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게 시나리오 쓰기 6] 인물의 감정과 태도, 선택과 행동
[재미있게 시나리오 쓰기 6] 인물의 감정과 태도, 선택과 행동
  • 이무영(영화 감독, 시나리오 작가)
  • 승인 2020.07.09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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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인공이 입체적으로 누구인지, 과거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리고 그가 뭘 원하는지를 아는 것은 시나리오 집필 시 꼭 필요한 내용이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의 세밀한 감정과 태도 등을 연구하는 일이다. 인간은 누구나 다 그만의 감성으로 희로애락의 순간을 마주한다. 어떤 이는 아내가 죽었을 때 슬퍼하지만, 어떤 이는 쾌재를 부른다. 크나큰 행운을 맞이할 때 드러나는 감정도 각기 다 다르다. 감정만큼이나, 삶과 타인을 대하는 태도도 한 인간을 잘 말해주는 척도가 된다. 어떤 특별한 일이 발생할 때 개개인이 무엇에 가치를 두느냐에 따라 각자의 선택과 행동이 달라진다. 등장인물들은 감정과 태도가 있어야 비로소 살아 숨 쉬는 캐릭터가 된다. 시나리오에 등장하는 모든 캐릭터는 행위를 통해 그들의 감정과 태도를 드러낸다.

 

  감정

  한 사람이 그 어떤 감정도 없다면, 우린 그에게서 참 매력을 느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주인공이 아무 감정도 드러내지 못한다면 관객은 영화가 매우 기계적이며 억지로 꾸민 것 같다고 느낄 것이다. 감정은 사람의 마음을 연결하는 도구다. 성별이나 나이와 상관없이, 서로 마음으로 통하게 하는 아름다운 것이다. 주변 누군가가 고통 가운데 있다면 대부분 사람의 마음에는 연민이나 측은지심 따위가 생겨난다. 행복한 모습을 보면 함께 행복해 하거나 부러워하는 마음이 든다. 이처럼 시나리오에서 인물의 감정은 캐릭터 구축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들이 인물의 감정적인 면을 간과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 작가들은 감정을 분노나 눈물, 미소 등으로 단순히 표현하는데 그친다. 정서적으로 세밀한 고민이 없기 때문에 창조의 결과물이 밋밋하다. 얼핏 보기에 <밀양>의 신애는 자신을 좋아하는 종찬을 우습게 여기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내밀하게 보면 그녀는 점차 그를 의지한다.

  많은 경우 영화를 볼 때 관객은 주요 인물, 특히 주인공의 입장과 처지를 헤아리며 감정적으로 동화한다. 예를 들어 영화 속에서 어머니가 자식을 살리기 위해 모든 걸 내던질 때 무조건 공감하고 응원한다. <변호인>에서 아들 때문에 주인공에게 매달리는 국밥집 아주머니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기지 않는다면 그는 필시 사이코패스이거나 소시오패스(sociopath, 반사회적 인격 장애자)임에 틀림없다. 심지어 관객은 아들을 살리기 위해 아무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는 <마더>의 엄마를 보면서, 응원까진 않더라도 그 입장을 이해하기는 한다.

  서로를 죽이기 위해 돌진하는 <복수는 나의 것>의 류나 동진을 보며 관객은 각자 입장을 헤아리며 괴로워한다. 어떻게든 아들을 잃은 슬픔을 극복하려 애쓰는 신애를 보면서는 눈물을 흘린다. 이처럼 관객이 영화 속 특정 인물과 감정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을 ‘관객 공감’이라고 한다. ‘관객 공감’은 주요 캐릭터가 관객들이 익숙한 감정, 즉 사랑, 기쁨, 행복, 불행, 미움, 질투, 공포, 모욕감 등을 느낄 때 이뤄진다. 이런 인간의 감정들은 범우주적이며 영원하다.

  그런데 ‘관객 공감’ 이전에 영화 속 주인공이나 주요 캐릭터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먼저 감정적으로 다른 인물과 연결돼야 한다. <변호인>의 국밥집 아주머니가 변호인의 마음을 움직였듯 말이다. 만약 주인공이 먼저 어느 등장인물과도 감정적으로 통하지 못한다면, 십중팔구 그는 관객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

 

  태도

  누구나 다 세상을 향해 외칠 수 있는 세계관이 있고, 삶을 살아가는 자세가 있다. 그 태도는 부정적일수도 긍정적일 수도 있다. 다정다감할 수도, 냉소적일 수도 있다. 작가들이 새 시나리오를 쓸 때 주인공의 감정보다 태도를 먼저 떠올리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예전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출연했던 <더티 해리>(돈 시겔 감독, 1971년 오리지널) 시리즈 등 상투적 수사물(搜査物)에는 그 어떤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는 강철같은 형사가 항상 등장한다. 반대로 부패한 경찰이나 형사가 나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물론 이 경우도 대부분 상투적이다. 이럴 경우 작가는 클리셰(Cliche)를 극복하기 위해 캐릭터에 새로운 면을 추가하려고 애를 쓴다. 밖에서는 강철이지만 가정에선 아내에게 꼼짝 못하는 <베테랑>의 서도철 형사, 인종차별주의자이며 알코올 중독자이나 선한 마음의 소유자인 <쓰리 빌보드>(마틴 맥도나 감독, 2017)의 딕슨 경찰관 등이 작가가 산고 끝에 세상에 내놓은 독특한 경찰 캐릭터다. 어쨌든 영화 속에서 서도철이나 딕슨 모두 자신만의 태도가 있고, 또 그 태도에 따라 행동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태도는 무엇에서 출발하는가!

  아마도 그건 개개인의 신념이나 철학에서 비롯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서도철이 형사로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악을 응징하는데 온 힘을 쏟는 건, 선한 세상을 소망하는 그의 착한 마음 때문이다. 사실 그가 아내에게 꼼짝 못하는 이유도 알고 보면 그가 착하기 때문이다. 딕슨도 비슷하다. 흑인에 대한 무지 때문에 인종차별적 편견을 갖고 있지만, 내적으로 그는 선하며 헌신적인 사람이다. 그가 앙숙이었던 주인공 밀드레드를 돕는 것도, 레드 웰비를 무자비하게 폭행한 후 창 너머 내던지는 것도 다 소중한 가치를 위해 자신을 내던지는 태도 때문이다. 영화에서 주요 캐릭터는 자신의 철학이나 신념을 직접 관객에게 말로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행동으로 입증한다. 그가 궁극적으로 행동하는 모습을 통해 관객은 그의 신념이나 세계관 등이 무엇인지 깨우치게 된다.

  예를 들어 착취당하는 노동자가 있다 치자!

  그는 둘 중 하나의 길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싸울 수도, 아니면 입을 다물고 그냥 부당함을 감수한채 계속 일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과연 그가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는 무엇일까? 인물의 신념은 그의 태도를 형성하고, 그 태도는 행위를 통해 입증된다. 말보다는 행동이 정확하게 한 인물이 어떤 존재인지를 말해준다. 그렇다면 당신이 그리려는 주인공은 어떤 존재인가? 그의 신념은 무엇인가? 그는 영화 속 특정한 상황에 놓였을 때 어떤 태도를 보이는가? 그는 어떤 행위로 자신의 신념과 태도를 입증하는가?

 

  인물의 선택과 행동

  관객은 영화 속에서 캐릭터가 벌이는 행위를 보며 그를 판단한다. 예를 들어 난폭한 야수처럼 행동하는 인물이 있다 하자! 심지어 사람을 해치는 괴물 같은 존재라 하자!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살인행위를 통해 자신의 모든 걸 희생하며 친구를 절망적 상황에서 구해낸다.

  <슬링 블레이드>(빌리 밥 손튼, 각본/감독/주연,1996)의 주인공 칼이 그런 사람이다. 어린 시절 불륜을 저지른 어머니와 정부를 살해, 정신병원에 갇힌 후 25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칼은 12세 소년 프랭크와 우정을 쌓는다. 하지만 행복한 시간은 잠깐, 그는 유일한 친구 프랭크의 인생을 위협하는 도일을 살해하고 다시 정신병원에 수용된다. 도일은 프랭크 엄마의 남자친구다.

  사실 칼은 무시무시한 살인자다. 그러나 영화 내내 관객은 이 사실을 망각한다. 관객이 주목하는 건 자신을 내던져 프랭크를 지키려는 그의 헌신이다. 관객은 살인을 통해 드러나는 프랭크를 향한 따뜻한 마음이 그의 실체라고 믿는다. 이것이 바로 영화 속 인물의 행동이 보여주는 힘이다.

  그럼 여기서 칼이 도일을 살해하기까지의 과정을 분석해보자!

  칼이 어느 날 갑자기 열 받아서 도일을 죽인 게 아니다. 칼은 많은 고민 끝에 도일을 살해하기로 결심한다. 그대로 방치하면 도일이 학대 끝에 프랭크를 죽이거나, 반대로 프랭크가 과거 자신처럼 도일을 살해하는 걸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후 어쩔 수 없이 살인을 선택한다.

  이처럼 영화 속 주인공은 대체적으로 중대한 일을 실행하기 전 먼저 어떤 길을 선택할지 고민의 시간을 갖는다. 이 고민은 찰나일수도, 매우 긴 시간을 요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주인공의 선택은 행동으로 이어지고, 그 행동이 이야기를 끌고 가는 원동력이 된다. 가끔 영화 속 어떤 인물이 뭔가를 결정하는 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다. 혹시 주인공이 결정 장애는 아닐까, 숙고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혹시 지루해지지 않을까 염려되기도 한다. 그런데 마지막 선택이 이루어질 때까지의 과정도 주인공이 취하는 하나의 행동으로 평가할 수 있다. 심사숙고의 행동 말이다. 선택을 두고 머뭇거리는 모습에서도 인물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선택을 목전에 두고 주인공이 보여주는 긴 고민은 훌륭한 스토리의 재료다.

 

  주인공의 마지막 선택

  영화 시작부터 주인공은 여러 차례 선택을 강요받는다. 그리고 이 선택들은 주인공의 목표와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영화 앞부분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목표를 선택하고, 이를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대가도 치른다.

  그런데 주인공이 영화 초반과 달리 나중에 완전히 다른 목표를 선택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건 영화적으로 참으로 매력적인 변화다. <미션>(롤랑 조페 감독, 1986)의 초반 로드리고 멘도자는 노예사냥꾼이다. 당연히 그의 목표는 더 많은 노예를 잡아서 부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나중에 과거의 삶을 송두리째 팽개치고 신부가 되는 선택을 한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과거 자신의 사냥대상이었던 과라니족 원주민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버린다. 참으로 어마어마한 변화요, 아이러니다.

  <카사블랑카> 초반 주인공 릭 블레인은 자신의 안녕밖엔 아무 관심도 없는 냉혈한으로 보인다. 당연히 그는 자신에게 이롭지 않은 걸 절대 선택하지 않는다. 하지만 클라이맥스에서 릭은 파리에서 자신을 버리고 떠난 여인 일사와 그의 남편을 위해 엄청난 희생을 감수한다.

  <변호인>과 <택시 운전사>(장훈 감독, 2017)에서 송강호가 연기한 주인공들도 마찬가지다. 둘 다 영화 초반부엔 돈이 중요한 인물로 그려지고, 그에 합당한 선택들로 일관하나 마지막에는 정의를 위해 목표 수정을 감행한다. 이런 경우들을 볼 때 영화에서 주인공의 맨 마지막 선택이 진정 그가 누구인지를 말해준다 할 수 있다. 물론 그건 대체적으로 주인공에 대해 관객이 기대할만한, 그리고 받아들일만한 선택일 것이다.

  이럴 경우 주인공의 선택에는 참혹한 대가가 따를 수 있다. 물론 그도 이 사실을 잘 안다. 끌려가 고초를 당할 수도,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주인공은 새로운 난관을 만남으로 선택의 기로에 선다. 새로운 선택은 주인공의 참 자아를 드러내고, 초반보다 훨씬 더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한 그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캐릭터 변화를 통한 성장은 주인공으로 하여금 맞닥뜨린 문제를 해결케 하고, 영화 내 그의 참 임무인 마지막 목적을 이루게 한다.

  마지막으로 영화에서의 캐릭터 묘사는 소설 등에서의 캐릭터 묘사와는 현저히 다르다. 소설의 경우 작가는 충분한 시간과 지면을 무기로 자세하게 캐릭터의 감성과 태도, 선택과 그에 따른 결과 등을 묘사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에서 관객의 이해를 돕기 위해 잠시 정지버튼을 누르고 캐릭터들을 소개할 수는 없다. 일단 시작되면 영화의 시간은 멈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나리오 작가는 어쩔 수 없이 영화 속 사건과 인물의 행위를 통해 캐릭터들을 소개하고 설명해야 한다. 주요 인물들의 행동 속에 담긴 그들의 감정과 태도, 선택 등을 관객이 잘 이해하게 하는 게 시나리오 작가가 가장 중요한 책무다. 결국 인물의 행동이 모든 걸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은 무슨 말을 하느냐가 아니라, 무얼 하느냐로 평가된다.”

  어디선가 들은 말인데 누구로부터인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 《쿨투라》 2020년 6월호(통권 7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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