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중문화의 결정적 사건들 5] 우리에게 AFKN은 무엇이었나?
[한국 대중문화의 결정적 사건들 5] 우리에게 AFKN은 무엇이었나?
  • 오광수(시인, 경향신문 부국장)
  • 승인 2020.05.26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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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년시절 AFKN(주한미군방송)에서 ‘야하고 폭력적인’ 할리우드 영화를 보면서 몸속에 영화 세포를 만들었습니다. 영어를 몰라 멋대로 상상했던 그 영화는 어른이 돼서 보니 브라이언 드 팔마, 존 카펜터, 마틴 스코세이지 같은 대가들이 만든 작품이었어요.”

 영화 <기생충>으로 아카데미 4관왕을 휩쓴 봉준호 감독이 지난 해 연말 LA비평가협회 감독상을 받은 뒤 밝힌 수상소감이다. 그는 영화를 보고 싶어도 어머니의 만류로 극장에 갈 수 없었지만 AFKN에서 방영하는 영화들을 주로 보면서 청소년기를 보냈다고 했다.

 젊은 세대들에게는 낯설겠지만 소위 진공관 ‘로터리식 TV’를 아는 중장년들에게 AFKN은 대한민국 안방극장의 황금 채널(2번)이었다. 한국에 주둔하는 미군들을 위한 방송인 AFKN(American Forces Korean Network)은 이이러니하게도 한국 대중문화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채널이다. 미국의 신식민지적 지배의 상징인 주한미군 주둔의 부산물인 방송 채널이 오늘날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4관왕을 차지하고, 신한류가 전 세계를 휩쓰는 데 일조했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역설일까?

 AFKN은 한·미행정협정(SOFA)에 따라 1957년 개국했다. 1961년 개국한 KBS보다 4년 앞섰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AFKN은 볼거리에 목말라하던 사람들에게 은밀하고, 불온한 방송이었다. 미국문화의 전파를 우려하는 시각도 있었지만 AFKN은 봉준호의 표현처럼 재미있고, 신기하고, 야하고, 폭력적인 볼거리가 넘쳐났다.

 애니메이션, 영화, 쇼오락 프로그램, 뉴스, 스포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볼거리로 ‘AFKN 키드’가 등장할 정도였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이주노나 양현석, 가수 박진영 등 90년대 춤꾼으로 이름을 날렸던 가수들은 AFKN을 통해 춤을 배웠다. TV채널 이래야 KBS, MBC, TBC(1980년 KBS로 통폐합) 정도였던 시절에 국내 방송에서는 키스신조차 제대로 보기 힘들었지만 상대적으로 검열이 느슨했던 AFKN은 못 보던 콘텐츠가 넘쳐났다.

 그 시절 AFKN을 보기 위해 영어공부를 했다는 중·고등학생들도 많았다. AFKN을 보면서 영어공부를 한 이들 중에는 현재 유명 영어강사도 많다. ‘토종 영어강사’인 이보영 소장은 부모님이 <Sesame Street> 등 유아 프로그램을 틀어줘서 자연스럽게 영어에 익숙해졌다고 고백했다. 영어공부방법론을 제사한 책 <AFKN 키드의 미국 들여다보기>를 냈던 유재용 MBC 기자도 <종합병원(General Hospital)>이나 <댈러스(Dallas)>등 미니시리즈와 NBA 농구중계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영어와 미국문화를 익힐 수 있었다고 밝혔다. 한때 대학영어 강좌나 영어학원 강좌에도AFKN 청취반이 있을 정도였다.

 한국의 종합채널은 전통적으로 AFKN의 편성표를 카피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선 아침 뉴스프로그램으로 <굿모닝 아메리카>, <투데이 , 얼리쇼> 등이 방송됐고, 뉴스매거진 형식의 <60분>, <48시간> 등도 방송됐다. 또 토크쇼의 대명사인 <오프라 윈프리쇼>나 <데이비드 레터맨 이브닝쇼>도 방송되어 토크쇼의 방법론을 제시했다.

 지금은 유명한 미국드라마를 실시간으로 볼 수 있지만 예전에는 AFKN이 거의 유일한 창구였다. 수십 년 역사를 가진 <종합병원>이나 <NYPD>, <ER>, <CSI> 등 TV용 시리즈들이 방영되어 인기를 얻기도 했다. ‘몰래 카메라’ 형식의 시청자 투고 홈비디오 프로그램이나 연예가 정보 프로그램, 퀴즈 프로그램도 매주 방송됐다.

 어린이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던 유아교육 프로그램 <세서미 스트리트>를 비롯하여 애니메이션 <마이티마우스>와 <미키마우스>도 미국의 아이들과 동시에 볼 수 있었다. 또 80년대 이후에는 워리어, 헐크 호건, 스네이크, 마초맨 등의 프로레슬러를 볼 수 있는 ‘WWF’와 덩크슛이 작렬하는 NBA 농구가 큰 인기를 얻었다. 드라마와 쇼 프로그램은 물론 최신 영화도 볼거리가 부족했던 우리에게는 큰 위안이었다.

 대중음악계에서 AFKN은 거의 절대적인 교과서였다. 주말 저녁마다 아메리칸 빌보드 차트 100위부터 1위까지 노래들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은 최신 팝의 저수지 같은 프로그램이었다. 또 <팝송 TOP10 쇼> 등에는 팝스타들이 나와서 라이브로 노래를 선보였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이주노나 박진영이 심취했던 <소울 트레인>은 힙합과 댄스의 교과서 같은 프로그램이었다.

 90년대 초 AFKN이 쓰던 채널 2번이 환수되고, 2001년부터 AFN-K로 명칭이 바뀌는 등 큰 변화를 겪으면서 주한미군방송은 우리 시야에서 멀어졌다. 전성기 시절에는 값싼 미국문화로 도배된 이 채널이 우리 국민들을 선동한다는 이유로 정부가 규제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은 정보의 자유로운 소통을 이유로 한국정부의 규제에 반대했다. 또 한국의 컬러TV 상륙을 앞당기기도 했다. 1977년 AFKN이 컬러방송을 시작하자 우리 정부는 고민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컬러TV를 개발해 수출까지 하고 있었지만 국내 컬러방송 개시는 계속 미루고 있었다. 그러다가 신군부 정권이 들어선 1980년 12월에 컬러 방송을 처음 시작했다.

 70년대와 80년대 압축성장의 배경에 미군들을 위한 방송이 우리에게 뜻하지 않은 ‘선물’이었음은 명약관화하다. 그 반대편에 맹목적인 아메리칸드림이나 지나친 친미주의를 양산하는 부작용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우리 대중문화는 일정 시간 동안 AFKN을 먹고 자란 것을 부인할 수 없다.

 

 

* 《쿨투라》 2020년 5월호(통권 7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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