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월평] 오빠 믿지? 아니, 누나 믿지?
[드라마 월평] 오빠 믿지? 아니, 누나 믿지?
  • 김민정(드라마평론가, 중앙대 교수)
  • 승인 2020.07.10 10:5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드라마의 다양한 얼굴, 〈연상녀〉
ⒸSBS

  “하이에나 똥이 왜 하얀지 알아? 썩은 거든 산 거든 뼈째 씹어 먹거든.”

  이제까지 한국 드라마에 이런 변호사가 있었던가. 강력한 카리스마로 조직폭력배를 제압하는 한편 자신의 매력 자본을 활용해 상대 변호사에게 기밀문서를 몰래 빼내는, 익살스러운 얼굴로 여유롭게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를 쥐락펴락하다가 결정적인 순간 사연 깊은 눈빛으로 연민을 자아내는, 다양한 표정만큼이나 다채로운 캐릭터를 보여주는 그런 인물 말이다. 변호사, 그것도 여자 변호사, 더 나아가 여자 캐릭터에게 이렇게 풍부한 표정과 이야기를 부여해준 드라마가 있었던가. 유독 여자 캐릭터에게 야박했던 한국 드라마 세계에 <하이에나> 속 정금자 변호사의 등장은 기립박수로 환대해야 할 큰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미 온라인상에서 그녀는 ‘갓혜수’로 일컬어지고 있다.

  앞서 뜨거운 찬사를 열심히 나열했지만 사실 내 속셈은 따로 있다. 극중 정금자가 김희선이란 가짜 이름으로 상대 남자 변호사 윤희재에게 접근하여 기밀문서를 빼내 오려고 할 때, 그러니까 윤희재 변호사가 자신을 사랑하도록 의도적으로 유혹의 덫을 놓을 때 말이다. 그가 쉬이 다가올 수 있도록 그녀는 자신을 고교 사년 선배로 접점을 만들어놓는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다는 정서적 연대감이다. 두 사람이 연인이 되는 과정에서 그녀가 네 살 연상이라는 건 사랑의 걸림돌이 되지 못한다. 나이가 무슨 상관이람, 이라는 대사조차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게 말하는 것조차 촌스러운 세상이 된 것처럼 말이다. 오, 갓혜수. 그녀가 배우 주지훈과 띠동갑이란 건 굳이 말해 무엇하리.

ⒸMBC

  누난 내 여자니까

  처음부터 우리가 연하남과 사랑에 빠진 누나들에 대해 ‘힙’한 반응을 보였던 것은 아니다. 이천년대 초반만 해도 그 누나들은 주변의 눈총을 받아야만 했다. 어쩔 수가 없었다. 여자친구의 남동생과 사랑에 빠지거나 남자친구의 남동생과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다. 가족만은 건드리지 않는 게 한국사회의 불문율이지 않은가. 이미 만남의 시작부터 두 사람의 사랑은 역경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봄날>(2005)은 한 여자를 사랑한 이복형제의 이야기다. 고아로 외롭게 자라난 여자는 의료봉사 활동을 온 한 남자와 만나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지만 남자는 사고로 식물인간이 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의 남동생이 그녀를 찾아온다. 혼외자로 태어난 그 남동생은 형의 연인을 옆에서 지켜보다가 연모하는 마음을 품게 된다. 그렇게 외로운 두 사람 사이에 핑크빛 분위기가 점점 짙어질 무렵 형이 깨어난다. 아,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봄날>에서 비운의 여주인공을 맡았던 배우 고현정은 <여우야 뭐하니>(2006)에서 다시금 연하남과 사랑에 빠지는 게 되는데, 전작의 그늘지고 우울한 얼굴을 완전히 지워버리고 수더분한 외모의 남성성인잡지 기자로 돌아온다. 겉으로는 야설을 술술 읊으며 센 척했지만 알고 보면 연애에 숙맥인 그녀는 술에 취해 친구 남동생과 우연히 하룻밤을 보내게 되면서 그와 연인 사이가 된다. 가족처럼 지낸 친구의 남동생을 사랑한 탓에 친구에게 뺨을 맞는 것은 물론이고 엄마에게 두들겨 맞아 지쳐 쓰러지기 일쑤지만 그녀는 군에 입대한 어린 연인을 찾아가 캠핑카에서 로맨틱한 하룻밤을 보내며 훈훈한 결말을 맞이한다.

  “상식은 자기가 만드는 거야. 왜 남의 상식에 끼워 맞추려고 그래? 생각을 조금만 바꿔 봐. 1mm만 바꾸면 모든 게 달라져. 안 보이던 게 보이고 중요한 줄 알았던 게 하나도 안 중요하고, 남의 시선 따윈 아무 필요 없게 돼.”

지금 들어도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명대사들은 그동안 금기로 여겨졌던 연하남과의 사랑에 대한 ‘힙’ 한 면죄부를 선사해준다. 사실 유머 코드가 잔뜩 섞인 드라마 분위기만 봐도 나이 어린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연상녀에 대해 한결 너그러워진 사회적 시선을 확인해볼 수 있다.

“아프진 않은데 골이 쏙 빠져나간 것 같다. 뇌진탕인가? 죽으면 안 되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연애나 실컷 할걸.”

ⓒMBC

  오빠 믿지? 아니, 누나 믿지?

  두 드라마의 ‘연상녀’들은 말만 누나였지 연애에서는 그다지 누나로서 리드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한 명은 말 못 하는 실어증 신세, 다른 한 명은 연애 경험이 거의 없는 숙맥. 그렇다고 우리 곁에 그런 ‘얌전한’ 누나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한국 로맨스드라마의 전형성을 파괴하는 파격적인 스토리로 화제를 모았던 그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2005)을 기억하는가.

  몇 년째 항암치료 받는 청순가련형 첫사랑의 등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추억은 추억일 뿐이에요. 추억은 아무런 힘이 없어요.”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건 이런 저런 사랑을 다 겪어본 세 살 연상 누나이기 때문이다. 뭐, 서른 살 여주인공을 ‘노처녀’라고 칭하며 나이 많다고 구박하는 이천년대 중반 감성이 지금 보면 좀 우습긴 하지만 “너무 오래 굶었어.”라고 말하는 방앗간 집 셋째딸의 당찬 행보를 보고 있노라면 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진다. 그렇지. 알 거 다 아는 누나들의 연애가 제일 화끈한 법이지. 거침없이 성욕을 드러내는 김삼순을 디딤돌 삼아 화려하게 등장한 ‘센 누나’가 있었으니, 바로 <밀회>(2014)의 오혜원이다. 성공을 위해 앞만 바라보고 달려온 예술 재단 기획실장 오혜원과 자신의 재능을 모르고 살아온 천재 피아니스트 이선재. 두 사람은 마흔 살 여자와 스무 살 남자의 사랑이라는 불가능에 가까운 관계 설정에도 불구하고 해피엔딩을 성취해낸다. 극중 남녀 주인공의 파격적인 나이 차이 때문에 영화 <은교>를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영화 <은교>가 젊은 여성을 통해 청춘의 ‘육체’를 그리워한다면 드라마 <밀회>는 젊은 남성과의 사랑을 통해 ‘청춘의 영혼’을 보듬는다.

ⒸJTBC

  소녀의 젊음과 육체적 탐미 앞에서 “나의 늙음이 나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듯”이라고 읊조리는 <은교>의 시인 이적요와 달리, <밀회>의 오혜원은 “그의 재능을 내가 살려주고 싶어”라며 가난 때문에 잃어버린 이선재의 미래를 안타까워한다. 그녀에게 이선재는 사랑하는 남자 이상 그 의미를 지닌다. 그는 그녀에게 젊은 날의 이루지 못한 꿈이고 잃어버린 청춘이다.

  귀여우면 가져야지

  ‘내 남자 유명 피아니스트 만들기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능력 좋은 누나’ 오혜원을 시작으로 한국 드라마에서는 오혜원의 후예들이 넘쳐나기 시작한다. <검색어를 입력하세요>(2019)의 배타미 전략본부장. 그녀는 경쟁사에 스카우트될 정도로 뛰어난 업무 능력과 강력한 추진력을 가진 고액연봉자다. 여기에 “너 보면 미치겠어. 너 안고, 만지고, 좋아하고 싶어”라며 육체적 사랑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너 아프게하는 사람은 내가 다 죽일 거야”라며 사랑의 영혼을 보듬는 뜨거운 마음도 갖추었으니 어떤 남자가 매혹당하지 않겠는가. 그런 까닭에 38살 그녀보다 열 살 어린 28살 박모건은 얼굴이면 얼굴, 능력이면 능력, 성격이면 성격, 무엇 하나 빠진 것 없는 완벽남이지만 배타미에게는 절대적 약자가 된다. ‘비혼주의자’ 그녀는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고자 하는 ‘입양아’ 출신인 그의 꿈을 끝끝내 거부하지만 그는 “나 버리자 마요.”라고 애절한 사랑을 고백하며 그녀 곁에 남는다. 자신을 귀엽게만 보는 배타미에게 박모건은 귀엽게 말한다.

“귀여우면 가져야지.”

ⒸJTBC

  돈 많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누나만 연하남을 가질 수 있는 건 아니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2018)는 한국 드라마 속 ‘누나’들이 점점 고스펙 전문직이 되어 강력한 카리스마를 구사하는 것과는 다른 길을 걷는다. 친한 친구의 남동생과 사랑에 빠진다는 올드한 설정, 집안 반대, 전 남친의 방해 공작, 거기에 남자의 보호를 받는 수동적인 여성상까지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는 듯한 느낌을 지우기 어렵지만 그러면 어떠하리. 물질 자본주의 시대에 매력 자본만큼 확실한 스펙도 없다. 배우 손예진이 연기하는 ‘누나’ 윤진아는 얼핏 보면 커피회사 슈퍼바이저로 평범한 직장인이지만 그 어떤 누나보다 능력 좋은 화려한 금수저다. 미모는 부모에게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유산이니까 말이다.

  이제까지 지난 이십여 년 동안 한국 드라마에 나오는 다양한 누나들의 이야기, 그들의 변천사에 관해 이야기했다. 하지만 드라마가 우리가 사는 현실을 따라가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 현실에서는 열아홉 살 연하와 결혼도 하는 마당에 그깟 연애가 뭐 큰일이라고 호들갑이겠는가.

 

 

* 《쿨투라》 2020년 6월호(통권 72호)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