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ICON 주지훈 배우] 주지훈, 스크린에 피어난 ‘검은 꽃’
[2018 ICON 주지훈 배우] 주지훈, 스크린에 피어난 ‘검은 꽃’
  • 김시균(매일경제 문화부 기자)
  • 승인 2018.12.27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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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박스

 모델 출신 배우 주지훈(36)의 연기 여정은 초입부터 꽤나 탄탄대로였던 것 같다. 그 자신 스물 네 살이던 12년 전. 연기 경험 없이 도전한 첫 드라마 <궁>(2006)에서 그는 황태자 이신으로 분해 단숨에 멜로계 청춘스타로 비상한다. 이듬해 <마왕>(2007)에선 이중인격자 오승호를 호연해 진일보한 연기력을 인정 받으며, 영화 데뷔작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2008)에선 게이와 오묘한 감정선이 흐르는 앤티크 사장을, <키친>(2009)에선 한 여인을 사랑한 자유 영혼을 선보였다. 게다가 희대의 카사노바 돈주앙 역으로 뮤지컬(<돈 주앙>(2009))까지 도전했으니, 그 또래엔 가히 전천후 배우라 할 만했다.

 그러나 이른 성공은 자칫 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주지훈의 데뷔 초기가 그러했다. 2009년 5월, 그는 마약 투약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다. 세간을 떠들썩케한 이 사건은 잘 나가던 신인에겐 거의 사망선고나 다름없었다. 실제로 일부 지상파 방송으로부터 그는 출연금지 처분을 받으며, 이듬해 2월 군입대한다. 그러다 3년 후 예상보다 빨리 스크린에 복귀하는데, 그게 <나는 왕이로소이다>(2012)였다. 이후 <좋은 친구들>(2014) <간신>(2015) 등 제 나름 흥미로운 소재들에 도전했으나, 번번이 흥행 맛은 보지 못한다.

 거칠게 소묘한 그의 일대기를 복기하노라면, 그의 연기 여로의 분기점이 데뷔 10년차 만에 나온 <아수라>(2016)라는 데 대체로 이견이 없을 것이다(끼워 맞춘 것이지만 말콤 글래드웰의 『1만 시간의 법칙)은 10년이 기준이다) 잘 알려진 바, 올해 <공작>(2018)과 <암수살인>(2018)에 그가 출연할 수 있었던 것도 <아수라>에서의 호연에 힘입은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아수라> 이전의 주지훈과 <아수라> 이후의 주지훈으로 나뉜다. 개인적으로 그의 매력이 만개했다고 보는 건 <아수라>와 <암수살인>(아쉽게도 <공작>과 <신과 함께>에서는 앞선 영화보다 그의 매력을 크게 느끼진 못했다)이므로, 지금부터 얘기할 건 이 두 편의 주지훈이다.

 주지훈의 이미지는 그 자체로 기이한 무드를 자아낸다. 187cm의 마른 장신에 가늘고 긴 팔다리, 쌍꺼풀 없는 짝눈, 굴곡 없이 매끈한 코, 특유의 무심하고도 심드렁한 표정. 그런 그가 은막의 스크린 속을 휘적거릴 때면 이상하리만치 눈길이 간다. 여기서 방점은 ‘이상하리만치’인데, 이것은 비단 그의 이미지에서만 기인하는 효과가 아니다. 핵심은 그 이미지에 어떤 캐릭터가 덧입혀졌느냐에 있어서다. 실제로 드라마 <궁>(2006)과 영화 <키친>(2009) <결혼전야>(2013) 류의 로맨스물에서 보여준 그의 연기는 그리 특출하다고 보긴 힘들었다.

 그는 외려 풋풋한 사랑꾼이나 윤리·도덕적 인물이 아닌 그 반대에 가까울수록 더 빛이 났다. 그것이 처음 감지된 게 드라마 <마왕>(2007)의 이중인격자였다. 그리고 8년여 세월이 흘러 영화 <간신>(2015)에서 분한 미치광이 간신은 주지훈만을 놓고 본다면 앞서의 예감을 거의 확신으로 굳게 해준다. 실체가 불분명한 아지랑이처럼 선악의 경계에서 넘실대는 그는 이전의 그와는 판이하다. 밝고 명랑한 성격의 평면적인 캐릭터보단 모호성으로 점철된 입체적 인물이 그는 유독 잘 어울렸다.

 <간신>의 차기작인 <아수라>에서 그는 더 나아갔다. 극 중에 그가 분한 형사 문선모는 처음부터 그 심중을 쉽게 헤아리기 어렵다. 배경은 부패와 폭력의 난장이라 할 피의 도시 안남. 이 썩은 내 나는 폐쇄회로에서 그는 선배 형사 한도경(정우성)과 예정에 없던 살인 사건에 휘말린다. 이를 덮으며 한도경이 부패 시장 박성배(황정민) 밑으로 들어가자 그 또한 그의 뒤를 좇아 박성배의 ‘개’가 된다. 하지만 막역하던 두 남자의 관계는 이후부터 점차로 붕괴하는데, 이는 대략 한도경이 박성배의 비리와 범죄 증거를 캐려는 검사 김차인(곽도원)에게 이용당하는 처지로 전락하면서다. 한도경과 달리 문선모는 끝까지 박성배의 충직한 개를 자처하므로, 자연히 둘의 관계는 삐걱거린다.

 문선모가 ‘악’에 채색될수록 그의 얼굴은 ‘불투명’의 냉기로 스멀거린다. 박성배에 반기를 든 조폭 태병조(김해곤)를 차로 치어 죽이고, 마약 밀매 사실이 탄로난 은충호(김종수) 역시 그에 의해 달리는 차 밖으로 밀려나 살해된다. 그렇게 그의 악행은 더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줄달음한다. 한도경이 박성배와 김차인 사이에서 괴로워하며 제 불안과 분노를 점점 육체 바깥으로 분출해 갈 때, 문선모는 그 반대에 가까워진다. 살인의 순간 내적 두려움과 흔들림이 잠시 감지되지만, 그때뿐이다. 그의 심중을 바라보는 우리는 갈수록 건조해지는 그의 낯빛과 함께 새벽녘 안갯속에 갇힌 듯한 느낌을 전해 받는다.

 그런데 극의 막바지에 이르면 이 모두 전복된다. 배경은 죽은 은충호의 장례식장 내 비좁은 복도. 한도경을 향해 총구를 겨눈 그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무너진다. “너는 나를 쏠 수 없다고, 쏴 볼 테면 쏴 보라”고 겁박하는 형을 그는 차마 쏘지 못한다. 되레 주저앉아 흐느끼는 것이다.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며. “이게 다 씨발, 형 때문이야, 알어?” 자포자기한 그는 형의 손을 빌려 결국 자멸(오발이었지만 내게는 이것이 자멸로 다가왔다)한다. 점점 냉혈한에 가까워가던 그가 한순간 무너지는 이 신은 적잖은 울림을 안긴다.

 <암수살인>은 그 불투명성을 극단으로 밀어붙인 경우다. 영화는 형사 김형민(김윤석)과 연쇄살인마 강태오(주지훈)를 축으로 전개된다. 자신이 일곱 번의 살인을 저질렀음을 제 입으로 실토한 살인마와 그 증거를 채굴하기 위한 형사 사이 팽팽한 심리적 줄다리기가 이어진다. 극 중에 눈여겨보게 되는 건 상극을 이루는 두 캐릭터 면면이다. 피해자를 애도하는 선인으로서 자신의 내적 동기가 분명한 김형민에 반해 강태오의 내면은 시종 흑막으로 둘러쳐져 있다. 도무지 계측하기 힘든 그의 심중은 아수라의 ‘문선모’처럼 일말의 ‘흔들림’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악인이다. 그는 시종일관 이해와 판단의 교란자임을 자임한다.

 강태오야말로 한국 영화계에 길이 남을 악인 중 하나일 것이다. 건조한 눈자위로 이글대는 광기, 예고 없이 분출되는 파괴적 언동, 상대를 농락하는 재간과 능청의 제스처. 이 모든 게 길고 가는 그의 신체와 서늘한 무표정과 한데 뒤섞이는 그 순간, 우리는 괴인에 가까운 그의 존재감에 압도된다. 그러니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주지훈은 선과 악의 경계에서 후자에 가까워갈수록 저만의 독보성을 선취한다고, 그 악의 심연이 불투명한 회색빛에 물들어 갈수록, 그의 진가는 발휘된다고.

 아마도 그럴 것이다. 십여 년 전 <마왕>이 뿌린 씨는 <간신>에서 싹을 틔워, <아수라>에서 꽃망울을 맺은 다음 <암수살인>으로 마침내 만개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주지훈이라는 ‘검은 꽃’이 지금 우리 곁에 활짝 펴 있다. 물론 이것이 그의 연기의 정점이라 단정하긴 이를 것이다. 그가 보여줄 연기적 지평의 끝자락이 어디인지는 그 자신이 증명해 보일 문제이므로.

김시균
매일경제 문화부에서 영화와 클래식을 담당. 영화가 우리 삶을 구원해줄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 《쿨투라》 2018년 12월호(통권 54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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