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월평] 새로운 영웅을 찾습니다
[드라마 월평] 새로운 영웅을 찾습니다
  • 김민정(드라마평론가, 중앙대 교수)
  • 승인 2020.05.27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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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

  영웅의 계보: 역사는 둥글게 흐른다

  오래전에 방영됐던 드라마들이 한창 인기몰이 중이다. 온라인 탑골공원 얘기다. 지난 학기 드라마 수업에서 한 학생이 최고의 시대극으로 <야인시대>를 선정하여 발표한 적이 있다. 2002년에 방영된 드라마를 2000년생이 시청한 것도 신기한데 하물며 그 드라마가 재밌단다. 십여 년도 더 된 옛 드라마의 끈질긴 생명력은 둘째치고 1918년에 출생하여 1972년에 작고한 故 ‘김두한’이란 캐릭터를 향한 지금 여기 한국 젊은 세대들의 열광을 과연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드라마의 한 장면을 예로 들어보자. 6·25 전쟁 당시 미군의 군수물자를 운반하던 노동자들의 파업 후 임금 협상 과정에서 김두한은 미군을 상대로 노무자 일급을 1달러에서 4달러로 무려 4배나 올려달라고 요구한다. 그 과정에서 일명 김두한식 협상법이 등장한다. “사딸라!” 타협이랄 것도 없이 그는 몇 번이고 사딸라를 외친다. “사딸라”를 외치는 투박하지만 당당한 그의 영어 발음과 더불어 어떤 상황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 그의 태도는 한 시대의 영웅이 되기에 충분한 것이 아닐까 싶다. 사딸라! 그 한 마디가 화려한 액션씬 못지않은 통쾌함을 선사해주니까 말이다.

  방영 내내 화제성 지수 최고를 기록했던 <이태원 클라쓰>의 두 주인공도 영웅의 계보에 화려하게 안착했다. 박새로이의 우직한 밤톨머리와 조이서의 당돌한 눈빛. 무엇보다 회사 이름을 “아이씨”(IC)라고 지은 것부터 화끈하지 않은가. 사람의 가치를 그가 가진 자본으로 평가하는 물질만능주의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하지만 극중 박새로이와 조이서는 장대회 재벌 회장의 무자비한 횡포에 절대 물러서거나 굽히지 않는다. 아이씨! 회사명인 ‘IC’가 ‘이태원 클라쓰’의 영어 줄임말이 아닌 한국어 ‘아이씨’로 들리는 건 나만의 착각이 아닐 것이다. 역시 유행은 돌고 도는 것. 2020년 지금 여기 한국사회가 원하는 영웅은 낯설면서도 익숙한 얼굴을 하고 있다. 아, 불멸의 영웅이여!

  박새로이: 소신도 능력이야

  “재벌 2세면 양아치짓 해도 되는 거야?” 박새로이의 등장은 화끈하다. 반 친구를 괴롭히며 ‘자신이 곧 법’이라고 주장하는 재벌 2세의 얼굴을 주먹으로 한 방에 날려버린다. 그 일로 말미암아 아버지는 사망하고 자신은 전과자 신세가 되지만 그는 절대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다. 그런 그의 당당한 모습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루저가 아닌 부조리한 현실에 굴복하지 않는 위대한 위너를 연상시킨다.

  2020년 봄, 화려하게 등장한 새로운 히어로의 능력은 바로 소신이다. 소신, 그것은 지금 이 시대에 매우 매력적인 능력임이 분명하다. <낭만닥터 김사부>의 김사부와 <스토브리그>의 백단장에게 우리가 열광했던 배경에는 어떤 역경과 고난이 있더라도 의사로서 생명을 구하고 단장으로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겠다는 그들만의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념이라고 해서 다 같은 신념이 아니고 세상의 모든 소신이 동일한 대우를 받는 건 아니다.

  김사부는 의사고 백단장은 단장이다. 김사부가 거대병원에서 쫓겨나 돌담병원에 있을 수 있고 백단장이 씨름과 핸드볼, 그리고 야구에 이어 또 다른 구단에서 단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들이 전문직 종사자이기 때문이다. ‘철밥통’인 그들에게는 부조리한 세상과 맞서 싸울 자신만의 차별화된 무기, 즉 직업적 전문성이 있다. 그렇다면 박새로이에게는 무엇이 있을까. 중졸 전과자인 그는 ‘제빵왕 김탁구’처럼 천부적인 후각을 가진 것도 아니고, ‘며느리도 절대 모르는 욕쟁이 할머니의 비밀 레시피’를 남몰래 전수받은 것도 아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는 요식업계 1위 ‘IC’ 그룹의 대표가 되어 정의사회를 구현한 것일까.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그의 가난한 삶을 풍요롭게 메워준 건 바로 그 소신이다. 정확히는 그의 소신을 믿고 지지하는 친구들. 사람이 있어야 장사도 할 수 있다고 믿는 그는 함부로 사람을 내치지 않는다. 요리실력이 부족한 쉐프에게는 월급을 두둑이 줘서 요리 연습을 하게 하고, 외국인 손님을 응대하라고 뽑은 외국인 알바생이 영어를 못하자 배우면 된다고 두둔한다. 그렇게 하나둘 ‘친구’가 된 사람들로 그의 주변은 늘 시끌벅적하고 풍성하다. 경영은 조이서가 하고 요리는 마현이가 하고 관리는 최승권이 하고 자문은 강민정이 하고 재무는 이호진이 하고 후원은 토니와 그의 할머니가 한다. 이걸 전문용어로 가치투자 혹은 분산투자라고 하던가.

  역설적이지만 박새로이가 최고의 “장사꾼”이 될 수 있었던 건 그의 모든 것을 잃게 만든 그의 소신 덕분이다. “사람을 찾습니다.” 괜히 그가 토니의 아버지를 찾아주겠다고 전봇대에 전단지를 붙이고 다닌 게 아니다. 끝끝내 그가 지켜낸 것은 자신의 ‘무릎’이 아니라 ‘사람’ 그 자체다. 내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내 옆에 있는 당신이 행복해야 하고, 내가 잘 살기 위해서는 나와 함께하는 당신 또한 잘 살아야 한다. 경쟁이 아닌 공생과 연대의 삶, 그것이 바로 “이득을 바라고 미래를 건 투자” 즉, 성공적인 “비즈니스” 임을 박새로이는 우리에게 우직하게 알려준다. 아, 돈 많은 휴머니스트여!

ⒸJTBC

  조이서 : 소시오패스인 게 뭐 어때서

  모두 박새로이의 소신에 감탄하고 있을 때 그의 뒤에서 홀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이 한 명 있다. <이태원 클라쓰> 속 또 다른 주인공 조이서. 그녀는 박새로이와 매우 상반된 캐릭터를 보여준다. 재벌 아들의 학교 폭력을 외면하지 못하고 주먹으로 응징한 박새로이에게 요구된 대가는 중졸 전과자였다. 비슷한 상황에서 조이서는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인다. 그녀는 학폭 현장을 SNS에 업로드함으로써 가해자 학생들이 대중의 질타 속에서 학교 징계를 받게 한다. 자기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문제를 손쉽게 해결해낸 것이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소신‘만’ 있는 박새로이를 향한 그녀의 “디펜스”는 단순히 삼각관계에 있는 연적 오수아를 막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그녀가 말하지 않았던가. “이 남자를 건드리는 놈들은 다 죽여버리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박새로이에게 있는 소신이 조이서에게도 있다. 다만 그 소신이 가리키는 목적지가 다를 뿐이다. 박새로이, 단 한 명을 위한 소신. 박새로이가 복수에 성공하고 재벌의 갑질에 더 이상 삶이 추락하지 않는 것은 모두 조이서의 디펜스 덕분이다 .

  오수아가 얄밉게 첩자 노릇을 하고 근수가 매몰차게 배신을 하고 장대희 회장이 말도 안 되는 갑질을 하더라도 시청자들은 모든 일이 잘 풀릴 거라고 기대한다. 조이서가 소시오패스라는 것에 대해서도 별로 개의치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녀가 소시오패스라서 한결 편안하게 박새로이의 복수극을 감상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조이서가 박새로이 옆에 있지 않은가. 낮이 있으면 밤이 있고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다. 박새로이가 조이서에게 “미안하다. 나 때문에 악역이나 맡고.”라고 사과하는 것도 다 그 때문이다. 조이서는 해피엔딩을 기대하는 우리의 간절함이 만들어낸 악역이고, 우리가 애써 외면해온 불편한 진실을 홀로 감당하는 숨은 영웅이다. 2020년 봄, 소시오패스 캐릭터는 이렇게 우리의 일상 안으로 깊이 들어온다.

  그렇다고 조이서가 박새로이를 짝사랑하며 그의 복수를 돕는 조력자로 만족하는 건 아니다. 장사꾼도 절대 손해 보는 짓을 안 하지만 소시오패스 역시 절대 남좋은 일만 하진 않는다. 그녀는 당당히 선언한다. “내가 다 부숴버릴 거야.” 박새로이의 시점에서 보면 <이태원 클라쓰>는 부조리한 사회와 싸우는 박새로이의 영웅담이지만 조금만 관점을 바꾸면 박새로이는 조이서가 철저한 계획 아래 만들어낸 ‘온달 왕자’다. “꿈 이뤄드릴게요, 사장님”이라고 그녀가 말하지 않았던가. <이태원 클라쓰>는 조이서에게 어울리는 “그저 그런 남자가 아닌 대단한 남자”가 되기 위한 박새로이의 성장담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일종의 남자 신데렐라 스토리랄까.

  드라마 속 로맨스는 조이서의 등장을 기준으로 전과 후가 나뉜다. 더 이상 남자가 무언가 해주기만을 바라는 수동적인 여자는 드라마의 여자주인공 자리를 꿰찰 수 없다. 긴 머리에 큰 눈망울, 그리고 앵두입술을 가진 박새로이의 첫사랑 오수아가 “진짜 혐오스럽다”라는 말까지 들은 마당에 누가 뭘 할 수 있겠는가. 미인은 용기 있는 남자가 차지한다고? 노노! 미남은 똑똑한 여자가 쟁취한다. 이제 사랑도 따뜻한 심장과 더불어 차가운 머리가 있어야만 할 수 있는 시대가 오고야 만 것이다. 아, 로맨틱한 소시오패스여!

 

 

* 《쿨투라》 2020년 5월호(통권 7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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