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한 차원 높은 존재 전환의 순간으로
[INTERVIEW] 한 차원 높은 존재 전환의 순간으로
  • 유성호(문학평론가, 본지 주간)
  • 승인 2020.05.22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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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밸리에서 죽다』의 시인 이재무

1. 원초적 순수 생명의 세계를 발견한 경험

 이재무(李載武)는 누구보다도 경험과 실감을 중시하면서 시를 써온 시인이다. 그때그때 다가오는 선명한 경험과 그로 인한 기억들이 이재무 시의 고유한 수원(水源)이었다. 그래서 그의 시는 의뭉한 난해성의 저편에서 펼쳐졌고, 자신을 향해서나 독자를 향해서나 살가운 깨달음과 눈이 번쩍 뜨이는 감동을 선사해왔다. 그의 시에는 비교적 분명한 대립적 요소가 숨겨져 있는데 그것이 ‘고향’과 ‘객지’라는 확연한 대조적 형상이다. 깨끗한 가난과 그리운 가족의 이미지가 출렁이는 고향은 시인의 존재론적 모태이자 궁극적 거처로서 순간순간 재생되고 점멸한다. 하지만 객지의 삶은 분주하고 피로한 시간이 강요되는 생존경쟁의 장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흐름은 비교적 투명하고 단호하게 이어져왔다.

 최근 이재무 시인은 열두 번째 시집 『데스밸리에서 죽다』(천년의시작, 2019)를 펴냈다. 1983년 동인지 『삶의 문학』에서부터 시작된 시인으로서의 삶이 올해로 37년 정도 지났으니까 정말 부지런하고 균질적으로 대략 3년 터울의 자식들을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그는 시선집, 산문집, 시 해설집 등 다양한 파생적 언어를 또 왕성하게 산출함으로써 그때그때 자신을 기억하는 표지(標識)를 세우는가 하면, 시로는 다 못한 말을 논리적으로 풀어놓기도 했다. 문단에 이미 ‘58년 개띠’로 유명한 그이지만 동년배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왔고 또 그에 준하는 시적 성과를 내놓은 셈이다.

 이재무의 시를 좋아하고 그의 시집을 찾고 또 SNS에서 작품을 유통하며 즐기는 독자는 참으로 많다. 그의 시집은 베스트셀러는 아니었지만 나올 때 마다 일정한 신뢰와 기대로 사람들이 찾아 읽고 전하는 스테디셀러가 되었다. 시집마다 평균 6~7쇄를 찍었으니 웬만한 인기 시인도 그 지속성을 부러워할 만하다. 이번 시집은 비평적 관점에서 볼 때 이재무 시의 정점을 이어가면서 향후 강화되거나 심화되어 갈 속성을 많이 품고 있는 일종의 터닝 포인트를 풍부하게 암시한다는 점에서 꽤 인상적이다. 시인 스스로는 뭐라고 할까? 이번 시집이 이재무 시의 역사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한번 들어보자.

“제 시의 역사를 스스로 이야기하는 것이 퍽 쑥스럽고 계면쩍은 일이군요. 시인이라면 누구나 초기, 중기, 후기라는 게 있을 텐데 말하자면 제 시의 후기가 시작되는 지점이 아닐까 합니다. 저는 원래부터 무슨 의도나 계획을 가지고 시를 쓰지 않았어요. 그때그때 찾아오는 감응으로 썼지요. 하지만 무의식에 잠긴 것들이 돌출되는 거야 어쩔 수 없겠지요. 시집을 내고 나서 알았는데 이상하게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보이는 거예요. 물론 그 죽음은 무겁고 어두운 것은 아니고 매우 긍정적인 관조의 성격을 보이고 있기는 하지만요. 그런 것이 이전 세계와 변별되는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번 시집에서 이재무는 자신의 브랜드인 경험적 구체성과 소탈함 그리고 서정의 극치를 이루는 소통 지향의 발상과 표현은 지속하면서, 한편으로는 조금 더 실존적인 부분으로 이월되어간 것 같다. 좋은 서정시는 독자들에게 경험적 실감을 한편 따뜻하고 한편 서늘하게 제공하는 법인데, 이재무의 시는 구체적 상황과 절실한 기억이 아름다운 이미지의 도움 아래 그러한 목소리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한 존재 전환의 순간을 맞기까지 어떤 경험적 실감들이 있었을까? 특별히 “내 지난날의 습기 많은 생을 묻었다.”라고 서문에 썼는데 그렇다면 습기 많은 생을 묻고 나서 어떤 차원이 펼쳐졌을까?

“작년 8월에 미주문인협회 초청으로 9박 10일 일정 정도 LA, 라스베이거스, 그랜드캐년 등의 일정을 소화했어요. LA에서 라스베이거스로 가는 중간쯤 데스밸리가 있었는데 우리 말로 풀면 ‘죽음의 계곡’이지요. 그야말로 광활한 사막 혹은 구릉지 같은 곳이었는데, 좀 거창하게 말하면 니체가 말한 ‘무의 시간’을 거기서 느꼈습니다. 태초의 시간이 있으면 이런 곳이 아닐까 하는 것, 그때의 느낌은 지나온 삶의 회한을 모두 거기 묻으면서 어떤 원점에서 새로운 출발을 하고 싶다 하는 것이었어요.”

 우리말에 ‘끄트머리’라는 말이 있다. ‘끝’과 ‘머리’를 합친 기막힌 말이다. 끝이 머리라는 것, 죽음이 곧 삶이라는 것. 비우는 것이 곧 채우는 것이라는 역설의 문법이 그 안에 있다. 죽음이 곧 시작이라는 모티프는 이번 시집의 표제가 되어주었다. 그래서 40년 가까운 그의 시적 기율은 충실하게 이어지면서 그 나름으로 중요한 변곡점도 담은 시집이 말하자면 『데스밸리에서 죽다』인 셈이다. 이재무 시의 빼어난 점인 기억할 만한 은유, 대상에 대한 간절함, 낱낱 사물과 순간의 충실한 형상화를 딛으면서 이재무는 자신이 나아갈 새로운 방향을 예감케 해준 것이다. 데스밸리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시원(始原)” 곧 원초적 순수 생명의 세계를 발견한 경험을 투명성과 살뜰함으로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2. 시간에 대한 관심과 형이상학적 존재론의 가능성

 이번 시집에는 다양한 소리들이 저마다의 음색을 띠고 들려온다. 창으로 들어오는 빗소리, 차갑고 투명한 개울물 소리, 엄마의 음성, 개구리 울음소리, 낙과처럼 떨어지는 종소리, 심지어 돌아가신 아버지의 음성까지 “어쩌다 쓰는 시에도 소리가 들어와 울음 짓는”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평생 소리의 형태를 관찰하며 살아온 연장선에서 “매순간 태어났다 사라지는 소음들”도 이재무는 소중하게 안아들이고 있다. 이 점, 이재무 시의 성과로서 읽는 이들에게 착착 안겨오는 것 같다.

“사실 바로 직전 시집 『슬픔은 어깨로 운다』에도 청각적 자질이 많이 나와요. 의도적으로 계획한 건 아니지요. 제 나이와 상관이 있는 것 같아요. 활동하는 시간이 많으면 시각이 중시되는 데 비해 나이가 들면 무의식적으로 청각으로 감각이 분산되는 것 같아요. 대체로 자본주의 삶의 양식이 시각 중심 아닙니까? 그리고 특히 남성들에게 약한 것이 청각이나 후각 같은 건데, 저도 그렇게 살아왔지요. 그러다가 저도 모르게 나이 들면서 감각의 변화를 가져온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런 감각의 변화도 이재무 시의 후기적 전환을 보여주는 중요한 차원이 아닐까 한다. 물론 우리는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점을 짚어야 한다. 일반 서정시와 이재무의 시를 가르는 분명하고도 중요한 차이점! 낮고 약한 존재자들을 향한 하염없는 관심과 위안의 목소리 말이다. 가령 「목련」이라는 작품을 읽어보자. “사회복지사가 다녀가고 겨우내 닫혀 있던 방문이 열리자 방 안 가득 고여 있던 냄새가 왈칵 쏟아져 나왔다 무연고 노인에게는 상주도 문상객도 없었다. 울타리 밖 소복한 여인 같은 목련이 조등을 내걸고 한 나흘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대상을 향한 세심한 관찰과 가없는 연민이 시를 관통하고 있다. 이제 이재무는 분노나 싸움이 아니라 연민에 가까운 정서로 신(神)이 버린 아프리카, 죄 없이 죽어간 인디언과 베트남 인민들, 우리 시대의 변방인 노숙인과 무연고 노인 등을 향한 시선을 꾸준히 견지해간다. 우리는 그의 시가 여전히 한 시대의 공공적 기억에 닻을 내리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시의 유전 형질이 아닐까 합니다. 저는 리얼리즘 풍토에서 시를 시작했고, 제가 등단한 매체도 『삶의 문학』이고, 그래서인지 삶을 향한 관심과 그 형상화 과정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어요. 이전에 비해 삶의 현장성은 좀 약해졌지만 저의 시 안에는 이웃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연대의식이 불가피하게 잠재되어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해요. 물론 이것도 의도적 산물은 아니고 다만 제 안의 유전적 형질로 이어져 온 것이겠지요. 시의 변화를 일정하게 꾀한다 하더라도 그 저변에는 이러한 지향이 끝내 따라다닐 거예요.”

 이번 시집에서 눈에 띄는 또 하나의 특성은 ‘멂’에 대한 감각이다. 이재무는 데스밸리에서 죽은 스스로를 품으면서 “시간의 먼 길”을 떠나고 있다. “안부가 그리운, 먼 곳의 사람”을 그리워하고, “먼 곳에 사는 정인에서 손 편지”를 쓰고, “저 멀리 돌아갈 집”을 아득하게 바라보기도 한다. 유목의 활달함을 유보하면서 사라짐을 응시하는 이러한 표현은 그가 일종의 형이상학적 존재론으로 이끌려갈 가능성을 짐작하게끔 해주는데, 과연 시인은 어떤 생각을 할까?

"시간성과 관계가 있는 것 같아요. 자꾸 나이 타령하는 게 민망하긴 합니다만 그것도 나이가 가져다주는 성찰의 과정이지요. 살아온 나이보다 살아갈 나이가 훨씬 적어져 과거를 돌아보는 시간이 많아졌잖아요? 또 그래서인지 미래에 가야 할 ‘진짜 나의 집’을 많이 생각합니다. 원시반본(原始返本)이라고 하나요? 물리적 거처가 아니라 시간 개념이 있는 ‘진짜 집’ 말이에요. 물론 그러한 미래의 거처에 대해서는 두려움을 안 가질 수 없겠지요. 여기서 멀다고 하는 것은 과거도 되고 미래도 되는데 양쪽을 다 돌아보는 시선의 표현이라고 생각해요. 지난날은 주로 당시 현장 같은 공간성을 돌아보았다면, 이제 시간성을 통한 형이상학적인 면을 가지게 된 것일지도 모르지요.”

 그러고 보니 이재무는 “60년째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가 초월적이고 환상적인 비현실의 세계로 비약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다만 죽음 너머 아버지로부터 저수지 얼었다는 전화를 받고, 죽기 전에 나무 열 그루를 심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데스밸리에서의 죽음 이후를 설계도 해야 하니, 우리는 그가 어떤 형이상학적 존재론으로 이끌려갈 가능성을 잠시 짐작해볼 뿐이다. 이처럼 이재무는 죽음을 통한 새로운 삶, 낮은 존재자들에 대한 발견과 연민, 시각에서 청각으로의 변화, 시간성에 대한 관심 등으로 이번 시집을 매무새 있게 구축하였다. 이재무 시의 중추는 간결한 서정, 타자를 향한 연대, 시대와 사회의 증언, 사랑의 열정이라고 생각되는데, 이번 시집 이후 펼쳐질 후기시의 세계가 더욱 두터워진 철학적 질문을 품어갈 것이라고 예상해본다. 그렇다면 정작 자신은 미래의 시가 어떻게 펼쳐질 예감 같은 것을 가지고 있을까?

“요즘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우연히 읽고 있어요. 이 책을 집어든 것도 나이 탓이 있지요. ‘우주 속의 나’라는 생각을 하던 터에 그 책에서 존재론이랄까 종교적 사유랄까 하는 것이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다는 것을 발견했어요. 또 벤야민과 니체의 책도 읽고 있는데 삶의 궁극적 허무 같은 것을 암시받곤 하지요.”

 원래 이재무는 우리 시단에서 다독가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그의 시에는 지식의 현시가 없다. 다만 이재무는 이러한 책의 섭렵을 통해 앞으로의 시세계가 시간에 대한 사유로 가지 않을까, 구체적인 삶의 현장보다는 ‘이후’의 세계나 우주론적 세계로 가지 않을까 하는 것을 고백할 뿐이다. 아마도 그러리라 생각해본다. 예단할 수는 없지만 시인 스스로 자연스러운 그러한 변화에 몸을 맡길 것이다. 그는 어쨌든 자신의 폭넓은 독서 경험을 시의 행간으로 스며들게 하는 육화의 시인이다.

“시의 본질은 경험과 정서의 육화 아닙니까? 누구나 독서 편력은 있겠지만 내 안에서 그것을 정서적으로 육화하여, 마치 국물 우려내듯이 표현하는 것이 좋은 것 같아요. 시에 불필요한 지식들이 범람하는 것은 육화가 덜 되었다는 뜻이지 않겠어요? 문학은 정보나 지식 전달의 언어가 아니라 정서를 매개로 하여 자신의 깨달음을 감염시키는 것이니까요.”


3. 돌올한 성실성과 지속성으로 이어온 시인으로서의 생애

 이번 시집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시를 한 편만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다.

“고민이 되는데, 「슬리퍼」라는 시 한번 읽어볼까요? “슬리퍼를 신을 때마다 슬리퍼처럼/편하고 만만했던 얼굴이 떠오른다/슬리퍼는 슬픈 신발이다/막 신고 다니다 아무렇게나 이곳 저곳에/벗어놓는 신발이다 언감생심 어디/먼 곳은커녕 크고 빛나는 자리에는/갈 수 없는 신발이다/기껏해야 집 안팎이나 돌아다니다/너덜너덜해지면 함부로 버려지는 신발이다/슬리퍼를 신을 때마다 안개꽃같이/누군가의 배경으로 살았던/오래된 우물 속처럼 눈 속 가득/수심이 고여있던 얼굴이 떠오른다” 읽으면 누구나 알겠지만 시의 대상은 돌아가신 어머니에요. 하지만 읽는 이들에 따라서는 연인일 수도 있고 어쨌든 누군가의 뒤에서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에 대한 헌시지요.”

 슬리퍼는 참 새롭다. 구두나 하이힐, 짚신이나 군화까지 우리는 다양한 신발을 시에서 보았는데 ‘슬리퍼’는 유독 낯설고 특이하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 시집에도 이런 시가 실려 있지 않은가. “신발장 속 다 해진 신발들 나란히 누워 있다//여름날 아침 제비가 처마 떠나 들판 쏘다니며//벌레 물어다 새끼들 주린 입에 물려주듯이//저 신발들 번갈아, 누추한 가장 신고//세상 바다에 나가//위태롭게 출렁, 출렁대면서//비린 양식 싣고 와 어린 자식들 허기진 배 채워주었다//밑창 닳고 축 나간,//옆구리 움푹 파인 줄 선명한,//두 귀 닫고 깜깜 적막에 든,//들여다볼 적마다 뭉클해지는 저것들//살붙이인 양 여태도 버리지 못하고 있다”(「폐선들」, 『슬픔에게 무릎을 꿇다』)

 여기 ‘폐선’으로 비유된 것은 시인이 애잔하게 바라보고 있는 ‘낡은 신발’들이다. 마치 박목월의 시 「가정(家庭)」을 환기시키는 생활의 무게와 그로 인한 삶의 비애가 ‘신발’이라는 상관물에 아득하게 실려있다. 시인은 다 해진 신발들을 누추한 가장이 세상 바다에 나가 “위태롭게 출렁, 출렁대면서//비린 양식 싣고 와 어린 자식들 허기진 배 채워”준 배로 비유한다. 밑창 닳고 축이 나가고 옆구리 파인 채로 적막에 든 형상으로 말이다. 이때 이재무는 뭉클해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살붙이처럼 애틋한 폐선들을 버리지 못한다. 깊은 슬픔을 통한, 하지만 어느새 그 슬픔을 넘어선 타자로의 확산 과정이 잘 다가온다. 시인은 “신발에 관한 시가 한 여덟 편 정도 돼요. 다른 시인들도 슬리퍼를 가지고 쓴 시는 별로 없을 거예요.”라고 말한다. 이제 이재무는 ‘신발’의 시인이기도 하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듯이, 인류는 ‘코로나19’ 사태로 계엄령 수준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렇듯 세계가 겪고 있는 재앙의 위기에 대해 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 있을까? 지난날 사회나 민족의 가치를 노래했던 때와는 차원이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이 아닌가?

“시보다는 시인이 할 수 있는 일로 바꾸어서 말해보지요, 시인은 매체 활동을 통해 사람들의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지요, ‘코로나19’의 숙주는 인간 그것도 인간의 이기심이나 과잉 욕망 아닙니까? 결과적으로 이는 신의 경고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경고를 인간이 제대로 수용하지 않으면 진화된 바이러스가 계속 나와서 위기를 확장해갈 거예요. 인간의 욕망을 발본적으로 성찰해야 하는 일이 시인에게 주어진 거지요. 전 세계가 다 공감하고 이러한 차원에서 이 사태에 대응했으면 좋겠습니다. 삶을 돌아보는 일에 시인들이 매진해야 할 것 같아요.”

 그가 강조한 것은 이른바 시의 예언자적인 기능일터이다. 이재무 시력 40년을 코앞에 두고 이번 시집이 이러한 세계로 나아가는 훌륭한 길목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 크다. 이재무는 그동안 기억과 유목, 서정과 구체성 사이를 가로질러 시의 정점에 도달했다. 그동안 펴낸 시집은 『섣달그믐』(청사, 1987), 『온다던 사람 오지 않고』(문학과지성사, 1990), 『벌초』(실천문학사, 1992), 『몸에 피는 꽃』(창작과비평사, 1996), 『시간의 그물』(문학동네, 1997), 『위대한 식사』(세계사, 2002), 『푸른 고집』(천년의시작, 2004), 『저녁 6시』 (창비, 2007), 『경쾌한 유랑』(문학과지성사, 2011), 『슬픔에게 무릎을 꿇다』(실천문학사, 2014), 『슬픔은 어깨로 운다』(천년의시작, 2017) 그리고 이번까지 모두 12권이다. 이는 퍽 균질적인 창작 여정으로서, 단연 그의 돌올한 성실성과 지속성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이재무 시인은 뚜렷한 인과론을 가진 일관된 서사적 시법(詩法)에 익숙하지 못하다. 시집 전체를 치밀한 구도로 짜는 것에도 별 관심이 없다. 그런가 하면 해체니 전복이니 위반이니 하는 이른바 반(反)동일성 흐름에 자신의 육체를 내맡기지도 않는다. 다만 그는 시 한 편 한 편을 그때그때의 경험적 구체성을 통해 쓰면서 자신의 깨달음과 발견 과정을 완성하는 쪽으로 시간을 축적해왔을 뿐이다. 앞으로도 이재무의 이러한 노력은 계속되어갈 것이다. 노자(老子)의 『도덕경』에 보면 ‘현소포박(見素抱樸)’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는 소박함을 드러내고 통나무의 질박함까지 품는다는 뜻이다. 이재무 시에 꽤 걸맞은 비유적 표현이 아닐까 한다. 이제 우리는 이번 시집 『데스밸리에서 죽다』가 이재무의 시를 한 차원 높은 존재 전환의 순간으로 이끌어갈 것으로 기대하면서, 독자 분들이 이 시집을 찾아 읽으면서 그 산뜻하고 처연한 감동에 함께하시길 희원해본다.

 

 

* 《쿨투라》 2020년 5월호(통권 7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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