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ie] 봉준호의 단편 영화 두 편, '백색인'과 '지리멸렬'
[movie] 봉준호의 단편 영화 두 편, '백색인'과 '지리멸렬'
  • 김경욱(영화평론가)
  • 승인 2020.04.22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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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번째 단편영화 <백색인>
  봉준호는 연세대 재학 시절 영화동아리 ‘노란문’을 만들고 활동하면서 16mm 필름으로 첫 번째 단편영화 <백색인>(1993, 18분)을 찍었다. 당시 무명의 연극배우였던 김뢰하를 주인공으로 캐스팅했다. 봉준호의 대학선배 안내상의 모습도 볼 수 있다.

  W(김뢰하)는 평범한 회사원처럼 보이지만, 어항의 금붕어를 꺼내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괴롭히는 가학적인 인물이다. 타이틀 신에서 W의 얼굴이 유리에 비쳐 두 개의 얼굴이 동시에 보이게 되는 쇼트는 W가 이중적인 인간이라는 느낌을 준다. W는 출근길에 아파트 주차장에서 잘린 검지손가락을 발견하고 별다른 동요 없이 주워 담는다. 이것은 데이비드 린치의 <블루벨벳>(1986)에서, 제프리가 풀숲에서 잘린 귀를 발견하는 장면을 생각나게 한다. 제프리는 잘린 귀를 경찰서로 가지고 갔지만, W는 잘린 손가락을 쓸모 많은 장난감처럼 하루 종일 이리저리 가지고 논다.

  집에 돌아온 W는 텔레비전을 보다 잠이 든다. 그가 보지 못한 뉴스에 따르면, 그 손가락은 금속회사 노동자(안내상)가 작업 중에 사고로 잃은 것이다. 1980년대 운동권에서 널리 회자된 김민기의 노래굿 <공장의 불빛>(1978)에서 나오는 노래 ‘야근’의 가사(“서방님의 손가락은 6개래요, 시퍼런 절단기에 뚝뚝 잘려서 한 개에 오 만원 씩 이십만 원을 술 퍼먹고 돌아오니 빈 털털이래…”)가 떠오르는 설정이다. 산업재해를 입은 그 노동자는 분노한 나머지 사업주를 폭행해 구속되었다. 다음 날 아침, 출근길의 W는 흥미를 잃어버린 장난감인 듯 그 손가락을 길가의 개에게 던져준다.

  W가 사는 관악구 봉천동 지역은 두 개의 공간으로 나뉘어 있다. 고지대에는 W의 아파트 단지가 병풍처럼 늘어서 있고, 저지대에는 낡은 단독주택과다세대 주택이 빽빽하게 차 있다. 1970-80년대 서울의 대표적인 달동네였던 봉천동 지역이 1990년대에 고지대부터 개발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W와 금속회사 사장이 고지대 아파트에 사는 반면, 손가락을 잘린 노동자는 저지대 주택의 셋방에서 노모와 함께 산다. <기생충>의 박 사장 가족이 고지대 저택에 살고, 기택 가족이 저지대 반지하 집에 사는 것과 비슷하다.

  W의 아파트를 걸어서 가려면, 무질서하게 펼쳐진 재래시장을 지나 허름한 집들 사이의 미로 같은 골목길을 한참 올라가야 한다. 차가 고장 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그 공간을 걸어서 지나가게 된 W에게 그 모든 건 짜증스런 경로일 뿐이다. 그러나 W를 계속 따라가던 카메라는 문득 W가 무심히 지나간 그 공간으로 시선을 돌린다. 이 때 허름한 주택들과 멀리 보이는 아파트 단지는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빨래가 널려 있는 골목길을 느린 트래킹으로 지나가는 카메라는 서정적인 사운드트랙과 함께 그 공간의 정취를 담아낸다. 다음 장면에서 카메라는 저녁노을을 보려는 듯, 그 골목길을 이전 쇼트와는 반대 방향으로 다시 트래킹 한다. 해가 지는 것처럼, 아이들이 골목길에서 뛰어놀고 옷가지들이 빨랫줄에 걸려 바람에 날리는, ‘사람 냄새나는 공간’은 개발의 열풍에 밀려 곧 사라져갈 것이다. W의 아파트 공간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는데, 엔딩 크레디트에서 다시 등장하는 동네 골목에는 아이들이 즐겁게 뛰어논다. 봉준호는 거듭 그 공간을 카메라에 담아내면서, 그곳에 대한 애정과 소멸의 아쉬움을 드러낸다.

  이후 봉준호 영화에서 이렇게 감상적인 순간은 찾아보기 어렵다. 1993년으로부터 강산이 두 번도 더 변한 세월이 흐르고 그사이 신자유주의의 광풍이 몰아치고 난 다음에 연출한 <기생충>에서, 허름한 주택가가 다시 등장하지만 <백색인>에서의 정서는 전혀 없다. 기택 가족이 사는 공간은 술꾼이 방뇨를 하고, 해충이 출몰하고, 소독차의 살충제 연기가 집안까지 밀려들고, 폭우가 내리면 물에 잠기는, 사람 사는 정취는커녕 사람이 살기 어려운 곳이다.영어제목이 ‘White Man’인 <백색인>의 의미는 W같은 화이트칼라를 가리킨다. W가 출근하기 전에 틀어놓은 텔레비전의 뉴스에서는 지방의회 의원과 공직자들의 등록재산 규모와 축소의혹 문제 등을 전한다(연이은 뉴스에서는 남자양궁 선수가 세계 대회 금메달을 땄다는 소식이다. 양궁선수인 <괴물>(2006)의 남주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정치인들에 관한 부정적인 뉴스와 W의 엽기적인 행태를 통해 봉준호는 화이트칼라에 냉소를 보낸다.

영화아카데미에서 연출한 <지리멸렬>

  대학을 졸업한 봉준호는 1994년, 한국영화아카데미에 입학했다. 여기서 단편영화 <지리멸렬>(1994, 31분)을 찍었다. 이 영화는 3개의 에피소드와 에필로그로 구성되어 있다.

  ‘에피소드 1, 바퀴벌레’-연구실에서 포르노잡지를 탐독하던 교수가 가까스로 망신당할 위기에서 벗어난다. ‘에피소드 2, 골목 밖으로’-아침운동을 하면서 습관적으로 남의 집 문 앞에 배달된 우유를 훔쳐 먹는 중년 아저씨가 신문배달 소년을 골탕 먹인다. 에피소드 3, 고통의 밤-회사원처럼 보이는 만취한 남자(김뢰하)가 아파트 후미진 곳에서 급한 용변을 해결하려다 경비원에게 걸려 창피를 당한다. 그는 악랄한 방식으로 경비원에게 복수한다.

  에필로그에서 세 사람의 구체적인 정체가 드러난다. 에피소드 1의 교수는 연세대학교 심리학과(사회심리학 전공)의 길지영, 2의 중년 아저씨는 조선일보 논설위원 허윤철, 3의 남자는 서부지청 부장검사 변재석이다(영화의 도입부 자막에서, ‘이 영화의 모든 실명은 사실성을 위해 무작위로 선택, 사용되었을 뿐’이라고 명시하고 있지만, 왠지 모델이 된 실존인물이 있었을 것 같다). 그들은 ‘반사회적인 흉악 범죄로 땅에 떨어진 우리사회의 도덕성 문제를 총체적으로 진단해 보는’ 텔레비전 토론시간에 구체적인분석과 방향을 제시해줄 전문가들로 한 자리에 모인다. 음란하고, 야비하고, 악랄한 면모를 보였던 그들은 성인군자인 척하며 서로 뒤질세라 요즘 젊은이들은 가정교육, 학교교육이 문제라며 개탄한다.

  토론 프로그램이 방송되는 동안 잠을 자던 에피소드 2의 신문배달 소년은 그들의 목소리에 깨어나 소음을 제거하려는 듯 텔레비전을 꺼버린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들의 토론 장면은 푸마 매장의 전광판에 등장하지만 아무도 주시하지 않는다. <백색인>에 이어 이 영화에서도 화이트칼라의 위선과 가학적 성향을 풍자하는 결말이다. 그러나 사회의 약자인 신문배달 소년이나 경비원이 피해를 입는 반면, 그 화이트칼라들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어떤 대가도 치르지 않는다. 여기서 불공정한 사회에 대한 냉소적인 시선이 드러난다. 이렇게 계급이 아래로 내려갈수록 더 나쁜 상황에 직면하는 설정은 이후 봉준호 영화에서 자주 볼 수 있다.

  또 <지리멸렬>에는 이후 봉준호 영화에서 반복되는 설정이 들어있어 흥미롭다. 교수가 자신이 보던 포르노잡지를 여학생이 보기 직전에 신박한 방법으로 막아내는 장면이나 검사가 한밤중에 화장실을 찾아 헤매는 장면 같은 블랙코미디는 언제나 봉준호 영화의 재미를 더해주는 요소이다. 신문배달 소년이 자신에게 골탕 먹인 조선일보 논설위원을 잡으려고 할 때, 두 사람은 술래잡기 하듯 쫓고 쫓긴다. 이러한 추적 장면은 <플란다스의 개> <살인의 추억> <옥자> 등에서 계속 반복된다. 문제의 검사는 마침내 아파트의 지하실에서 경비아저씨에게 재난이 될 엽기적인 방식으로 급한 용변을 해결한다. 이렇게 봉준호 영화의 지하 공간에서는 항상 나쁜 일이 벌어진다. 아파트 지하실에서는 경비아저씨가 주민들의 개를 잡아 보신탕을 해먹거나 부랑자가 숨어살고(<플란다스의 개>), 지하 보일러실에서는 형사들이 용의자들에게 무자비한 고문을 가하고(<살인의 추억>), 원효대교 아래 지하공간에는 괴물이 먹이가 될 인간들을 잡아다 저장해 놓고(<괴물>), 지하벙커에서는 기택 가족이 문광 부부와 마주하게 되면서 위기에 빠진다(<기생충>).

  <백색인>과 <지리멸렬>은 사회에 대한 감독의 시선과 메시지가 도식적인 느낌을 주지 않고 자연스럽게 녹아있다. 코믹하고 엽기적인 설정에 예상하지 못한 아이디어를 가미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이것이 봉준호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봉준호 자신은 ‘어쩌다 사회학과를 가기는 했는데 그다지 큰 관심은 없었다’고 말하지만, 연출에 입문한 두 편의 단편영화를 보면, 결코 우연은 아니었던 것 같다.

 

 

* 《쿨투라》 2020년 4월호(통권 70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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