.

 인생 가운데 만나는 이런 굵직한 사건은 삶을 바꿔놓는다.

<밀양>에서 신애는 새로운 삶을 개척하기 위해 이주한 밀양에서 아들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그 아들은 곧바로 싸늘한 주검이 돼 돌아온다.

<마더>의 엄마는 아들이 살인범으로 몰리면서 삶이 송두리째 바뀐다. 이제 그녀에게 아들의 누명을 벗기는 것 외엔 아무 의미도 없다.

<복수는 나의 것>의 류는 실직에 이어 장기밀매조직에게 자신의 콩팥과 돈까지 빼앗긴다. 이제 그는 아픈 누나를 위해 해서는 안 될 선택을 강요받는다.

<베테랑>(류승완 검독)의 주인공으로 정의감 넘치는 형사 서도철은 트럭운전사가 혼수상태에 빠진 사건을 파헤치면서 거악 조태오와 운명적으로 맞닥뜨리게 된다.

 영화 초반 특별한 사건이 발생할 때 영화는 흥미로워지기 시작한다. 작은 사건일 수도, 크고 충격적인 사건일수도 있다. 단 영화 속 사건은 주요 등장인물들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정도로 강도가 있어야 효과적이다.

 꼭 누가 죽어야 한다는 게 아니다. 필요 이상으로 커다란 사건을 꾸미라는 것도 아니다. 겉으로는 크지 않더라도 주인공의 인생을 좌지우지할만한 영향력 있는 사건이어야 한다는 얘기다.

 과거 미국에서 대학 다닐 때 멋모르고 드라마수업을 신청한 적이 있다. 지금은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담당교수가 “영화 속 드라마는 우리 삶보다 더 커야 한다.(Drama in cinema should be bigger than life.)”라고 한 말이 기억난다.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엄청난 일들이 세상 곳곳에서 매일 매 순간 벌어지기 때문에 영화에 등장하는 사건은 실제 삶보다 훨씬 더 강렬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의 말대로 평범한 인생이 지루해 극장을 찾는 이들에게 별 재미도, 의미도 없는 사건을 선사하는 건 매우 큰 죄악이다.

 3) 환경

 영화가 시작함과 동시에 주인공이 어떤 특정한 환경에 놓여있는 경우가 많다. 인간 모두가 그렇듯 당연히 영화 속 주인공도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인물이나 사건이 흥미로워야 하듯 주인공이 처한 환경도 당연히 특별한 매력이 있어야 한다.

<복수는 나의 것>의 류는 누나의 수술비 마련을 위해 공장 노동자로 묵묵히 일한다. 또 다른 주인공 동진은 아내에게 이혼 당했고, 회사의 경제적 상황마저 매우 어렵다.

<마더>의 엄마는 머리가 모자란 탓에 크고 작은 사고를 치고 다니는 아들 도준 때문에 매일 애간장을 태우며 살아간다.

<밀양>의 신애는 남편과 사별한 후 그의 고향 밀양으로 이사를 간다.

<카사블랑카>의 릭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40년대 초 모로코 카사블랑카에서 정치적 중립을 유지한 채 술집(Rick’s Cafe)를 운영한다.

 모든 주인공이 놓인 상황이 예사롭지 않다. 류는 열심히 일하며 간간이 누나의 신장이식수술을 위해 필요한 콩팥확보를 위해 병원을 찾는다. 신애는 사별의 슬픔을 잊기 위해 밀양에서 새로운 삶을 살려 한다. 이웃들과 교류하며 아들과 함께 뿌리를 내리려 애쓴다.

 그렇다면 각각의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이들에게 과연 어떤 운명의 장난이 발생하는가? 류는 직장도 잃고, 사기를 당해 돈까지 잃는다. 누나를 살리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그는 유괴를 선택한다. 신애의 아들은 유괴로 희생된다. 이제 이 세상에서 그녀가 소중히 여기는 건 단 하나도 없다.

 4) 관계

 영화 속 주인공은 항상 다른 인물과 특별한 관계를 형성한다. 이럴 경우 그 관계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영화적으로 엄청난 감성적 에너지를 뿜어내는 경우가 많다. 이 관계가 새롭고 흥미롭다면 당연히 영화의 결과도 그러할 것이다.

 세상엔 아름다운 관계도 많다. 당연히 원수 사이도 많다. 하지만 어찌 됐든 영화 속 관계는 대립하거나 최소한 서로 긴장을 유지하는 상태로 이뤄지는 게 훨씬 유리하다.

 그렇다면 다음 주인공들이 영화 속에서 누구와 어떤 관계를 형성하는지 알아보자.

<복수는 나의 것>의 류와 동진은 소위 ‘착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류가 동진의 딸을 납치하고, 또 그녀가 사고로 죽게 됨으로 둘은 철천지원수가 돼 버린다. 파리 한 마리도 못 죽일 것 같던 두 사람은 복수화신이 돼 결국 둘 중 하나가 죽어야 끝나는 지옥의 대결로 내몰린다.

<마더>의 엄마와 도진은 겉으로는 상당히 평범한 관계로 보인다. 그런데 영화가 진행되면서 도진이 어릴 때 엄마가 농약을 먹인 후 동반자살을 꾀했던 과거사가 드러난다. 영화는 그 일로 도진이 정신지체가 됐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도진이 살인범이란 사실이 드러났을 때 이를 은폐키 위해 애꿎은 사람을 살해하는 엄마의 모티브가 과거 사건으로 인한 죄책감이라고 단정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어쨌든 모자의 과거사가 영화적으로 둘 사이에 묘한 분위기를 유발케 하고, 때론 극도의 긴장감을 자아내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밀양>의 신애는 밀양 이주 시 차가 고장 나는 바람에 카센터를 운영하는 김종찬과 인연을 맺는다. 신애가 온갖 불행을 다 겪을 때마다 종찬은 곁에서 위로가 돼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애는 자기 불행을 견디는 게 너무 힘들기에 때론 종찬의 친절과 호의를 무시한다. 결국 신애에게 종찬은 ‘밀양’(密陽, secret sunshine)이었던 셈이다.

<배킷>(피터 글랜빌 감독, 1964)은 영국 켄터베리 대주교 토마스 배킷과 헨리 2세의 우정과 갈등을 다룬 영화다. 배킷은 헨리 2세의 충직한 신하였으나 주교가 된 후 교회와 신의 입장에 서게 되며 그와 갈등하게 된다. 결국 배킷은 왕에 의해 캔터베리 성당에서 암살된다.

 영화 속 관계 중 가장 흥미로운 건 프랑스 영화 <내 안의 남자>(베르뜨랑 블리에 감독, 1996)에 등장하는 매춘부 마리와 포주 쟈노가 아닐까 한다.

 매춘부임에도 떳떳하게 살아가는 마리는 어느 겨울날 자신의 집 앞에 쓰러져 있는 부랑자 쟈노를 발견한다. 동정심으로 그에게 따뜻한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하는 마리는 결국 그와 사랑을 나눈다. 사랑에 빠진 그녀는 자노에게 자신의 포주가 돼달라고 제안한다. 편안히 놀고먹게 된 자노는 서서히 권태를 느끼게 되고, 마리 몰래 바람을 피운다.

 흥미로운 인물에 이어 그가 다른 누군가와 맺는 흥미로운 관계까지 떠올린다면 실로 금상첨화다. 대조적 관계의 인물들을 한 상황 가운데 몰아넣을 때 멋지고 오묘한 얘깃거리가 발생할 확률이 매우 높다.

 이처럼 작가가 영화적으로 어떤 특별한 관계를 형성했다면, 그것이 얼마나 관객에게 매력적으로 비칠지 고민해야 한다. 평범한 관계인 듯 보이나 내적으로 매우 독특하거나 비밀스러운 내용이 있을 때 관객은 호기심을 갖게 된다.

 인간은 누군가와 관계를 맺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사회적 동물이다. 영화의 주인공도 마찬가지로 주요한 다른 인물과 특별한 관계를 형성해야만 한다. 이것만으로도 시나리오는 절반 성공한 셈이다.

 이런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충실히 메모하는 습관은 시나리오 작가에게 필수다.

 

 

* 《쿨투라》 2020년 3월호(통권 69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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