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ie] 시대정신과 정체성의 모색
[movie] 시대정신과 정체성의 모색
  • 김종원(영화평론가, 영화사 연구자)
  • 승인 2020.05.27 12:3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고전이 될 만한 10편의 영화

 1세기의 시점에서 시대를 뛰어넘어 가치를 인정 받고 후대에 전범으로 남을만한 20세기의 한국영화를 고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보는 이의 취향과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결과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한계를 전제로, 첫째 당대의 대중 의식과 시대정신이 잘 반영된 작품, 둘째 장르적 예술적 완성도가 높은 작품, 셋째 소재나 형식면에서 새로운 경향을 보여준 작품, 이상 세 가지 기준 아래 미래의 고전이 될 수 있는 작품을 고르기로 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일찍이 신문, 잡지와 증언 등 기록을 통해 ‘명화’로 꼽혀왔으나 보존되지 않아 검증할 기회를 갖지 못한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필름이 없다는 이유로 대상에서 제외시킬 것인가, 고심 끝에 영화사적 맥락에서 그 가치를 인정하고 이런 작품들도 선정대상에 포함하기로 하였다 .

 그 결과 <아리랑>(1926), <임자 없는 나룻배>(1932) 등 무성영화시대 작품 2편을 포함하여 <마음의 고향>(1949), <피아골>(1955) 등 해방 후 6·25전쟁 시기의 작품 2편, <하녀>(1960), <오발탄>(1961), <장군의 수염>(1968) 등 60년대의 작품 3편, <바보들의 행진>(1975), <깊고 푸른 밤>(1984), <서편제>(1993) 등 1970년대부터 1990년대 사이의 작품 각 1편씩 3편이 선정되었다.

 이 결과는 1923년 조선총독부 체신국이 만든 저축계몽영화 <월하의 맹세> 이후 1990년대 말까지 76년 동안 제작된 영화가 총 4천8백50여 편인 점을 감안할 때 아주 적은 편수라 할 수 있다. 1960년대의 영화가 3편이나 들어가게 된 데는 한국영화 사상 질적 양적으로 가장 융성했던 시점과 관계가 있다. 1960년(87편)과 61년(79편)을 제외하면 최하 112편에서 최고 229편까지 제작돼 모두 1천505편이 나온 시기였다.

 무성영화시대의 <아리랑>과 <임자 없는 나룻배>

 나운규 각본, 감독, 주연의 <아리랑>과 이규환 감독의 <임자 없는 나룻배>는 일제강점기 아래서 만든 159편 가운데 빼어놓을 수 없는 정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두 작품이 뛰어남은 상영 후의 평가뿐만 아니라 1938년 조선일보사가 부민관에서 처음 영화제를 개최(11월 26일~28일)하며 독자들을 대상으로 뽑은 무성영화 베스트 텐 가운데 <아리랑>(4,974표)과 <임자 없는 나룻배>(3,783)가 각기 1, 2위를 차지한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개봉당시 포빙(抱氷 : 본명 고한승)은 <아리랑>에 대해 ‘대체로 보아 이 일편은 별로 흠잡을 곳이 없는 가작’(매일신보, 1926년 10월 10일)이라 했고, 김을한(金乙漢)은 ‘<아리랑>의 사막 장면은 전 조선 영화를 통하여 가장 우수한 것’(동아일보, 1926년 10월 7일)이라고 평가했다.

 나운규와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이경손은 “구극조(舊劇調)를 탈피한 흑백 무성영화시대의 획기적인 작품으로 마치 어느 의열단원이 서울 한 구석에 폭탄을 던진 듯한 설렘을 느끼게 했다.” (「무성영화시대의 자전」, 《신동아》, 1964년 12월호)고 했으며, 김유영(「명배우 명감독이 모여 조선영화를 말함」, 《삼천리》, 1936년 11월호)과 심훈(「조선 영화인 언퍼레이드」, 《동광》, 1931년 7월호) 역시 ‘관중의 가슴에 폭풍우와 같은 고동(鼓動)과 감명을 준 명작’ ‘<아리랑>은 명편(名篇)’이라고 과찬했다. <임자 없는 나룻배>를 만든 이규환 또한 <아리랑>은 “민족의 저항을 담은 그 내용과 함께 당시로선 생각하기 어려운 영화적 기법을 구사하여 관객들을 사로잡았다.”(「영화 60년 /태동기」 중앙일보, 1979, 12, 22)고 회고했다.

 서울에서 공부하다가 분명치 않은 이유로 실성하여 농촌에 돌아온 후 마을 사람들의 놀림감이 된 영진(나운규)은 누이동생(신일선)을 괴롭히는 지주의 앞잡이(주인규)를 보다 못해 죽이게 된다는 게 영화의 내용이지만, 단순히 줄거리를 화면에 옮기는 역할로 만족했던 당시의 한국 영화 수준으로 볼 때 <아리랑>은 파격적인 작품이었다. 조선인 고유의 감정과 사상, 생활의 진솔한 면을 정확히 파악했다는 것이다. 이 영화에는 다른 데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유의 기법이 있었다. 곧 비유와 암시, 상징의 몽타주가 그것이다.

 첫째, 비유의 예로 ‘개와 고양이’를 내세운 자막을 들 수 있다. 서로 앙숙인 영진과 지주의 앞잡이 오기호를 대립 관계로 만듦으로써, 지배자인 일본 제국주의와 피지배자인 한민족을 상기시키고 있다. 둘째는 미친 영진으로 하여금 물을 요구하는 독백의 암시이다. 주인공은 누구에게인지 물을 달라고 호소하는가 하면, “진시황도 죽었다지.” 하고 중얼거린다. 여기에는 갈증을 호소하는 주인공을 통해 빼앗긴 나라의 비애와 독립에 대한 열망을 시사하고 일제의 패망을 암시하는 뜻이 담겨 있다. 셋째는 두 남녀 영희와 현구를 대치시킨 상징적인 사막 장면의 몽타주라고 할 수 있다. 그가 험상궂은 아라비아 상인을 등장시킨 사막과 물은 1920년대 우리나라 현실의 함축적인 반영으로 해석되었다. <아리랑>을 미래의 고전으로 내세울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이에 버금하는 작품이 이규환 감독의 <임자 없는 나룻배>(1932)이다. 1930년대 최대 수확인 이 영화는 가뭄과 수해로 흉년을 만나 살 길이 막연해지자 임신한 아내(김연실 분)와 함께 서울로 올라와 겪는 젊은 농부(춘삼/ 나운규)의 수난기이다. 이 영화는 정상적인 검열절차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상영 당시 곤욕을 치렀다. 상영 직전 조선총독부 경무국 활동사진검열계로 불려간 이규환은 <임자 없는 나룻배>라는 제목이 조선민족을 암시하고 주인공이 철로를 때려 부수는 후반부 장면이 항일적 표현이라는 이유였다. 결국 마지막 부분 1백50여자가 다시 잘려 나간 뒤에야 빛을 볼 수 있었다 .

 사실주의적 기법에 따른 향토적 서정미로 주목을 받은 이 영화에 대해 허심은 “조선 영화계에서 일찍 보지 못했던 새로운 감독과 명쾌한 촬영으로 이때까지 나온 조선 영화의 패권을 잡을 만하다.”고 하였다. 아울러 “나운규가 주연하는 춘삼이란 한 개 농부 노동자의 슬픈 이야기를 우리는 한 개인의 이야기로 보지 말고 조선 민족의 이야기로 봐야 한다.”(「유신 키네마 2회작 ‘임자 없는 나룻배’ 시사평」 1932년 9월 14일)고 강조하였다. <유랑>(1928)과 <화륜>(1931) 등을 연출한 김유영(金幽影)도 ‘과거에 나온 작품 중에서 제일 뛰어난 좋은 작품’이라며 “이규환 군의 감독술은 재래의 나운규씨의 모션을 어느 정도까지 없애버렸으며 촬영(손용진, 이명우)에 있어서도 특출한 재주를 발휘했다.”(조선영화평 ‘임자 없는 나룻배’ 조선일보, 1932년 10월 6일)고 언급했다.

 “‘임자 없는 나룻배’! 여러 가지 조선 영화중에 가장 시적(詩的) 표현인 제목이다. 이 작품을 가리켜 조선의 현실을 잘 표현한 온건한 작품이라고 하고 싶다. 그래도 이만큼 현실의 일면을 잘 표현해준 것은 감독자 이규환 군의 공이다. 그리고 전편을 통하여 감독술에 있어서 청신(淸新)하면서도 무게가 있다.”

 이것은 《매일신보》(‘임자 없는 나룻배’-시사를 보고-1932년 12월14일~15일)에 실린 송악산인(松岳山人)의 평이다. 이 같은 공통적인 호평에 비추어 <임자 없는 나룻배> 또한 고전의 여건을 갖춘 작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해방 후 6·25전쟁 시기의 <마음의 고향>과 <피아골>

 윤용규 감독의 <마음의 고향>은 절에 버려진 열세살 소년의 애절한 사모곡이다. 주지스님(변기종)의 보살핌 아래 성장한 ‘까까중’ 도성(유민 분)은 어린 자식을 잃고 공양을 드리러 온 젊은 미망인(최은희)의 눈에 들었으나 친어머니(김선영)가 뒤늦게 찾아 왔었다는 사실을 알고 절을 떠난다는 내용이다. 이영화의 원작은 함세덕 희곡 「동승(童僧)」이다.

 새벽안개 속에서 범종을 치는 어린 스님의 일상생활로 시작되어 안개가 걷히는 절에서 나온 도성이 범종 소리를 들으며 산을 내려가는 부감의 시퀀스로 마무리되는 <마음의 고향>은 ‘침체부진하던 조선영화계를 찬란히 장식해 준 해방 후 최고봉에 오른 수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 영화는 모두 10개의 시퀀스로 구성되어 있다. 어린 스님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새털 부채와 살생, 염주라는 피사체에 의해 주요 모티브로 투영된다. 전반적으로 차분한 극의 운영과 캐릭터의 표출에도 무리가 없었다. 미망인이 나타나면서 세속의 유혹을 받게 된 철부지 도념과 주지 스님의 관계는 이로 인해 경직된다. 이런 가운데 도념은 어머니를 찾는 길을 선택한다. 극의 전개 있어 도성 모의 부자연스런 등장 등 결함이 없지 않지만, <마음의 고향>은 서정적 리얼리즘으로 승화된 해방 후 최초의 문예영화로서 오래 기억될 만한 가치가 있다.

 이강천 감독의 <피아골>(1955)은 반공이 최대 가치였던 냉전시대의 부산물이다. 미국영화의 특징이 서부극에 있다면, 반공영화는 한국에만 존재한 특수 장르라고 할 수 있다. 반공영화는 1949년 홍개명 감독의 <전우>와 한형모 감독의 <성벽을 뚫고> 이후 정부의 영화정책에 힘입어 1980년대 초까지 기형적으로 양산되었다. 문제는 대부분의 내용이 일당백(一當百) 정신을 강조하다보니 국군과 인민군을 선악 이분법에 맞추게 돼 리얼리티를 상실했다는 데에 있다.

 그런 가운데 <피아골>은 균형감을 유지하려는 감독의 고심이 엿보이는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이 영화는 지리산에서 활동하는 인민군 유격대 대장 ‘아가리’(이예춘)와 그 지휘 하의 게릴라인 철수(김진규), 그리고 당성이 높은 냉철한 여자대원 애란(노경희)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당성이 높은 여자대원 애란과는 달리 철수(김진규)는 흘러가는 구름에도 반응하는 인텔리이다. 토벌대에 밀리는 극한상황 속에서 전의를 잃은 대원들이 죽어가는 가운데 철수는 애란과 함께 산을 내려간다.

 이 영화는 제작 당시 용공영화라는 비판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빨치산들의 산 생활을 통해서 인간본연의 존엄성을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나 공산주의라는 이즘에 대해서는 아무런 적극적 비판이 없고, 빨치산 전원이 죽어가는 순간까지도 끝끝내 공산주의를 부정하지 않는 등 ‘적색 빨치산을 영웅화하는 맹점’을 내포했다.”(김종문, 「국산 반공 영화의 맹점」, 한국일보, 1955년 7월 24일)는 이유였다. 결국 이 영화는 일반 사회인에 미치는 영향이 우려된다는 관계당국의 견해에 따라 6개 장면이 삭제되고, 마지막 사막 장면에 펄럭이는 태극기를 추가한 후에야 개봉할 수 있었다.

 이 영화가 평가되어야 할 이유는 당초 의도와는 달리 결말이 변질될 만큼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았던 전후 분단시대의 산물이라는 점에 있다.

 영화 전성기의 수작 <하녀>와 <오발탄>, <장군의 수염>

 <하녀>(1960)는 그동안 김기영 감독이 <초설>(1958), <십대의 반항> (1959), <슬픈 목가>(1960) 등에서 추구해 온 사실주의를 지양하고 표현주의 계열의 그로데스크한 사디즘 영화로 전환한 출발점이다. 이 영화를 계기로 그의 시선은 사회 밑바닥에서 가정으로 옮아가고, 인간의 심성을 선악적으로 파악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 연장선상에 <현해탄은 알고 있다>(1961)와 <고려장>(1963), <화녀>(1971), <충녀><1972) 등이 있다.

 그중에도 <하녀>는 특히 인간의 내면에 잠재하는 마성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방직공장 여직공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동식(김진규)은 새 집을 짓기 위해 무리하게 재봉 일을 하다가 몸이 쇄약해진 아내(주증녀)를 위해 하녀(이은심)를 들인다. 그는 아내가 친정에 간 사이 하녀의 유혹에 빠져 몸을 섞게 되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내는 하녀를 설득하여 계단에서 굴러 낙태하게 만든다. 앙심을 품은 하녀는 그들의 어린 아들(안성기)을 계단에서 떨어져 죽게 만들고도 모든 사실을 외부에 알리겠다고 협박한다. 이에 굴복하여 아내는 남편과의 관계를 묵인한다. 이런 상황에 괴로워하며 하녀와 동반자살을 기도한 남편은 하녀를 뿌리치고 아내의 곁으로 돌아와 숨을 거둔다.

 실화를 모티브로, 신문 기사를 읽는 남주인공의 모습을 영화의 시작과 끝에 설정하여 액자 형식을 취한 <하녀>는 소녀가 마비된 다리를 끌며 불안하게 낡은 2층 계단을 오르내리게 하거나, 쥐를 잡아 꼬리를 흔들던 하녀가 주인집 아들에게 쥐약을 먹여 살해하는 등 특유의 기괴한 장면을 선보인다 .

 <오발탄>(1961)은 한국영화의 리얼리즘을 상징하는 유현목의 대표작이다. 북한 실향민의 고통과 시련을 통해 분단의 비애를 그린 이 영화는 일제 지배 아래서 미치광이 청년과 나룻배 사공을 통해 핍박받는 한민족의 울분을 우회적으로 표출한 <아리랑>, <임자 없는 나룻배>의 시대정신과 맥이 닿아있다.

 피난민들이 모인 해방촌에 사는 계리사사무소 직원 송철호(김진규)에게는 돌봐야 할 여섯 식구가 있다. 정신이상인 어머니(노재신)와 만삭인 아내(문정숙), 상이군인인 동생 영호(최무룡), 양공주가 된 여동생(서애자), 학업을 포기한 채 신문팔이에 나선 막내 동생, 그리고 어린 딸 혜옥이 바로 그들이다. 박봉과 치통으로 시달리던 가장의 아내는 해산하다가 죽고, 일확천금을 노린 동생은 은행 강도짓을 하다가 붙잡히는 국면에 처한다. 철호는 썩은 이를 뽑고 아내 대신 새로운 생명체를 얻게 되지만 방황과 좌절의 국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처럼 유현목의 현실인식은 매우 비관적이다.

 <오발탄>에는 여러 기호가 등장한다. 고막을 찌르는 전투기 편대의 소음, 통금시간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 퇴직금 보장을 요구하는 데모대의 외침, 미군병사와 양공주가 나타날 때 들리는 재즈와 판소리의 대비 등 불안한 전후의 사회상을 표출한 음향이 바로 그런 예이다. <오발탄>은 이처럼 분단이 낳은 이산의 고통과 후유증을 강렬한 주제의식으로 빚어내고 있다.

 이성구 감독의 <장군의 수염>(1968)은 한국모더니즘영화의 첫 페이지를 장식한 이색 작품이다. 플래시백을 이용한 다층적인 서사구조, 영화 속의 소설을 애니메이션(신동헌 작화)으로 재현한 액자 구조, 고질적인 스토리텔링에서 벗어난 치밀한 구성과 조형적인 세트 등이 그러하다. 한국영화 가운데 모노크롬을 효과적으로 사용한 첫 사례이기도 하다.

 영화는 산동네 허름한 하숙집에 묵고 있던 김철훈(신성일)이라는 사진기자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면서 비롯된다. 노련한 박형사(김승호)와 젊은 형사(김성옥)는 그의 죽음에 대해 의문을 갖고 탐문수사를 벌인다. 주변 사람을 만나도 진전이 없자 철훈에게 편지를 보낸 소설가 한정우(김동원)로부터 철훈이 쓰려고 했던 소설 ‘장군의 수염’의 내용에 대해 듣게 된다. 개선행진에 나온 독립군 장군처럼 수염을 기르는 것이 유행이었던 시대에 이를 거부했다가 곤욕을 치르게 된 한 사내의 이야기이다. 형사들은 한때 철훈과 동거했던 전직 댄서 신혜(윤정희)를 통해 그가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녀는 자신에게서 마음의 상처를 치유 받으려는 철훈에게 싫증을 느낀 나머지 그의 곁에서 떠나고 만다. 경찰은 철훈의 죽음을 자살로 결론 내린다.

 이어령 원작, 김승옥 각색으로 이루어진 이 영화는 현재와 과거를 수시로 교차하며 필요에 따라 생략하거나 선택하는 영화적 시간과 확대·축소되는 영화적 공간을 효과적으로 만들어낸다.

 1970년대 이후의 결실 <바보들의 행진>과 <깊고 푸른 밤>, <서편제>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1975)은 대학가를 중심으로 1970년대 군부가 통치했던 암울한 시대의 단면을 잘 드러낸 작품이다. 젊은이들의 울분과 불만이 푸념으로 변하던 시절, Y대학 철학과에 다니는 병태(윤문섭)와 영철(하재영)은 그룹 미팅에서 같은 또래인 불문과 여학생 영자(이영옥)와 순자(김영숙)를 알게 된다. 병태의 짝이 된 영자는 데이트를 하면서도 선본 남자와 결혼할 것이라며 거리를 두려 한다. 술만 마시면 버릇처럼 예쁜 고래를 잡으러 가겠다던 영철은 입대가 좌절되자 동해로 떠난 후 바닷가 벼랑에서 몸을 던진다. 학교는 무기한 휴교에 들어가고 친구의 죽음에 괴로워하던 병태는 영자가 배웅하는 가운데 입영열차에 오른다. 이 영화는 신체검사를 받으러 간 대학생이 일등병을 놀리는 장면, 대학생들이 구호가 적힌 현수막을 들고 행진하는 모습, 영철이 벼랑으로 떨어져 죽는 대목 등 여덟 군데, 15분 분량이 삭제되었다.

 막걸리 마시기 대회, 함성이 쏟아지는 야구 경기장, 미팅이 대세인 대학가의 연애풍속도 등 역동적이고 낭만적인 화면과 병치시킨 폐쇄된 대학 정문 앞의 무장 군인들의 모습은 청바지와 생맥주, 통기타로 대변되던 1970년대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청년문화와 대비되면서 역설적인 억압의 흔적으로 남는다. <바보들의 행진>은 신인 배우들의 대거 기용으로 생소한 면이 없지 않으나 검열이 극심했던 유신 시대의 고뇌를 엿볼 수 있는 하길종의 야심작이다.

 배창호 감독의 <깊고 푸른 밤>(1984)은 작품의 수준과 흥행이 일치된 흔치 않은 경우에 속한다. 60여만 관객을 동원했을 뿐 아니라, 대종상, 한국연극영화예술상, 영평상 등 국내외 작품상을 거의 휩쓸며 ‘스타감독’의 위상을 굳히게 된다. 이 영화는 미국사회에 착하려 불법 입국한 한국청년의 카멜레온적 행각,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 현대사회의 병리적 에고이즘에 초점을 맞춘다.

 한국에 애인을 두고 온 백호빈(안성기)은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미국사회에 뿌리를 내리려는 야망의 청년이다. 그는 영주권을 얻기 위해 그레고리 백이라는 미국식 이름을 앞세워 유부녀를 유혹하고 갈취한 돈으로 제인(장미희)이라는 교포 여인과 계약결혼을 한다. 뒤늦게 사랑을 깨우치게 된 여자와 그 굴레에서 빠져나와 야망을 실현 시키려는 사내, 이런 가운데 백은 기다리던 영주권을 얻게 된다. 그러나 미국 사회의 일원으로서 새로운 삶을 누리려던 사내는 초청장을 기다리던 한국의 애인이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듣자 제인과 함께 찾아간 사막에서 죽음을 맞는다.

 <깊고 푸른 밤>은 안성기-장미희 콤비의 완숙한 연기와 간결한 커팅 처리를 앞세워 미국을 낙원으로 여기는 아메리칸드림의 허상과 비정한 현실을 날카롭게 부각한다.

 <서편제>(1993)는 임권택 감독의 93번째 작품으로, 정일성의 카메라에 힘입어 한국적인 특색과 정감을 살린 역작이다. 그가 남도 특유의 정취와 한(恨), 체념의 정서가 어우러져 한 폭의 절묘한 ‘듣는 그림’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데는 굽이진 황톳길과 바람에 휘는 은빛 억새의 들판, 눈 쌓인 산야, 정겨운 논두렁 등 자연풍광과 잘 어우러진 ‘진도 아리랑’ 및 ‘서편제’, 그리고 ‘심청가’ ‘춘향가’ 등 김소희의 판소리가 있다 .

 떠돌이 소리꾼의 인생 여정답게 로드무비 특유의 변화를 꾀한 이 영화는 1960년대 초 전라도 보성 소릿재의 주막에서 하룻밤을 묵은 길손(동호)이 여주인의 판소리를 들으며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소리 품을 팔기 위해 큰집 잔치에 불려온 소리꾼 유봉(김명곤)은 그곳에서 동호(김규택)의 어미 금산댁을 만나 자신의 수양딸 송화(오정해)와 함께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다. 오누이처럼 돌보며 송화에게는 소리를, 동호에게는 북을 가르쳐 소리꾼과 고수(鼓手)로 한 쌍을 이루게 하지만, 소리를 들어주는 사람들이 줄어들면서 화목이 깨진다. 유봉은 송화도 가난을 견디다 못해 떠난 동호처럼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완벽한 소리에 집착한 나머지 부자(附子)를 먹여 송화의 눈을 멀게 한다. 유봉은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는 송화를 정성을 다해 돌보지만 죄책감 때문에 괴로워 하다가 숨을 거두고 만다. 그로부터 몇 년 후 그리움과 죄책감으로 송화와 유봉을 찾아 나선 동호는 어느 이름 없는 주막에서 나그네를 상대로 의미 없이 살아가는 송화와 만나지만 다시 발길을 돌린다.

 득음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한마저 넘어서야 한다는 이유로 딸을 장님으로 만든 소리꾼(유봉)의 이기주의는 그동안 임권택이 추구해온 인본주의와는 상반된 예술지상주의적 면모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세 명의 소리꾼이 ‘진도 아리랑’을 부르며 롱 샷의 고갯길을 내려와 큰 길에서 덩실덩실 춤추는 미디엄 샷까지 이어진 5분 40초 가량의 롱테이크이다.

 이상 한국영화의 고전으로 남기를 바라거나 남을만한 열편의 작품에 대해 언급했다. 여기에 뽑힌 영화 외에도 평자의 기준과 관점에 따라 제외되거나 추가될 작품이 있을 것이다. 발표자 자신도 최종 순간까지 여러 차례 명단에 올렸다가 빼거나 추가하는 과정을 겪었다. 선택을 놓고 끝까지 고심하게 만든 작품은 1950년대의 <자유부인>(한형모)과 1960년대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신상옥), <안개>(김수용), <만추>(이만희), 그리고 1980년대의 <만다라>(임권택)와 <바보선언>(이장호) 등이었다.

 

 

* 《쿨투라》 2020년 5월호(통권 71호)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