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특별기고] 불세출의 문학 연구와 비평, 그 정신과 예술혼 - 우리 시대 문학의 거장 김윤식 선생을 영결하며
[12월 특별기고] 불세출의 문학 연구와 비평, 그 정신과 예술혼 - 우리 시대 문학의 거장 김윤식 선생을 영결하며
  • 김종회(문학평론가, 경희대 교수)
  • 승인 2018.12.28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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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반세기에 걸쳐 한국문학 연구와 비평에 독보적인 성과를 이루었던 큰 별 하나가 역사의 지평 너머로 이울어갔다. 김윤식 선생. 향년 82세다. 1962년 《현대문학》에 「문학사방법론 서설」이 추천되어 문단에 나온 이래 무려 200여 권의 저술을 내놓을 만큼 초인적인 필력을 자랑한 선생은, 가히 한국문학의 국보급 학자요 평론가로 불러도 손색이 없을 터이다. 이는 단순히 저술의 분량이 많다는 일반적 사실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그 연구가 보여준 진전된 시각과 새로운 논의 영역의 개척을 함께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를 잃는 것은 우리 문학사가 포괄하고 있는 축적된 지식과 정제된 비평의 성과를 잃는 것이기에 더 가슴 아픈 것이다.

 예컨대 『한국근대문예비평사연구』와 같은 저서는 문학에 관한 이론과 그 가치를 정립하고 한국 근대 비평의 실천적 방법론을 체계화 했다. 그런가 하면 『이광수연구』나 『이상연구』와 같은 저서는 더 남아있는 이광수 및 이상에 대한 연구가 없다고 할 만한 결정판의 면모를 보였다. 그 많은 연구서와 월평·계간평을 포함한 현장비평에 이르기까지 그의 글에는 거의 태작駄作이 없었다. 한 문필가의 생애를 통해 어떻게 이와 같은 일이 가능했는지 참으로 불가사의한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알려지기로는 일생을 대학 강단에 서면서 오전에는 집필, 오후에는 강의, 저녁에는 독서로 일관했다고 하니 문학 연구와 비평은 그의 꿈이요 즐거움이요 어쩌면 종교적 이상과 같지 않았나 싶다.

 1960년대에서 70년대로 넘어오면서 한국 문단은 서구 이론을 도입한 새로운 시각의 비평을 넘어, 국문학자가 중심이 되어 작품 그 자체의 면목을 들여다보는 본질 탐색의 비평이 대두했다. 그 중심에 김윤식 선생이 있었고 그와 더불어 소위 ‘스타 비평가’의 무대가 열렸다. 그처럼 화려한 광영이 그의 몫이었으나, 그 삶의 뒤안길을 되돌아보면 쉬는 때도 휴가를 가는 날도 없이 언제나 책상 앞에서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만 가지고 있었던 선생의 삶이 외롭고 무거운 그림자처럼 잠복해 있다. 우리가 베토벤의 선율에서, 고흐의 화폭에서, 두보의 방랑시편에서 어렵지않게 발견할 수 있는바, 불세출의 예술을 생산한 위인의 아프고도 슬픈 삶의 행적이 선생에게도 꼭 같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선생 스스로 의식의 끈을 놓고 병상에 누워 있는동안, 선생의 미망인은 그 머리맡에 생전에 좋아하던 노래 몇 곡을 틀어놓았다. 이원수가 짓고 리틀엔젤스가 노래한 <고향의 봄>, 고은이 짓고 양희은이 노래한 <세노야>, 그리고 이은상이 짓고 엄정행이 노래한 <가고파>였다. 선생은 노래하는 것을 즐겨하지 않았으나 이 세 곡을 늘 마음에 담고 다녔다는 것이다. 미망인은 그를 영결하는 추모식장에 또 하나의 노래를 요청했다. 배경모가 짓고 윤시내가 열창한 <열애>였다. 일찍이 아프리카 수단에 선교사로 가서 정말 도움이 필요한 그곳 원주민들을 위해 몸과 마음을 모두 불사른 고 이태석 신부의 마지막 길에서 이 노래를 감동적으로 들었다고 했다. 추모식의 진행자였던 필자와 참석자들은 이 노래와 함께 모두 오열했다.

 이 신부의 종교적 신념과 한 인간으로서의 희생이 고귀한 이상을 향한 흔들림 없는 열애였다면, 한평생을 구도자적 열정으로 문학 연구에 매진한 김윤식 선생의 헌신 또한 그와 같은 열애였음이 분명하다. 미망인은 어디 한 번 마음 편하게 놀러 가지도 않고, 심지어 말년에 걸음이 불편하여 겨우 이른 화장실에서도 책을 읽고 있던 선생이 불쌍하다고 울먹였다. 필자는 그러한 선생의 모습에서 가장 좋아하고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에 혼신의 열정을 바친 위대한 학자의 정신과 예술혼을 보았다. 그처럼 집중하고 몰두하지 않고서 어찌 한 세기의 에포크를 긋는 불세출의 문필이 탄생할 수 있었겠는가 말이다.

 지난 10여 년 간 필자는 선생을 대학원 강의에 모시기도 하고, 이병주기념사업회 일로 선생과 지근거리에 있기도 했다. 또한 선생과 공동 명의로 10여 권의 책을 편찬하기도 했다. 필자가 미국 강연을 간다고 했을 때, 선생은 사람을 시켜 왕유의 이별시 ‘송원이사안서送元二使安西’를 육필로 적고 노잣돈을 보태어 보냈다. 거기 ‘가다가 주막을 만나거든 목이나 축이고 가소’란 메모가 들어 있었다. 지금도 책상 위에는 월평을 쓸 신간 문예지가 도착해 있고 원고지와 펜이 준비되어 있다는 선생의 문학정신 앞에 애써 눈물을 참고 옷깃을 여미며 평소의 존경과 사랑을 다하여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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