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월평] 페스트가 지나간 자리
[연극 월평] 페스트가 지나간 자리
  • 차성환(시인, 연극평론가)
  • 승인 2020.05.27 15: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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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

  박근형 연출의 <페스트>는 2018년 5월 명동예술극장에서 처음 공연을 올린 지 2년여 만에 우리에게 돌아왔다. 실제 무대 위의 공연은 아니지만 국립극단의 유튜브 채널 스트리밍 서비스(상영일시 2020년 4월 6일 10:00~4월 7일 10:00)를 통해 다시 관객과 만나게 된 것이다. 코로나19가 가져온 풍경은 우리의 일상생활뿐만 아니라 공연계의 모습도 바꾸어 놓았다. 연극의 3대 요소가 무대, 배우, 관객이라면 연극이란 특정 한 장소에 배우와 관객이 모여 같은 시간을 보낸다는 뜻이다. 다른 곳이 아니라 무대를 중심으로 배우와 관객이 만난다. 배우는 열연을 하고 관객은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거의 매일 밤 전 세계 곳곳의 무대 위에서 반복적으로 벌어지는 일이었지만 지금은 더없이 그립고 소중한 장면이 되었다. 대부분의 공연이 취소된 상황에서 국립극단이 온라인 상영회의 첫 작품으로 <페스트>를 호출한 것은 시의적절하다. 영상으로 보는 연극관람은 영혼 없는 몸과 만나는 것과 같다. 생기를 잃은 죽음 같다. 하지만 영상을 통해서라도 연극 무대를 불러와 배우와 관객의 만남을 주선할 때, 우리는 영상 속의 공간을 그리워한다. 배우는 저 빛나는 무대 위로, 관객은 무대를 향해 있는 저 어둠 속으로 되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언택트’(Untact)는 우리의 연대를 더 강력하게 추동한다.

 

사진_국립극단 제공

 

  과거의 예술가가 후대의 예술가로부터 영감을 받을 수 있다는 ‘예상 표절’이라는 개념도 있지만 초연의 <페스트>는 2년 후의 한국적 상황을 정확하게 예상 표절했다고 볼 수 있다. 2020년 지금의 현실적 맥락 속에서 <페스트>는 더 깊이 있는 의미와 정서적 감응력을 갖는다. 배우들이 흰색 마스크와 장갑을 끼고 페스트와 사투를 벌이는 무대의 장면은 이것이 단순히 비유로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현실 자체일 수 있겠다는 두려움을 전해준다. 박근형 연출은 명민하게도 소설 『페스트』의 주 무대인 ‘오랑시’에, 고립된 섬에서 동서로 분리된 채 거대한 철장벽을 사이에 두고 상대국과 대치하고 있다는 설정을 추가한다. 이는 1940년대 프랑스의 한 도청 소재지에서 벌어진 사건을 한순간에 2010년대 동북아시아의 한반도, 남북분단에 처해있는 한국적 상황으로 전치시킨다. ‘오랑시’의 통치자인 ‘지사’를 중심으로 권력자들은 ‘페스트’ 사태를 이용해시 민들을 더 강력하게 지배하면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굳히려 한다. ‘지사’의 명령으로 계엄령이 선포되고 군홧발로 총을 들고 나온 군인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한국의 근현대사의 가슴 아픈 풍경을 엿보게 된다. ‘페스트’로부터 시민을 지키고 보호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페스트’는 저쪽에서 온 것이며 철장벽을 더 높고 튼튼하게 세워야한다는 논리로 흐를 때 그것은 영락없이 한국의 한 정치 세력의 행태를 연상시킨다. 이러한 연출 의도는 주인공 의사 리유가 타루, 그랑, 랑베르와 같은 시민들과 연대하여 페스트에 대항해 싸우고 결국은 극복해낸다는 기본 서사를 충실히 따라가면서 비교적 선명하게 드러난다.

  박근형 연출은 원작 『페스트』의 이야기를 선 굵게 처리하면서 극을 시원시원하게 이끌고 간다. 하지만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듯이, 알베르 까뮈의 『페스트』가 ‘페스트’와 사투를 벌이는 가운데 시민들이 연대하고 그 안에서 인간의 고귀한 희생과 가치를 발견하는, 그 웅숭깊은 휴머니즘이 짙게 나타났다면, 박근형 연출의 <페스트>에는 한국의 근현대사에 대한 반추가 중간 중간에 끼어들면서 원작의 결말이 주는 묵직한 감동이 다소 반감되는 형상이다. 리유를 제외한 다른 인물들의 정서적 결을 따라가기에 조금은 역부족이고 섬세하지 못했다. 원작의 줄거리를 2시간의 공연에 담을 때의 한계이기도 하다. <페스트>의 굵직한 서사 안에서 스스로 혹은 어쩔 수 없이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인물의 미묘한 감정선에 좀 더 신경 썼다면, 결말에 이르러 핏빛으로 얼룩진, 고통스럽지만 그 뜨거운 인간의 아름다움을 목도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찐득찐득한 휴머니즘의 감동이랄까. 그것은 극 속의 ‘페스트’가 아니라 굵직한 서사와 무대의 스펙터클에 의해 희생된 것들이다. 자신의 신앙과 인간의 존엄성을 끝까지 잃지 않으려는 파늘루 신부의 죽음이나 페스트가 다 지나간 다음에 벌어진 코타르의 자살, 페스트와의 싸움에서 결국 희생당한 장 타루의 장렬한 죽음, 그리고 그 뒤에 남겨진 살아남은 자, 리유의 슬픔.

  페스트로 고통 받는 오랑시를 그대로 무대 위에 불러낸 감각적인 무대미술에 대한 이야기도 놓치면 안 되겠다. 명동예술극장의 넓은 무대를 압도할 정도로 큰, 병실의 흰 천과 철장벽, 무대 뒤편에 배치한 대형 수조에서 뿜어져 나오는 우울한 푸른빛의 느낌, 무대 한쪽에 흰 이빨이 보이는 아가리를 벌린 채 덩그러니 놓인 검은 피아노, 입체감과 깊이를 잘 표현하고 있는 층층의 계단식 무대 등등 박상봉(무대미술)은 소설 『페스트』의 풍경을 스펙터클하고 모던한 감각으로 잘 표현해냈다. 변화무쌍한 무대의 빠른 장면 전환과 함께 극의 정서를 탄력 있게 끌고 가는 음악(박민수)은 서로 톱니바퀴처럼 잘 맞물려 돌아가면서 시너지 효과를 낸다. 이 극이 뮤지컬 버전의 가능성도 보인 지점이다.

 

사진_국립극단 제공

 

  핏빛으로 얼룩진 무대를 통과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놓치지 않아야한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페스트’는 사라지지만 언제든지 다시 나타나 우리의 일상을 좀먹고 피 흘리게 할 수 있다. ‘페스트’는 보이지 않는 ‘바람’ 속에 숨어 있다. 극의 도입부와 마지막에서 섬에는 설명하기 힘든 바람이 분다는, 리유의 독백처럼 ‘페스트’는 그 바람 속에 숨어서 우리를 언제라도 기습할 수 있는 전염병인 것이다. 우리의 일상에서 구조적 폭력과 불안을 작동시키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유이다. 질병 자체 보다 질병이란 사태 속에서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자가 더 무섭고 슬픈 우화이다. <페스트> 속 대사처럼 코로나19도 어느 날 바람과 같이 홀연히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자연스럽게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연극 <페스트>는 지금도 곳곳에서 묵묵히 헌신하고 사투를 벌이는 모든 이들에게 바쳐진다. 페스트가 지나간 자리에는 붉은 꽃이 핀다. 인간이 인간이고자 하는 것은 피와 눈물과 고름으로 얼룩진 육체와 영혼의 뜨거운 투쟁에 의해서 그리 된 것이라고 믿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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