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월평] '1917' '작가미상', 세상을 구원하고 나를 구원하다
[영화 월평] '1917' '작가미상', 세상을 구원하고 나를 구원하다
  • 김시균(매일경제 기자)
  • 승인 2020.04.23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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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두 가지 구원(救援)의 이야기가 있다. 샘 멘데스의 <1917>과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의 <작가 미상>이다. 전자가 파국의 중심부에서 하나의 세상을 구원한다면, 후자는 또 다른 파국에서 스스로를 구원하려는 영화다. 그 구원의 매개는 ‘언어’(<1917>)와 ‘예술’(<작가미상>)이며, 저마다 1·2차 세계대전을 출발점으로 내세우고 있다.

 

  종교적 구원의 서사
  <1917>은 구약의 출애굽기를 얼마간 변주한다. 요컨대 어딘가로 떠나고, 떠남의 주체가 죽고, 그 주체를 대신한 누군가가 임무를 떠맡는다. 이것은 모세가 박해받는 유대인들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이르는 과정과 맞닿는다. 하지만 가나안으로의 여정에서 모세는 죽게 되고, 여호수아가 그 임무를 대행한다. 여호수아는 요단강을 건넌 끝에서야 간신히 약속의 땅에 다다른다.

  출애굽기를 모티브 삼은 영화는 많으나 ‘약속의 땅으로의 떠남→주체의 죽음→임무의 대행→강물을 건넘→임무의 완수’라는 얼개를 그대로 좇는 경우는 드물다. 일례로 서에서 동으로의 역전된 여성주의 서부극인 <더 홈즈맨>(감독 토미 리 존스·2014)이 있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메리 비 커디(힐러리 스웽크)는 아픈 여인 셋을 이끌고 약속의 땅 동부 아이오와주로 가야만 한다. 하지만 중도에 메리는 죽음을 맞고 무법자 조지 브릭스(토미 리존스)가 그녀 임무를 대행하게 된다. 그가 여인들을 두고 가버리려다 임무를 끝까지 완수하는 건 영화 중후반 요단강의 변주라 할 강물 시퀀스에서부터다. 떠나려는 그를 여인 셋이 비틀대며 쫓아오자 그런 그녀들을 얼싸안은 채로 그는 힙겹게 물살을 헤친다. 이후부터 그는 여인들을 무사히 목적지로 데려가는 데에만 진력하게 된다.

 

  <1917>도 흡사하다. 영국군 병사 스코필드(조지 멕케이)와 블레이크(딘 찰스 채프먼)의 임무는 15km 전방 부대의 수장 매켄지 중령(베네딕트 컴버배치)에게 에린무어 장군(콜린 퍼스)의 공격 중지 명령을 신속히 전하는 일이다. 공격이 개시될 경우 독일군 함정에 걸려 이내 궤멸할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둘의 임무는 전방에 있는 1600여명 병사들 목숨을 구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들중엔 블레이크의 친형도 있다. 블레이크에게 친형의 목숨을 구해야 한다는 사적인 이유가 있다면, 스코필드에겐 그럴 만한 동기가 없다. 그저 어느 오후 한낮 나무 그늘에서 잠을 자다 친구가 잠을 깨워 따라간 게 이 위험천만한 임무를 떠맡은 배경이다. 하지만 임무 중 블레이크는 숨을 거두고, 스코필드는 졸지에 혼자가 된다.

  무드가 전환되는 건 그가 죽음의 다리(무너진 철교)를 건너고부터다. 그 다리 너머 곳곳으로는 보이지 않는 독일군이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다. 그가 철저히 혼자가 된 이때부터 영화는 세기말의 묵시록적인 무드를 강화하는데, 절묘하게도 1920년대 독일 표현주의 미장센이 활용되고 있다(물론 당대의 독일 영화를 표현주의로만 환원해선 안 될 것이다). 독일군이 휩쓴 지옥도를 묘사한 가장 독일적 양식. 무너진 폐허 위를 스코필드가 누빌 때면 전장의 실감(實感)을 부각해주던 사실주의는 잠시 퇴각한다. 조명은 과장되고 명암 대비는 한층 강렬해진다. 치솟는 불길과 함께 화면 구석구석으로 그림자가 스멀대면서 이따금 검은 독일군 형상이 아른댄다. 그럴 때의 느낌은 마치 F. W. 무르나우의 <노스페라투>(1922)와 로베르트 비네의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1919)에서의 그것이다.

  숨 가쁘게 전진하는 스코필드의 육체 저편으로 드러나는 건 타오르는 불길이 드리운 주홍빛 배경 아래 십자가다. 파국의 중심지에 선 이 선연한 십자가 형상은 그의 행위가 종교적 사명에 가까워졌음을 드러내는 심벌이다. 결국 그는 독일군을 피해 강물로 추락하게 되고, 간신히 이 20세기 요단강을 건너 이름 모를 육지에 당도한다. 그런 그의 귓가로 들려오는 건 누군가가 부르는 구슬픈 노래이다.

  “요단강을 건너 사랑하는 이를 보러 집에 가네, 그저 집으로 가네….”

  요단강을 지나 노랫말을 따라 걸은 끝에 그가 마주하는 건 그리하여 매켄지 중령 부대의 병사들이다.이제 곧 약속은 완수되고, 하나의 세상은 구원될 것이다. 묘한 안도감과 함께 영화가 기어이 목울대를 시큰해지게 만드는 건 마지막 순간에 이르렀을 때다. 가까스로 임무를 완수한 스코필드가 죽은 친구의 형(리차드 매든)에게 다가가는 바로 그 순간 얘기다. 둘이 나누는 대화는 내용만을 놓고 봤을 때 상투적이기 그지없다. 하지만 그것이 상투적일 수밖에 없는 맥락까지 고려한다면 얘기는 사뭇 달라진다. 그럴 때의 상투성이란 저마다의 가슴 저편으로 고요한 파문 하나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한 대사를 떠올려본다. 동생의 소식을 이제 막 들은 형이 애써 덤덤한 척 스코필드에게 말한다. “밥 먹으려면 저기 저 막사로 가면 돼.” 지금도 이 대사는 참 많이 사무친다. 무방비 상태로 찾아든 슬픔을 간신히 누르며 토해내었을 저 소박한 한 마디엔 생(生)의 귀중한 진실이 깃들어 있다. 그렇다고 믿고 싶다.


  실재의 공포를 극복하다
  <작가 미상>의 주인공 쿠르트 바르너트(톰 쉴링)는 현존하는 현대 미술가 게르하르트 리히터(1938~)를 가리킨다. 리히터가 동독의 드레스덴에서 태어나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기 수개월 전 서독으로 망명하고, 미국에서 건너온 현대 예술의 세례를 받아 저만의 예술을 정립하는 과정을 그린다. 주지할 것은 이것이 리히터의 온전한 자전적 이야기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감독의 구미에 맞게 편취와 가공이 곁들여진 까닭이다.

  영화는 그가 현대 미술이 탄압받던 나치 파시즘 시대를 지나 동독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관통한 다음 ‘리히터의 블러’(Richter’s blur)로 명명될 흐리기 효과를 창안하기까지를 다루는데, 그 과정에 영향을 준 미국 팝아트나 플럭서스 퍼포먼스 등의 흔적은 최소화된다. 그의 예술이 회화의 갱신이라는 걸 부각해내기 위한 곁가지 제거일 것이다. 그래서 그가 거의 모든 예술양식을 차용하고 아울렀던 초월의 예술가라는 사실은 <작가 미상>만 봐서는 알기 어렵다. “나는 스타일이 없는 것을 좋아한다. 사전, 사진, 자연, 나와 내 그림들- 왜냐하면 스타일은 폭력이고, 나는 폭력적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했었다.

  예컨대 서독 망명 초기 리히터가 동료 예술가 콘라드 피셔와 함께 첫 작품으로 선보인 퍼포먼스 이야기는 극중에 빠져 있다. 1963년작 <팝과 더불어 살기-자본주의 리얼리즘 선언> 얘기다. 실제로 리히터가 사진을 회화로 베끼는 작업을 벌였던 것은 1962년이었고, ‘아틀라스’라는 이름의 사진첩에서 고른 사진들을 원작 회화 밑그림으로 썼던 것이 1964년이었으니, 그 사이 경력을 의도적으로 누락한 것이다.

 

  <작가 미상>에서 소년 쿠르트에게 사촌 엘리자베스 메이(사스키아 로젠달)의 죽음은 가장 큰 정신적 외상으로 작용하고 있다. 시대의 상처를 온몸에 새긴 메이는 이따금 정신병적 증세에 시달리는데, 이는 순혈주의를 강조하는 나치 독일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때문에 병원으로 그녀는 강제 감금되고, 이내 다운증후군 환자 등과 더불어 가스 살해되고 만다(그녀가 가스 살해로 죽었다는 설정은 사실과 다른 대목이다).

  영화는 메이가 강제로 병원차에 끌려가는 순간을 공들여 보여준다. 끌려가는 메이가 흐느낄 때 저 멀리 가족곁에 선 어린 쿠르트는 한 손을 들어 가로로 눕혀서는 눈앞의 광경을 가린다. 끔찍한 실재(實在)를 대면하지 않으려는 조그만 저항. 하지만 실재에의 공포는 그런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손을 내리면 다시금 육박해올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실재를 가리려는 행위는 훗날 그의 흐리기 효과의 창안으로 연결된다

   영화는 연대기 순으로 흐른다. 배경인 동독과 서독은 직접적으로 ‘억압’과 ‘자유’의 공간을 대변한다. 나치 독일의 파시즘 이후 사회주의가 득세한 동독은 여전히 예술 전반에 대해 억압적이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재현만이 용납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동에서 서로의 탈출이 억압에서 자유로 나아가는 여정인 것만은 아니다. 동독의 청년 쿠르트에게 거대한 억압의 대타자로서 작용하는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사촌 누이를 죽게 만든 나치 친위대 의사이며 연인 엘리 시반트(폴라 비어)의 부친인 칼 시반트(세바스티안 코치) 얘기다. 칼은 동독과 서독을 종횡하며 극 내내 쿠르트의 삶을 간섭하고 짓누른다. 쿠르트가 엘리를 아내로 맞게 되면서 칼과의 관계를 지속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는 탓이다. 물론 그 상황은 쿠르트의 선택이었고, 그 선택은 얼마간 그의 죽음에의 충동처럼도 여겨진다. 하지만 그는 이를 삶에의 의지로 다잡는데, 그 의지의 원천은 물론 예술이다.

 

  요컨대 칼이라는 억압적 대타자를 극복하는 것이야말로 쿠르트에겐 자기 구원에 다름 아니라고 영화는 역설하고 있다(리히터 부인의 부친이 실제 나치 친위대 의사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그 구원의 양식은 바로 회화의 부활이다. 역설적인 것은 이를 위해 활용되는 게 사진이라는 점이다. 현실의 한 단면을 그대로 찍어내는 사진의 탄생 이래 회화에서 대상의 재현이란 그 가치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사진이 죽인 회화, 그런 회화를 살린 사진. 쿠르트는 제 회화 소재인 살인자 칼과 죽은 메이를 담은 두 장의 사진을 그림에서 나란히 병치시키게 된다. 병치의 계기는 순전한 우연적 산물이다. 작업실 창문 바깥에서 들어온 빛이 반사해 이젤 위 캔버스에 투영되면서 두 사진이 한데 포개어진 것이다. 살인자 칼과 희생자인 누이의 모습이. 누이의 품엔 어린 시절 쿠르트가 안겨져 있고, 그녀 손가락은 자신을 죽게 한 칼을 겨눈 채다.

  그렇게 실재의 공포는 다시금 육박해온다. 하지만 과거와 달리 쿠르트는 외면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마주한 그대로를 캔버스에 베끼는 것으로 제 외상적 기억과 맞대면한다. 그런 다음 그 표면을 붓으로 쓸어냄으로써 전체적 윤곽을 흩트려 놓는다(리히터의 블러). 사진과 회화의 경계를 허문 새 회화가 이로써 재탄생한다. 한 젊은 예술가가 스스로를 구원하고, 죽은 회화의 시대 또한 그렇게 구원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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