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책 속의 산문] 에덴에서 무등까지
[새 책 속의 산문] 에덴에서 무등까지
  • 나희덕(시인)
  • 승인 2020.05.26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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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산문집 『저 불빛들을 기억해』 중에서

  에덴에서의 십 년

  내가 태어난 곳은 ‘에덴’이다. 평안도 용강 태생인 아버지와 전라도 전주 태생인 어머니가 만나 처음 정착한 곳은 충청도 논산이었다. 그곳에 ‘에덴원’이라는 보육원이 있었다. 그 울타리 안에서 자라난 나에게 유년은 에덴과 같은 시간이었다.

  신혼 시절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뒷동산에 올라 찍은 흑백사진을 본 적이 있다. 나지막한 구릉에 앉아서 아담과 이브처럼 수줍게 웃고 있는 젊은 부부. 두 사람 곁에는 얼룩 염소 한마리가 풀을 뜯고 있었다. 어머니가 보육원 총무로 일하던 그 시절, 아버지는 소일거리로 염소 몇 마리와 닭 몇십 마리를 키우고 텃밭을 일구었다. 아침마다 그 염소에서 짠 젖을 마시고 그 닭들이 낳은 따뜻한 날달걀을 깨먹으며 우리 남매들은 자랐다.

   ‘에덴’의 중심에는 커다란 놋쇠종이 매달려 있고, 백 명이 넘는 식구들은 그 종소리에 따라 모였다가 흩어지곤 했다. 지금도 그곳을 생각하면 백 개가 넘는 숟가락들이 동시에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그 왕성한 생명의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는 것이 내게 독특한 유토피아의 구조를 마련해준 것 같다. 나는 지금도 낯선 사람들 속에서 한 개의 점처럼 숨은 듯 일할 때 가장 편하고 충일한 느낌을 가진다. 이십 대에 여러 공동체들을 찾아 다니며 떠돌았던 것도 그 장엄한 숟가락 소리에 대한 귀소 본능이었으리라.

  어떤 점에서 그곳은 에덴과 정반대로 춥고 가난하고 해가 잘 들지 않는 세계였다. 가출, 도벽, 음주, 흡연, 싸움, 섹스 등을 또래보다 일찍 목격하거나 배울 수 있는 곳이었다. 아이들은 봄동이 올라오는 밭가에 앉아 본드를 불며 추위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마당에서 해가 질 때까지 흙투성이로 놀거나 난롯가에 둘러앉아 키득거리며 서로 이를 잡아주던 것도 그 울타리 안에서였다. 그러니 그곳을 ‘에덴’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다.

 

  서울이라는 곳

  이삿짐을 실은 트럭이 멈춘 곳은 비슷비슷한 개량 한옥들이 늘어선 종암동 좁은 골목이었다. 아버지가 서울로 올라와 구해놓은 방 두 칸짜리 전셋집에서 다섯 식구가 일 년 남짓 살았다. 낯선 친구들과 선생님, 흙으로부터의 절연, 속도에 대한 부적응, 집단생활에서 도시적 핵가족으로의 전환…… 논산에서 서울로 전학온 나에게는 이런 변화가 고통스러웠다. 혼자 걷다가 길을 자주 잃었던 것 말고는 이 무렵의 기억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어머니가 ‘애향원’이라는 보육원에 다시 취직이 되면서 면목동으로 이사를 하고 새로운 집단생활이 시작되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서울이지만 아차산 아래 자리잡은 애향원은 그런대로 제2의 에덴이 될 만했다. 뒷산에 지천으로 열린 개암과 산딸기가 우리의 것이었고, 개울가에서 세수하고 가재도 잡으며 남은 십 대를 보낼 수 있었다.

 

  길 위에서의 나날

  중·고등학교 육 년 동안 왕복 두 시간 이상 걸어서 통학을 했다. 워낙 마르고 허약한 몸에 무리를 해서인지 중학교 때부터 오른쪽 무릎에 신경염이 생겼다. 갑자기 다리가 아파오면 아무데나 걸터앉아 통증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여름에는 구멍가게 파라솔에 앉아 햇빛을 피했고, 겨울에는 공사판 아저씨들과 드럼통에 지핀 모닥불을 쬐며 얘기를 나누었다. 거리에서 나는 일찍부터 어른들의 친구였다.

   수시로 찾아드는 통증은 불편한 것이었지만, 그 덕분에 얻은 자유는 달콤했다. 신경염의 통증 때문에 정해진 등하교 시간에 맞추어 가지 않아도 되는 특권을 나는 수시로 남용했다. 지각과 조퇴가 잦아졌고, 친구들이 교실에 갇혀 있을 시간에 학교 주변의 과수원과 옹기터를 돌아다니며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아픈 다리를 일부러 혹사하듯 걸어다녔고, 그러다 참을 수 없이 아프면 바위에 앉아 이끼를 긁어대거나 개미집을 건드렸다.

  그런 자유마저 없었다면 나는 교실이라는 공간을 끝까지 견뎌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얼핏 내성적이고 온순해 보이는 아이였지만 내면에는 좀처럼 길들여지지 않는 고집 센 말한 마리가 자라고 있었다. 그렇게 생겨난 방황과 해찰의 습관은 꽤 오래 계속되었고 글 쓰는 일로 나를 조금씩 이끌었다.

  학교 일과 중에 가장 즐거웠던 시간은 종례가 끝나자마자 도서관으로 달려가 대출구 앞에 줄을 설 때였다. 그때만 해도 도서관의 책을 직접 열람할 수 없었다. 읽은 책을 반납하고 쪽지에 책 제목을 써서 내밀면, 전당포 물건처럼 책을 빌릴 수 있었다. 삼중당문고로 된《말테의 수기》를 읽으면서 말테가 된 듯 “나는 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고 중얼거리곤 했다. 맏딸이 작가가 되는 걸 원치 않았던 아버지에 대한 반감으로 교과서 밑에 시집과 소설책을 숨겨가며 읽었고, 밤이면 글 쓰는 일에 몰두했다.

  문예반에 들어갔다가 한두 달 만에 나오고 말았지만 선생님은 백일장에 나를 자주 내보냈다. 입상보다는 합법적인 결석을 할 수 있다는 이유로 나 또한 그 기회를 거절하지 않았다. 백일장에서 상을 자주 타는 것이 내게는 이상한 콤플렉스를 갖게 했는데, 제도화된 인준을 받는다는 사실 자체가 그만큼 규범에 들어맞는 글을 쓴다는 증거처럼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윤동주와 정현종, 그리고 숲길

  도서관 4층 참고열람실. 벽에는 윤동주 시인이 연희전문에 다니던 시절의 흑백사진이 확대되어 걸려 있었다. 그 액자 앞자리에 줄곧 앉아 책을 읽고 글을 썼다. 시인의 선량한 눈빛과 표정은 언제나 찾아갈 수 있는 보리수 그늘 같은 것이었다. 역사의식과 종교적 인식 사이에서, 그리고 현실적 실천과 문학적 실천 사이에서 혼란스러웠던 대학 시절. 윤동주라는 영혼의 부끄러움이 나의 부끄러움을 위로해주던 1980년대였다.

  그러나 나는 점점 윤동주로부터 물려받은 ‘맑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무균의 도덕적 염결성이 인간에게 과연 가능한 것일까 하는 회의가 찾아들었고, 비장한 순교 의식이 현실에서 얼마나 무력하게 무너져내리는지를 경험해야 했다. 마침내 ‘맑음’은 내면적 분열을 겪기 이전의 미숙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하루빨리 벗어나야 할 좁은 그릇처럼 여겨졌다. 그 불만과 불안의 힘으로 빛을 등지고 오래 걸었다.

  시창작 수업에서 정현종 선생님을 만난 일은 커다란 행운이었다. 선생님은 시를 쓰는 기술을 가르치기보다는 시인으로 존재하는 방식을 몸소 보여주셨다. 시인의 눈빛과 웃음, 한숨까지도 우리에게는 살아 있는 교과서였다. 하지만 용기가 없어서 개별적으로 선생님을 찾아가 시를 보여드리거나 대화를 나눌 기회는 거의 없었다. 선생님의 표현에 따르면, 당시 나는 시인보다는 좋은 교사가 될 수 있는 자질을 가진 모범생처럼 보였다고 한다. 어쩌면 그 인상을 뒤집기 위해 끈질기게 시를 썼는지도 모른다.

  모교 뒷산에는 한 사람이 겨우 걸을 정도로 좁은 오솔길이 있었다. 대학 시절 그 숲길은 나에게 강의실 못지않은 배움터이자 안식처였다. 마른 가지를 뚫고 나오던 연초록 잎들, 봉원사 근처에서 듣던 저녁 종소리, 어린 짐승처럼 바위에 앉아 바라보던 밤하늘, 마른 낙엽 위에 누워 구름을 바라보던 가을날 오후……. 그 숲의 장면들이 지금도 내 몸속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물론 숲이 아름답고 안온한 휴식만 준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이파리를 모두 잃고 겨울을 나는 나무들이 있었고, 흙에 나뒹굴며 싸우는 목숨들이 있었고, 서로 먹고 먹히는 생존의 사슬들이 뒤얽혀 있었다. 피 흘리고 있는 세상의 축도(縮圖)를, 또는 내면에서 일어나는 싸움의 풍경을 그 숲에서 읽기도 했다.

  오솔길을 따라 안산 자락을 헤매고 다니면서 나의 눈과 발은 조금씩 시인의 그것에 가까워져갔다. 2학년 시창작론 수업에 제출한 시 〈뿌리에게〉가 그 숲길에서 얻어졌고 그것이 등단작이 되었으니, 결국 그 숲길이 나를 시인으로 만든 셈이다.

   정현종 선생님과 오솔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적도 몇 번 있다. 그때마다 우리는 눈인사만 빙그레 나누고는 두 마리 개미처럼 각자의 길을 걸어갔다. 은밀한 충전의 시간을 서로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스승에게도 그 숲길은 직장 생활을 견디게 해준 공간이었던 모양이다.

   첫 투고와 첫 시집

  대학을 졸업할 무렵 노트에는 시집 한 권 분량의 시들이 있었지만, 그것을 투고해 시인이 될 생각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 수원에 있는 창현고등학교 교사가 되어 혼자 자취방에 앉아 시를 쓰다 보니 등단의 필요성이 느껴졌다. 첫 투고지는 《창작과비평》이었는데 얼마 후 짧은 편지가 도착했다. 내 원고를 관심 있게 보았으나 등단을 하기에는 좀더 보완이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몇 달 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투고해 덜컥 시인이 되어버렸다. 등단한 지 일 년쯤 지났을 무렵 창비에서 시집 원고를 한번 보자는 연락이 왔다. 첫 투고에 떨어진 것이 첫 시집의 출간을 비롯해 창비와의 긴 인연을 만들어 준 셈이다.

  1989년 여름, 신춘문예 심사위원이었던 조태일 시인을 아현동 《시인》사 사무실에서 처음 만났다. 덜덜거리며 돌아가는 선풍기 앞에 러닝셔츠 차림으로 앉아 있던 선생은 남방을 걸쳐 입고는 무작정 나를 데리고 길을 건넜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민족문학작가회의 사무실이었고, 선생은 내게 입회원서를 내밀었다. 작가회의에서 만난 문단의 선배들과 ‘시힘’ 동인들은 피붙이 이상의 정을 베풀어주었고, 아현동과 마포 부근에서 자주 술잔을 기울였다. 이따금 마포 강변에 둘러앉아 밤새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종합병원 중환자 보호자실

  삼십 대에는 몇 번의 여름과 겨울을 종합병원 중환자 보호자실에서 보냈다. 삶을 병동에 비유한 시인이 여럿 있지만, 내가 삶과 죽음에 대한 체감을 확실히 갖게 된 것도 종합병원이라는 공간에서였다. 아침저녁 면회시간 외에는 언제 환자의 이름이 호명될지 모르는 불안을 안고 기다려야 하는 중환자 보호자 대기실. 질병과 죽음이 일상처럼 반복되는 그 공간에서 내 귀는 고통에 점점 민감해졌다. 〈이 복도에서는〉이라는 시에서 스스로를 ‘울음의 감별사’라고 불렀던 것처럼.

  보호자 대기실조차 꽉 차서 들어갈 수 없는 날에는 복도 의자에 누워서 밤새 뒤척여야 했다. 그렇게 딱딱한 복도 의자 위에서의 불편한 잠 같은 것이 나의 삼십 대였다. 인생이라는 복도에서 나에게 늘 맡겨진 역할이 환자가 아니라 보호자였다는 사실이 때로 고통스러웠다. 차라리 내가 아프면 비명이라도 지를 텐데, 긴장과 균형을 한시도 놓을 수 없는 보호자로서 가족들의 병수발을 하며 끝도 없는 빚을 감당해야 했다. 고통에 있어서도 나는 늘 조연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두운 허공에 드러난 뿌리처럼 갈증과 불안에 허덕이던 그 나날들이 시인으로서는 가장 파닥거리며 살아 있었던 시기였던 것 같다. 완전히 고갈된 존재의 뿌리를 다시 어디에든 옮겨 심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대학을 졸업한 지 십 년 만에 대학원에 진학했다. 빚더미에 앉아 입학금조차 없는 상황에서 내린 결단이었지만, 때마침 복간된 대학 잡지 《진리자유》의 기자로 일하면서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뒤늦은 공부는 새로운 토양에 나를 착근시켜 주었다. ‘오늘도 나는 노아 방주 속으로 들어간다.’ 교문에 들어설 때마다 이렇게 중얼거리곤 했다.

 

  너덜겅이 보이는 날

  꿈을 꾸었다. 끊어질 듯 좁은 길을 끝없이 걸어가던 내 앞에 갑자기 커다란 강물이 펼쳐졌다. 그런데 수영을 전혀 하지 못하는 내가 꿈속에서는 첨벙, 물에 뛰어들어 한없이 자유롭게 유영하는 게 아닌가. 다시 물에서 나와 어느 산 중턱에 이르렀는데, 저녁 무렵이라 저 아랫마을에 불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가까운 듯 멀게 느껴지는 마을을 보며 그리로 내려갈까 말까 망설이다 잠에서 깨어났다.

   얼마 후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 자리를 얻어 광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생면부지의 도시와 학교였지만, 동료들의 배려와 자유로운 분위기 덕분에 정착하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내가 사는 마을이 무등산 아래 있어서 아침저녁으로 무등산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도 적지 않은 힘이 되어주었다.

  그러다가도 불현듯 모든 게 낯설고 혼자라는 생각이 밀려올 때가 있다. 어느 가을 저녁, 퇴근하려고 차에 시동을 거는데 갑자기 가슴이 뻐근하게 아파왔다. 신체적인 통증은 아니었다. 눈을 들어보니 하늘이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마치 누군가 아주 예리한 칼날로 내 가슴을 죽 그은 것처럼.

  나는 집으로 가지 않고 노을이 잘 보이는 언덕에 차를 세웠다. 그러고는 이렇다 할 슬픔도 없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 울음의 끝은 아주 멀리 있어서, 열 살 때 처음 보았던 노을에까지 흘러가는 것 같았다. 아니, 길을 잃어버린 열 살의 내가 이 까마득한 시간까지 따라와 함께 울고 있었다.

  무등산 비탈에는 군데군데 붉은 돌무더기들이 흩어져 있다. 그것을 여기 사람들은 ‘너덜겅’이라고 부른다. 이 말에서는 왠지 마음이 덜겅덜겅 하는 소리가 나는 것 같다. 너덜겅에는 나무가 자라지 않기 때문에 멀리서는 그 부분이 커다란 화상(火傷) 처럼 보인다. 비가 오는 날이면 너덜겅이 더 붉고 선명하게 보인다. 거기서 나는 광주의 상처를 읽어냈고, 때로는 내가 이끌고 온 상처들이 덧나기도 한다. 그런 날 오랜 친구처럼 시가 나를 찾아온다.

 

 

* 《쿨투라》 2020년 5월호(통권 7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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