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회 쿨투라 신인상 문학평론 부문 당선작] 타자를 환대하기 위한 문학적 파토스: 최은영의 소설을 중심으로
[제14회 쿨투라 신인상 문학평론 부문 당선작] 타자를 환대하기 위한 문학적 파토스: 최은영의 소설을 중심으로
  • 김경훈
  • 승인 2020.04.01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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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환멸을 넘어 환대로

신자유주의에 의해 자본이 전일적 시스템으로 자리를 잡은 후 인간의 삶은 끊임없이 자본을 통해 물화物化되어왔다. 대상으로 전락해버린 타자와의 연대 및 소통의 가능성은 박탈되었으며, 균열의 형상들만이 세계의 전모全貌 처럼 보인다. 이러한 전망부재 상태는 필연적으로 윤리적인 것들의 몰락을 가져왔다. 자유, 사랑, 행복 등 윤리적ethical인 것이라고 부를만한 것들이 점차 소실되어가는 가운데, 우리는 존재론적 폭력 및 갈등의 논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들을 점차 상실해 가고 있다.

문학 역시 이러한 시대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강고한 이데올로기, 혹은 총체성을 추구하던 문학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그 영향력 역시 현저하게 약해졌고 그렇기에 담론을 생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축소된 가운데 문학이 취할 수 있는 저항적 태도란 ‘환멸의 정서’ 이상이 될 수 없었다. 2000년대 이후 우리 문학에서 빈번하게 드러나는 실패와 좌절의 형상화, 때로는 극단적으로 치닫는 냉소들은 이러한 영향 아래서 형성된 자기 방어적 태도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우리는 ‘환멸의 정서’가 가지는 한계를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다. 계속되는 ‘환멸의 정서’는 마침내 허무에 가 닿으며, 그렇게 배태된 허무는 결국 ‘세계’에 대한 포기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러한 니힐리즘적 태도가 문학의 외연을 더욱 축소시키는 길로 귀결될 수밖에 없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렇기에 우리들은 ‘환멸의 정서’ 이후를 감각하는 문학을 기대할 수 있어야 한다.

이 같은 시대적 맥락 속에서 최근 매우 의미 있는 시도를 보여주는 작가가 바로 최은영이다. 첫 단편집인 『쇼코의 미소』에 수록된 각 작품들에서 그동안 우리 문학에서 잊혀진 윤리적인 것들을 재발견하고 ‘환멸의 정서’ 이후를 감각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여기서 다루는 작품은 『쇼코의 미소』에 수록된 작품들이며 인용의 경우 작품명과 면수만을 표기한다.) ‘순하고 맑은 서사의 힘’(최은영, 『쇼코의 미소』, 문학동네, 해설 부분, 2016, 7.)이라는 평가는 단순히 그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서사적 외형만을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물론 최은영의 문학은 외적인 측면에서도 온건한 서사를 추구한다고 할 수 있다. 극단적 인물이나 사건, 난해할 정도의 환상성 등이 배제된 작품들은 동시대의 다른 작가들에 비해 ‘순’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순하고 맑은’ 서사가 단순한 낙관론, 혹은 운명론에 기인한 신파新派가 아니다. 그의 서사가 맑다고 느끼게 되는 저변에는 ‘환멸의 정서’에 굴하지 않고 타자와의 소통과 연대를 꿈꾸는 욕망의 벡터가 윤리적인 부분으로 향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현실에서 일어났던, 혹은 진행중인 다양한 문제들과 거기서 비롯된 갈등의 양상을 작품에 전경화 한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들과 대면하는 방식으로 기존에 효과적이지 않다고 생각되었던 전통적 서사와 윤리적 태도를 문학적 파토스pathos로 삼는다. 물론 서사의 행간에 존재하고 있는 치열한 현실 인식과 배태된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한 윤리적 방법 추구가 온전히 최은영 만의 방법론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윤리적인 태도를 문학적 파토스로 하여 화해와 소통의 가능성을 추구하는 최은영의 포즈pose는 동시대의 작가들이 취하는 포즈와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이는 문학이 가지는 서사적 힘이 이 물화된 세계 안에서 여일하게 작동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가능성이다. 이러한 가능성에 대한 기대를 바탕으로 작품의 면면을 읽어 낼 때 우리 문학이 가지고 있는 타자와의 소통 및 연대의 가능성을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 내일을 위한 과거와의 화해

지금_여기에 존재하는 불화의 원인들은 과거에 머물러 있다. 기실 우리는 마주하고 싶지 않은 과거의 순간들을 망각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외침에 담긴 진실은 ‘외면’을 포장하는 수사적 장치일 뿐이다. 그렇게 외면하기를 통해 ‘돌아간 일상’에 소통과 화해가 존재할까? 이러한 물음에 대해 최은영은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아니’라고 답한다. 과거를 단순히 망각하는 것으로는 우리가 결코 타자와의 화해를 이루어 낼 수 없다. 망각에의 욕구는 오히려 현재를 뒤트는 방아쇠가 될 뿐이다. 때문에 최은영은 자신의 작품들을 통해 과거에 대한 반성 없이는 현재의 화해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신짜오, 신짜오」, 「언니, 나의 작은 언니, 순애」 등 두 작품은 현실에서 일어난 역사적 비극을 주제로 한다. 베트남 전쟁(「신짜오, 신짜오」), 인혁당 사건(「언니, 나의 작은 언니, 순애」)은 현재 진행형인 과거이며 동시에 우리들이 외면하고 싶어 하는 역사적 비극들이다. 우리는 이것을 지나간 역사, 혹은 타인의 일로 대상화 시켜서 받아들인다. 하지만 타자는 언제나 역사 한가운데에서 우리와 마주하고 개별적 사건이 다를 뿐 사건의 안에 존재하고 있는 타자는 언제나 지금_나의 옆에 있는 타자와 같은 존재임을 감각하게 된다.

「신짜오, 신짜오」의 주인공인 ‘나’와 ‘엄마’는 마땅히 정을 붙일 곳이 없었던 독일에서 베트남 이민자인 ‘투이’의 가족과 교류를 하기 시작한다. 주말이면 ‘나’의 가족들은 ‘투이’의 집에서 식사를 하고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불렀다. ‘나’의 기억 속 ‘투이’ 가족과의 관계는 매우 특별한 것으로 남아 있다. 특히 ‘응웬 아줌마’의 경우 먼 이국에서 외로워하는 ‘엄마’를 가장 잘 이해해주는 ‘친구’가 되어주었다. 하지만 이들의 관계는 오래가지 못하고 파국을 맞이하고 만다. 베트남 전쟁과 관련한 과거사 문제 때문이다.

사진 속 다섯 사람은 가족처럼 보였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노인은 한 명 밖에 없었고 내 또래의 여자아이, 다연이 또래의 아기 사진도 있었다. 힐끗 훑어봤을 뿐이지만 그 사람들의 얼굴이 내 등 뒤에 달라붙기라도 한 것처럼 신경이 쓰였다.
- 「신짜오, 신짜오」, p.76.

서재 안에 존재하는 제단과 그 앞에 놓여 있는 사진에 대한 서늘한 묘사는 우리들이 애써 잊고자 했던 역사가 여전히 지금_여기에 형태를 가지고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누군가에게는 망각 가능한 사건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삶의 일부임을 암시한다. 그리고 이는 타자에 대한 진정한 사과 없이는 온전한 화해가 불가능함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후 ‘나’의 돌발 행동으로 베트남 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서 ‘나’의 가족과 ‘투이’의 가족은 격렬하게 대립한다. 사과를 하는 ‘엄마’에게 ‘아빠’는 ‘제 정신’이냐고 질문을 한다. ‘아빠’의 기억 속에서 베트남전과 거기서 일어난 일들은 ‘이미 끝난 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망각의 태도야 말로 ‘구역질나는 학살’의 흔적을 잊지 못하는 이들에게 끊임없이 상처를 되풀이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 역사의 아이러니 속에서 가해자는 스스로를 위해 이미 끝난 과거라고 선언하지만, 그 선언에 의해 피해자는 더 절망할 수밖에 없음을 작가는 ‘응웬 아주머니’의 시선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한다. 「신짜오, 신짜오」가 베트남전에 대한 과거사를 통해 가해자의 기만적 망각을 이야기했다면 「언니, 나의 작은 언니, 순애」는 우리 근현대사의 어두운 부분을 통해 ‘평범한 이들’이 과거를 외면하는 방식의 잔인함과 거기서 비롯되는 슬픔에 대해 이야기한다.

검찰은 피고인 8명에게 사형, 7명에게 무기징역, 4명에게 징역 20년, 4명에게 징역 15년형을 구형했다. 일주일이 지난 첫 재판에서 판사들은 검사의 구형 그대로 판결했고, 피고인들은 전원 항소했다. 신문에 따르면 이 사람들은 긴급조치, 국가보안법, 반공법을 위반했고 내란 예비음모 및 선동을 했다. 형부는 사형과 무기형을 면했다. 한 가지 위로가 되는 소식은 그것뿐이었다.
- 「언니, 나의 작은 언니, 순애」, p.106

「언니, 나의 작은 언니, 순애」는 인혁당 사건을 모티프로 한 작품이다. 인혁당 사건의 경우 한국 헌정사에 가장 수치스러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특히 권력에 의해 일어난 사법 살인이라는 측면에서 계획적으로 은폐되고 터부시되었던 사건이기도 하다. 하지만 사건과 관련하여 아직 살아남은 자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청산되지 않은 과거와 슬픔들이 여전히 우리 주변을 부유하고 있다는 것을 이 작품이 보여준다. 다만 「신짜오, 신짜오」에서 명백하게 가해자와 피해자가 이분되었다면 「언니, 나의 작은 언니, 순애」에서는 ‘평범한 사람들’에 의한 무관심과 외면에 집중한다.

작고 가냘프던 ‘순애 이모’는 형부를 만나 자신감을 가지고 행복한 삶을 꿈꾼다. 하지만 그 꿈은 국가 권력에 의해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만다. 형부는 ‘남산’으로 잡혀가고 ‘엄마’는 ‘순애 이모’와 ‘형부’를 위해 ‘민주회복을 위한 기도회’에 참석하려 명동으로 향한다. 하지만 ‘대법원 판결 열여덟 시간 만에’ 형이 집행된 뒤 엄마는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고, 앞으로도 아무것도 모르리라는 것을 깨닫’고 만다. 좌절된 열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희석되고 ‘엄마’는 의식적으로 ‘순애 이모’를 외면하기 시작한다. 물론 작중 ‘엄마’는 ‘순애 이모’에게 직접적으로 위해를 가한 가해자는 아니다.

하지만 ‘상대의 고통을 같이 나눠 질 수 없’기에 ‘무정함을 택하는’ 방식으로 외면을 선택한 ‘엄마’의 모습은 방관자이며 동시에 망각을 가장 올바른 선택지라고 믿고 있는 우리들 전부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때문에 ‘엄마’는 그리고 우리들은 ‘다리를 절며’, ‘오줌을 지리는 형부’의 모습과 그 안에서 비참한 모습으로 세월을 견뎌내는 ‘순애 이모’와 그 ‘딸’을 마주할 수 없는 것이다. 동정과 연민을 통해 나와 다른 불쌍한 존재로 인식 되는 순간 ‘순애 이모’는 엄마에게 외면해야 할 짐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이러한 부정의 순간에 ‘순애 이모’가 느꼈을 절망감과 상실감은 앞선 작품에서 ‘응웬 아줌마’가 느꼈던 절망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작품을 통해 읽어낼 수 있다.

과거는 외면한다고 하여 잊혀 지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외면할수록 그것은 우리의 현재에 관여한다. 과거와 화해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직시해야 한다. 이러한 직시를 통해야만 ‘기만’이 아닌 ‘진정한 화해와 이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최은영이 역사적 사건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단일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반성이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 타자와의 화해, 그 너머의 소통을 위해 지금_여기의 우리들에게 필요한 태도가 무엇인지를 환기시킨다. 그리고 이렇게 환기된 태도들이야말로 타자와의 내일을 위한 화해의 기반임을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다.

 

3. 다음 공동체를 위한 여성성

앞서 최은영이 보여주었던 과거에 대한 직시가 역사적 사건을 바탕으로 한 보편적 화해의 가능성을 모색한 것이라면, 가족 공동체의 해체 양상 속에서 새로운 연대를 발견하고자 하는 희망은 일상적 측면에서 주체와 타자의 소통이 가능하기를 바라는 방식으로 그의 작품에 그려진다.

최은영의 작품 속에서 기존 공동체의 해체 양상은 ‘아버지’의 부재로 나타난다. 작품들에서 아버지는 ‘아주 번듯하게 잘 생겼’지만 이미 죽었거나(「쇼코의 미소」), 혹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거동이 불편하거나(「언니, 나의 작은 언니, 순애」), ‘끊임없는 구직과 퇴직으로 점철’된 인생(「미카엘라」)을 살아가는 이들이다. 즉 아버지에게 집중되어 있던 가부장적 권력이 해체되고 있음을 여러 가지 서사적 장치들을 통해 전달한다. 물론 이 같은 남성적 이데올로기의 배제는 꾸준히 문학적 방법론으로 활용되어 왔다. 다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과거 이러한 배제가 문학적 장치로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면 지금_여기에서 나타나는 것은 ‘배재’가 아닌 ‘부재’로 더 이상 작위적인 것으로 읽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 남성 이데올로기 이후를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시대적 요구로 작용하고 있으며, 모계 혹은 여성성을 중심으로 한 관계망을 형성아여 새로운 연대를 희망하는 최은영의 서사들이 시대적 당위성을 담지하고 있음을 납득할 수 있게 된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나는 선배가 우리 노래패의 학생운동 전통을 끊었다고 비난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미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던 학생운동이 급속도로 무너지던 시기에 선배는 노래패 생활을 했다. 엄격한 선후배 문화. 남학생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집행부, 상명하복식 문화에 선배는 하나하나 문제제기를 했고 기존 구성원들은 그런 선배에게 질려버렸다. ‘형들’이 물려주신 전통을 하나가 되어 지켜나가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자신들이 보기에는 문젯거리도 아닌 일을 붙잡고 기존의 운동 방식까지 비판하는 그녀를 고운 눈으로 봐주는 사람은 드물었다고 한다.
- 「먼 곳에서 온 노래」, p. 199-200.

아직까지 학생운동에 대한 낭만이 살아있던 시절 여성성은 버려야할 무엇인가로 치부되었다. 투쟁의 효율적인 수행을 위해 선택된 남성성이 어느 순간 하나의 강박으로 자리 잡아 삶을 강제하였다. ‘형들’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남성적 이데올로기가 일방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시절 소통은 당연하게 단절 될 수밖에 없었다. 반성 없는 남성성의 우월의식은 다양한 형태의 부작용을 낳게 되었다. 변리사라고 자신을 소개한 선배가 ‘학번을 벼슬’로 “제일 어리고 만만한 여자애”를 붙잡고 주정을 하고, 기자 선배가 “여자의 적은 여자”라고 말하는 것 등이 바로 그것이다. 

작중 주인공인 ‘미진’은 이러한 상황에 대해 비판을 제기 했으나 그녀의 비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녀는 결국 러시아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이 같은 작중 묘사는 단순히 과거 학생운동에 대한 문제 제기 너머에서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남성이데올로기를 은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소통의 가능성을 막는 남성적 이데올로기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전의 연대를 이루었던 이러한 토대가 사라진 뒤 연대를 지탱하는 것은 무엇인가. 최은영은 사라져버린, 혹은 배제되어야 할 남성적 이데올로기의 상실에 대한 대체제로 여성-여성을 바탕으로 한 여성성의 관계에 주목한다.

‘소유’와 ‘쇼코’의 관계는 ‘소유’와 ‘엄마’의 소통으로(「쇼코의 미소」), ‘엄마’와 ‘응웬 아줌마’의 관계는 다시 ‘엄마’와 ‘나’의 관계로(「신짜오, 신짜오」), ‘해옥’과 ‘순애’의 관계는 ‘해옥’과 순애 이모의 딸과의 관계로(「언니, 나의 작은 언니, 순애」), ‘미진’과 ‘소은’의 관계 또한 ‘소은’과 ‘율라’의 관계로(「먼 곳에서 온 노래」) 발전한다. 이처럼 이들의 소통이 끊임없이 연결될 수 있는 이유는 ‘거세’를 바탕으로 한 억압적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느 한 사람이 빠져나간 자리를 다른 이가 차지하는 것이 아닌, 그 빈자리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야 말로 가장 근본적인 소통의 가능성이다. 그리고 이 같은 관계 안에서야 비로소 내가 모르던 타자의 본 모습을 명확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엄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껍데기만 보고 단죄하는 사람들에 대한 반감”을 가질 수 있는 것도, “가끔 말을 들어주는 친구라도 될 일이었다”는 ‘소유’의 후회의 감정도 위와 같은 관계 안에서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논리적으로 증명되지 않지만 형용 가능한 이러한 감각을 바탕으로 작가는 남성적 이데올로기와의 화해를 시도한다. 「쇼코의 미소」에서 끊임없이 환기되는 조손간의 갈등과 화해의 모습은 과거 남성 중심적 이데올로기와의 화해를 이루고자하는 노력의 단면이다.

가끔 할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오면 받지 않거나건성으로 받곤 했다. 할아버지는 늘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무슨일이 있더라도 그냥 당연히, 원래 그렇게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내 상황이 나아지고 자리를 잡아서 떳떳해져야 한다고만 생각했었다.
- 「쇼코의 미소」, p.43.

할아버지가 병을 앓고 있다는 것, 그 결과 그가 자신의 떠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순간부터 ‘소유’는 할아버지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평생 좋은 소리 한 번 하는 법 없이 무뚝뚝하기만 했”던 할아버지의 삶이 결국 “고작 부끄러움 때문이었”다는 걸 인지한 순간 소유가 느낀 감정은 연민이다. ‘닭다리를 후후 불어’서 형부의 입에 가져가는 딸의 모습(「언니, 나의 작은 언니, 순애」), “남편이 노력하지 않았다는 사람들의 말에는 동의 할 수 없는” 여자(「미카엘라」) 역시 아버지라는 존재를 이해하고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모습들의 표상이다.

이처럼 여성-여성의 관계 안에서 길어 올린 소통의 가능성은 타자를 받아들일 수 있는 이해의 발로임과 동시에 전대와의 갈등을 봉합하고 화해할 수 있도록 하는 매개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같은 여성성의 재발견이야 말로 최은영의 작품들이 우리들에게 전달하는 다음 공동체를 위해 준비해야할 감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타자에게 향하는 문학적 파토스pathos

공동체란 관계의 결과물이다. 하지만 이러한 공동체를 상실했기에 우리들은 현실의 벽 앞에서 좌절하고 환멸의 정서 안에서 배회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이제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타자의 발견은 지금_여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요원한 일이며 의식하지 않는 한 나와 다른 타자는 발견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기에 지금_여기 이후의 공동체는 이처럼 상실된 타자를 우리 앞에 위치시키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타자를 환대한다는 것은 그를 내 안으로, 주체의 중심으로 끌어다 놓는 것이다. 다만 그런 환대를 위해서 우리들이 마주하게 되는 것은 피투된 존재로써의 인간, 근원적 불행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상기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하다면 동정과 연민을 넘어 타자를 통해 나를, 나를 통해 타자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최은영의 소설은 매우 ‘순’하다. 하지만 그 ‘순’함의 뒤편에는 타자를, 그리고 공동체의 복원을 위한 뜨거운 문학적 파토스pathos가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문학적 파토스야 말로 최은영이라는 작가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가능성일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미 수많은 환멸과 냉소를 경험 했지만 그것들이 결국은 허무로 귀결될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최은영의 소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우리 문학에 있어서 그리고 그 배경이 되는 우리 사회에 있어서도, 새로이 공동체의 부활을 지향하는 조짐이 여러 모형으로 감지되고 있다. 그러한 문학과 현실의 여러 부면에서 우리는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혹은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타자의 존재를 확인하고 공감할 수 있다. 이러한 현실적 상황과 더불어 지금_여기에서 최은영이 보여주고 있는 서사적 글쓰기는 그야말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타자에 대한 환대와 새로운 공동체를 위한 포즈야 말로 세계를, 또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며 더 나아가 다음 공동체에 대한 문학적 가능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경훈 경기대 문예창작과 졸업하였으며, 경희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했다. 제14회 쿨투라 신인상 문학평론 부문 당선.

 

 

 

* 《쿨투라》 2020년 3월호(통권 69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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