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특별기고] 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생명력의 아이콘 - 영원한 청년 신성일 선생을 기리며
[12월 특별기고] 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생명력의 아이콘 - 영원한 청년 신성일 선생을 기리며
  • 전찬일(영화·문화콘텐츠 비평가)
  • 승인 2018.12.28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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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0월 29일부터 11월 11일까지 광화문 세실극장에서 공연된 배우 권병길(1946∼ )의 50주년 기념 모노 뮤직 드라마 <푸른 별의 노래>는, 어느 유명 영화의 이미지와 함께 시작한다. 한 중년 여인이 벤치에 앉아 있는, 쓸쓸한 기운 가득한 장면이다. 배우는 문정숙, 그 여인은 다름 아닌 이만희 감독의 신화적 걸작 <만추>(1966)의 극 중 주인공 혜림이다. 교도소에 복역 중인 모범수. 그녀는 3일간의 특별휴가를 마치고 서울로 오던 중, 열차에서 위조지폐범으로 쫓기고 있던 남자를 알게 되고, 두 사람은 다음날 창경원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한다. 하지만 쫓기는 처지에 처해 있는 터라 남자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 사정을 모르는 혜림은 약속 장소에서 그를 기다리다 실망한 채 교도소로 발길을 돌린다. 헌데 그가 교도소 문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게 아닌가. 그는 그녀에게 내복 한 벌을 건네주며 아쉬움을 남긴 채, 경찰에 체포되어 간다. 영화의 문을 여는 위 이미지는 혜림이 훈을 기다리는 장면인 것.

 그 남자 훈이, 명배우 권병길의 공연이 한창 중이던 4일 새벽 2시 25분 경, 지난해부터 앓아온 폐암으로 우리 곁을 떠났다. 한국 영화사 최대·최고 스타요 ‘영원한 청춘’이며 ‘거목’이었던 우리 시대의 배우, 신성일(申星一, 1937. 05. 08 ∼ 2018. 11. 04)이다. 그는 항암 치료를 받는 와중에도 특유의 의지·활기로 2018년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을 빛내는 등 ‘건재’를 과시해왔으나,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먼저 저 세상 사람이 된 것이다.

 신성일 그는 연극 무대를 거쳐 영화계로 뛰어든 김승호, 김진규, 최무룡, 신영균 등 기라성 같은 다른 선배들과는 달리, 신상옥 감독 김승호 주연의 <로맨스 빠빠>(1960)에서 막내아들 역으로 그 존재감을 예고했다. 한운사의 인기 연속 방송극을 영화화한 유현목 감독의 <아낌없이 주련다>(1962)로 본격적으로 그 이름을 알리더니, 신성일-엄앵란 커플의 탄생을 알리는 공전의 히트작 <맨발의 청춘>(1964, 김기덕)을 통해 기념비적 스타덤에 올 랐다.

 그 이후 그의 질주는 거칠 게 없었다. <만추>를 비롯해 정진우 감독의 <초우>(1966), 김수용 감독의 <안개>(1967), 이성구 감독의 <장군의 수엽>(1968), 이장호 감독의 <별들의 고향>(1974), 김호선 감독의 <겨울여자>(1977), 이만희 감독의 <태양닮은 소녀>(1974), 임권택 감독의 <길소뜸>(1985) 등의 주인공으로 한국영화사를 화려하게 수놓았다. 신성일 그는 자타가 인정한 비교 불가의, 한국 영화사의, 아니 한국 사회·문화사의 으뜸 스타 아이콘이었다. 동의 여부를 떠나, 대한민국의 스타 역사는 ‘신성일 이전’과 ‘신성 일 이후’로 나뉜다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내 확신이다.

 다른 추모의 글에도 밝혔듯, 남용·오용 등으로 스타의 의미가 퇴색될 대로 퇴색해진 이 시대에도, 그는 내게 스타/덤(Star/dom)의 의미를 환기시키고 곱씹게 하곤 했다. ‘문화자본’, ‘사회적 현상’으로서도 그렇거니와 이미지로서 스타, 기호로서 스타 개념에 신성일 그만큼 완벽하게 부합된 이는 없었다. 앞으로도 그럴 공산이 크다. BTS로 통용되고 있는 월드스타 방탄소년단을 포함해서도 그렇다. BTS의 스타성이 신성일처럼 수십 년을 지속될 리 만무할테니까 말이다. 그래서다, 중학교 적 내삶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훗날 계획에 없던 영화평론가로서의 길을 걷게 할 내 인생의 영화 <별들의 고향>(1974)과 조우한 이래, 그가 내 인생의 유일한 스타여왔던 것은. 나는 언제 어디서나 스타를 딱 한명 대라면, 별 다른 주저 없이 신성일을 꼽아왔다. 그와 심심치않게 비교되는 프랑스 출신 월드 스타 알랭 들롱이나, ‘스타의화신’이라 할 제임스 딘이 아니라.

 524편의 기록적 출연 편수(한국영상자료원 KMDb 참고)가 그 희대의 스타성을 증거하는 결정적 인자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는 원로 평론가 김종원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한국영화 사상 신성일만큼 장기간 스타 지위를 누린 배우는 없었다. 그는 영화 전성기의 물꼬를 튼 1960년대 후시後時 녹음 시대에서 산업화로 전환한 1970년대까지 근 20년 정상을 지킨 유일한 존재였다." 또" 신성일에게 스타라는 대명사는 남들이 함부로 넘볼 수 없는 ‘명예’이자 스스로 감내하지 않으면 안 되는 ‘멍에’였다. 오늘날 한류 붐을 타고 있는 몇몇 인기스타와 비교하더라도, 그가 일찍이 1960년대에 누린 명성은 단순하게 비교할 수 없는 독보적인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위 평가·감회는 윤정희 선생의 그것이기도 하다. 지난 13일 열린 제38회 영평상 시상식에서 공로영화인상을 받으며 윤여사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눈물을 훔치며 고인을 기렸다. 윤여사의 데뷔작 <청춘극장>(강대진)에서 그녀를 빛내준 이도 다름 아닌 그, 신성일이었으며 280여 편의 출연작 중 무려 100편에 달하는 영화를 고인과 함께 했다니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지금 이 순간, 내 가슴에 더 크고 깊게 머물러 있는 것은 수십년 간 천착해온 고인의 스타성보다는 “그의 청춘성과 생명력이다. 단언컨대 내게 올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의 단 한 명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신성일이었다. 환한 미소를 품은 그 당당함과 품위는, 정확히 한 달 후 저세상으로 떠날 폐암 3기 환자의 그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결정적 출세작 <맨발의 청춘>에서 연기한 인물 ‘두수’에 직결됐다. 그는 두수로부터 50여 년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청년이었던 것이다. 500편이 넘는 다작의 와중에도 반영웅적 캐릭터들을 자기만의 이미지와 스타일로 멋들어지게 소화해낸 영웅적 스타!”(이상 국민일보 인용).

 2012년 재단법인 한국영화복지재단이 발간한 <영원한 청춘배우 엄앵란> 중 ‘신성일, 특유의 생명력으로 세월을 이겨낸 거대한 배우’에서도 피력했듯 불가사의한 것은, 그 지독한 소모적 다산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코 ‘소모’되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사실이다. 상기 거론된 문제적 수·걸작들이 증거하듯, 오늘날의 눈으로도 인정·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적잖은 영화들에서 신성일 그만의 생명력 넘치는 캐릭터들을 창조해냈으며, 두고두고 회자돼 온 열연을 펼쳤다는 것이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 그와 더불어 살아갈 것이다. 지금껏 그래 왔던 것처럼, ‘영원한 청년’ 신성일과 함께 더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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