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INTERVIEW] 국악계의 히든 카드! - 천재 국악인 남상일
[12월 INTERVIEW] 국악계의 히든 카드! - 천재 국악인 남상일
  • 최교익(신한대 교수, 본지 편집위원)
  • 승인 2018.12.27 15: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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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교 3학년 휴학 후, 대학로에서 조연출을 하던 나는 운 좋게 국립극장 연출부로 활동할 수 있었다. 그리고 5년 동안 29살까지 20대의 마지막을 대학로와 국립극장에서 보냈다. 국립극장은 내게 있어 다양한 추억이 서려있는 곳이다. (지금은 공사로 인해 생소하게 변했지만...) 그리고 15년 전, 그 곳에서 국악인 남상일 선생을 처음 만났다. 국립창극단 소속의 만능재주꾼! 어린 나이에 심지어 막내였던 그는 기라성 같은 선배들을 뒤로하고 주인공을 꿰차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를 미워하거나 시기하지 않았다. 그 대상이 남상일이었기 때문이다.

 국악과의 운명적 만남!

최교익(이하 최): 아침에는 TV에서, 저녁에는 공연장에서 볼 수 있는 사람! 5년 전에는 국악계의‘싸이’. 지금은 국악계의 ‘방탄소년단’! 그리고 어르신들은 국악계의 ‘맥가이버’라고도 부릅니다. 노래면 노래. 춤이면 춤! 악기 연주는 물론이고 최고의 입담을 지닌 만능엔터테이너 남상일 선생님과 함께하는 《쿨투라》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국악신동으로 유명세를 떨쳤는데 특별히 국악을 접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남상일(이하 남): 어렸을 때, 이유 없이 자꾸 울었다고 해요. 그런데 우리소리(판소리)만 들으면 울다가도 울음을 뚝 그치고 판소리를 따라한 거지요. 그걸 신기하게 여기신 아버지께서 제 소리를 녹음하셨어요. 그리고 그 테이프를 TV방송에 자주 나오셨던 명창名唱 조상현 선생님에게 보내드렸고요. 아버지와 조상현 선생님은 전혀 알지 못했던 사이인데, 아버지께서 모험을 하신 거예요. 그런데 더 신기한 건, 아버지 편지를 받은 조상현 선생님이 다시 아버지께 답장을 하셨지요. 본인 무릎장단에 맞춘 ‘사랑가’와 ‘이별가’ 녹음테이프와 ‘이대로 따라 부르게 하라’는 편지도 함께 말이지요. 그 테이프가 어렸을 때, 제게는 장난감이었어요. 지금도 간직하고 있고요. 36년 전, 아버지의 그 모험이 지금의 저를 있게 한 것이고 국악을 접하게 된 계기가 된 겁니다.

: 국악의 길로 들어선 아들을 보면서 부모님은 어떤 반응이셨나요?

: 부모님은 단 한 번도 저에게 강요하신 적이 없으세요. 어머니께서는 항상 촉촉한 눈망울로 응원해주셨지요.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한 결 같이요. 저에겐 어머니의 자리가 있습니다. 그 자리엔 항상 어머니가 계세요. 소리꾼에게 소리북이 있다면 저한테는 어머니가 있어요. 소리꾼에게는 소리북! 젓가락엔 숟가락! 남상일에게는 어머니!

: 어렸을 때, 국악을 접하고 여러 선생님을 만났을 것 같아요. 국악의 경우, 한 분 이상의 스승을 모시고 소리를 배우잖아요. 소리꾼 남상일에게 영향 을 준 스승은 누구인가요?

남: 어렸을 땐, 조소녀 선생님한테 소리를 배웠어요. 선생님께 소리 배우면서 혼자 꽹과리, 징, 장구, 북 치고 상모도 돌리고... 조소녀 선생님은 국악의 재미를 느끼게 해준 분이세요. 좋으신 분이지요. 그리고 19살 땐, 안숙선 선생님을 만났어요. 한국예술종합학교 입학시험 날이었는데...(웃음) 심사위원이셨던 선생님과 소리를 주고받으면서 웃고 춤추고 놀았던 게 생각나요. 입학시험인데 말이에요. 하나도 안 떨렸어요.

: 안숙선 선생님께 영향을 받은 건가요?

: 네, 그렇다고 봐야지요. 안숙선 선생님은 국악이라는 장르에만 머무르지 않으세요. 국악과 타 장르의 콜라보레이션을 통해서 관객들에게 다가가지요. 그렇다고 국악을 소홀히 하신다는 건 절대 아니에요. 국악의 고유성과 예술성을 보존하면서 타 장르와의 만남. 결국, 대중적 국악을 선호하시는 거지요. 저는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이 ‘국악의 대중화’라고 생각해요.

 각설하고 ‘국악의 대중화’

:국악인이 국악 관련 방송이 아닌 일반 프로그램에 매일 나오는 경우는 상당히 드문 일이에요. 거의 처음이라고 해도 무방한데 ‘국악의 대중화’와 관련이 있나요?

: 저보다 소리도 잘하고 멋진 분들이 적지 않을 거예요. 그런데 대중들에게 호소력 짙은... 설득력 있는 사람은 결국, 대중들의 시선에 익숙한 사람이지요. 저는 국악계에서 그런 역할을 하고 싶어요. 아직도 국악이라고 하면 지루하고 고루한 장르의 예술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세요. 심지어 국악인은 된장만 먹는 줄 안다니까요. 오늘 점심에도 미팅으로 식사자리가 있었는데 제가 파스타를 시켰더니 놀라시더라고요.(웃음) 국악인은 파스타 를 못 먹는 줄 알아요. 어느 분야의 예술이든 스타가 나와야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대중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그래서 ‘국악의 대중화!’를 이룰 수 있는... 그게 핵심인 것 같아요.

: 국립창극단을 나오신 이유도 말씀하신 ‘국악의 대중화’ 때문인가요?

: 극장은 극장의 규모에 따라 공연을 볼 수 있는 관객의 수가 한정되어있어요. 아쉬운 부분이지요. 하지만 매체는 달라요. 더 많은 사람들이 국악을 접하고 또 우리 소리를 흥겹고 재미있게 들을 수 있어요. 극장을 방문하는 특정다수도 물론 좋지만 극장을 방문하지 않는 절대 다수! 그 불특정다수에게 국악을 전해주고 싶었어요. 그들이 결국 대중이니까요.

무대는 내 운명!

: 남상일하면 국립창극단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아요. 출연하는 공연마다 흥행사례를 기록하셨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공연이 있나요?

: 2003년 입단하고 첫 작품이었는데요. <적벽가>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적벽가>는 국립창극단 창단 이후 50여 년 동안 지금까지 두세 번 정도 밖에 제작이 안 된 귀한 작품이에요. <적벽가>에서 조조로 캐스팅이 됐는데 저와 같은 배역의 배우는 현재 국립민속국악원 원장인 왕기석 명창 선생님이었지요. 그때나 지금이나 최고의 창극배우, 창극스타라고 하면 왕기석인데, 이제 갓 대학 졸업한 저와 왕기석 선생님을 조조로 캐스팅한 거예요. 새내기 배우와 최고 배우의 더블 캐스팅. (웃음) 즐겁게 연습했어요.

: 긴장 많이 됐을 것 같은데 어땠나요?

: 긴장됐냐고요? 아니요. 오히려 재미있었지요. 연기를 배우지 못한 상태였는데, 국립창극단에서의 첫 주인공... 언젠가 한 번은 겪어야할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빨리 온 거예요. 24살의 추억이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 후 창극과 연기에도 푹 빠지게 됐고요. 그 공연 이후에 무대가 더 편해졌어요. 창극이 재미있고 훌륭한 예술이라는 것도 그 때 알게 되었고요.

: 창극이라는 장르가 체계적으로 정립이 되어있나요?

: 그 부분이 가장 아쉬운 거예요. 창극은 연극과 달리 역사가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정립 되지 않았거든요. 1908년, 국립극장의 전신이었던 원각사에서 <은세계>공연이 창극의 시작이었으니까 이제 100년을 조금 넘긴 예술장르예요. 그래서인지 타 장르의 연출가들로 인해 여러 가지 실험을 받고 있는 중이기도 하고요. 창극의 정립도 대중화를 위해서라면 시급한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실험적인 창극은 결국 실험극밖에 될 수 없으니까요. 판소리를 바탕으로 하는 극예술이 하루빨리 정립될 수 있게 정성을 기울여야 할 것 같아요.

: 결국에는 창극의 정립까지도 고민을 하시는데, 그 역시 선생님의 몫이라고 생각하시나요?

: 창극의 정립이라는 것은 누구 한 사람의 역할이라고 볼수는없어요. 소리를 하는 사람들. 소리꾼을 중심으로 국악인들 모두가 고민해야하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창극은 일반 판소리와는 다르게 소리는 물론 연기와 춤 그리고 모든 국악기가 활용되고 이론적으로도 잘 버무려져야하는 고난위의 예술이기 때문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어느 것 하나 소홀히 다루어지거나 결핍이 된다면 결국 그 결핍으로 인해 또 다시 타 장르의 실험극으로 전락하는 일이 반복될 겁니다.

: 방송과 공연을 넘나드는 예술가로서 우리 창 극의 가능성에 대해 말씀해주시겠어요?

: 창극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지요. 판소리에 연기를 더하는 것이기 때문에 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상호간의 호흡으로 감정을 교류하는 것이지요. 그 감정이 결국 제4의 벽을 넘어 관객들에게 이입이 되면서 카타르시스로 이어집니다. 창극은 대한민국을 기점으로 해외로 뻗어나갈 수 있는 우리 고유 예술이라고 생각해요. 잘 가꾸고 발전시킨다면 분명히 세계적으로 주목받을 수 있습니다.

 다시, 또 국악의 대중화!

: 네, TV에서는 항상 웃는 모습만 봤는데, 국악에 대해 진지하게 논하는 모습에 프로의 향기가 느껴집니다. 국립창극단은 들어가기 힘든 곳이고 안정된 곳이라서 나올 때 고민 많이 하셨을 것 같아요.

: 고민이요?(웃음) 전혀요. 오히려 홀가분했어요.

: 왜요? 국립이라면 예술 하는 사람 누구나 입단하고 싶은 최고의 직장 아닌가요?

: 누구에게는 그럴 수 있지만 저한테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물론, 국립창극단에서의 10년은 저한테 소중한 추억이고 성장할 수 있는 공간이었어요. 하지만 ‘국악의 대중화’라는 목표를 이루기에는 한정된 조직생활이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국립창극단을 나오더라도 대중들과 소통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고민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 창극단을 정리한 후 프리랜서로 활동하시면서 위기가 찾아온 적도 있나요?

: 특별한 사건은 없지만 바쁜 스케줄로 인해 목이 안 좋아진다는 건 국악인으로서 위기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방송국은 덜하지만 환풍시스템이 열악한 극장은 먼지가 많아서 목에 무리가 많이 가거든요. 그래도 이정도의 고민은 정말 행복한 고민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조금 더 부지런히 목을 챙기면 되니까요.

: 예전에 TV에서 독신이라는 말을 하셨는데 작년에 결혼을 하셨어요. 어떻게 된 거지요?

: 제 와이프를 만나보셨나요? 만나서 10분만 대화를 나누어본다면 아실 거예요. 왜 결혼했는지.(웃음) 제가 대중들에게 국악의 기쁨을 전해주는 사람이라면 제 와이프는 저에게 삶의 행복을 전해주는 사람이에요.(미소) 제가 와이프를 만난 것처럼 대중이 국악을 꼭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다양한 분들이 국악을 만나 행복하실 수 있게, 국악을 잘 만나실 수 있게 노력하겠습니다.

: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국악의 대중화’를 꼭 이루시길 바랍니다. 앞으로의 활동도 기대하고 응원 하겠습니다. 오늘 귀한 시간 내어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합니다.

 

 

* 《쿨투라》 2018년 12월호(통권 54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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