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월평] ‘원더 우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곁을 찾았다: 〈원더 우먼 1984〉

개봉을 고수한 〈원더 우먼 1984〉(패티 젠킨스)

2021-01-27     나원정(중앙일보 영화 담당 기자)

  월간 잡지 《스크린》에서 영화 기자 일을 처음 배운 이래로 매해 연말연시면 이런 전화를 돌리기 바빴다. “새해 라인업 나왔나요?” 각 영화사가 한 해 동안 개봉할 신작 목록을 미리 확보하는 것이다. 으레 신년호 특집으로 꾸리는 ‘올해의 기대작’ 기사를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개봉 한두 달 전 취재를 마쳐야 하는 월간지 특성상 매월 섭외할 영화감독, 배우, 특집 아이디어를 미리 파악할 밑천이기도 했다. 숫기 없는 막내 기자에겐 업계 동향을 귀동냥할 귀중한 기회기도 했다.

  《스크린》 폐간 후 주간지 《무비위크》를 거쳐 《맥스무비 매거진》 《매거진M》, 지금의 중앙일보까지 줄곧 이어졌던 이 연례취재가 13년째 무색해졌다. 야속한 코로나19 탓이다. 영화관에 발길이 끊기면서 개봉을 대거 미룬 데다 해외 촬영 중 팬데믹에 쫓겨 기약 없이 제작이 중단된 작품이 숱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모처럼 신작들로 북적이나, 했던 연말 극장가가, 겨울 들어 확진자 수가 치솟으면서 상업영화, 독립·예술영화 할 것 없이 개봉 연기가 잇따른 뒤엔 아예 신작 예측 자체를 포기하게 됐다. 개봉 결정이 하루아침에 뒤집히곤 해서다. 공유·박보검 주연 복제인간 SF <서복>이, 류승룡·염정아가 춤추고 노래한 뮤지컬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가, 실사영화 이상으로 감동했던 <인사이드 아웃> <업>을 만든 디즈니/픽사 애니메이션 감독 피트 닥터의 신작 <소울>이 그렇게 다시 멀어져갔다.

  텅 빈 극장가에서 12월 23일 개봉을 고수한 <원더 우먼 1984>가 그래서 반가움을 넘어 신기했다. 2008년 <아이언맨> 1편 이래 10년 넘게 극장가에 개근해온 마블 히어로들이 지난해엔 코로나19로 모조리 결석한 바. 지난해 개봉을 예고한 히어로 블록버스터 중엔 <원더 우먼 1984>가 거의 유일하게 개봉했다.

  12월 17일 시사회에서 뚜껑을 열어보곤 무릎을 쳤다. 이 영화, 히어로 액션 버전 성탄특선 <러브 액츄얼리>잖아?

  원더 우먼은 원작 DC 코믹스 시절부터 “사랑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영웅”으로 꼽힌 터다. 4년 전 1편 ‘원더 우먼’에서 아마존의 신화적 여성 왕국 데미스키라의 공주로 자란 다이애나 프린스, 즉 원더 우먼(갤 가돗)은 섬에 불시착한 인간 조종사 트레버 대위(크리스 파인)에 의해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인간 세상에 뛰어들어 사랑의 힘으로 인류를 구원한다. 이번 2편은 그로부터 70년 가까이 흐른 1984년 냉전시대의 미국. 1편에서 트레버를 잃은 뒤 슈퍼 히어로답게 조금도 늙지 않은 외모로 박물관 고고학자로 위장한 채 살아가던 원더 우먼은 우연한 계기로 평생 다시 보길 소원하던 연인 트레버의 환생을 겪게 된다.

  등장인물들이 저마다 평생의 소원을 이루려다 대재앙을 부른다는 스토리 설정부터 다분히 성탄 시즌에 마침맞다. 여기에 <인디펜던스 데이> <볼케이노> 같은 1990년대 할리우드 재난 블록버스터가 흔히 보여준, 직설화법으로 인류애를 설파하는 듯한 다소 계몽적인 해피엔딩이 투박하게 얽힌다. 평소라면 그저 촌스럽게만 느껴질 이런 알기 쉬운 위로가 지금처럼 우울감이 지배한 코로나 시대엔 되레 미덕으로 와 닿기도 한다. 영화가 먼저 공개된 해외 언론에서도 “구시대적이고 신랄하지 않은 방식으로 가장 즐길만한 블록버스터”(BBC) “유머, 스펙터클, 낙천주의로 가득찬 꼭 필요한 블록버스터”(토탈 필름)란 평가가 나왔다.

  1편이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호평 받은 데 반해, 이번 속편은 흡사 놀이기구를 타는 듯한 액션 스펙터클을 극대화한 데다 남성 연인에 대한 사랑이 한층 강조됐단 지점에서 “소녀들은 테스토스테론을 연료로 한 충실하고 성실한 영화보다 더 나은 버전을 볼 자격이 있다”(타임지) “이 실망스러운 속편은 슈퍼 히어로 장르의 끔찍한 현재뿐 아니라 전체 할리우드 영화 제작의 끔찍한 상태를 강조한다”(벌처) 등 비판도 있지만, 비평 전문 사이트 <로튼토마토> 전문 평단 신선도는 12월 17일 현재 88%로 볼만한 오락영화란 호평이 우세하다.

  사실 12월 개봉하기까지 다섯 차례나 일정이 밀린 터다. 2019년 11월로 예정한 개봉이 빠듯한 후반작업 일정 탓에 2020년 6월로 연기됐다가 코로나19로 인해 다시 8월, 10월, 결국 지금의 개봉일에 이르렀다. 더 미룰 수 없었던 이유는 영화 속 악당 중 사기꾼 사업가 맥스 로드에서 찾을 수 있다. 방송에서 유행어를 낳은 유명인사인 데다, 평범한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해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려 미국 대통령 연단에 선 장광설 장면은 영락없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떠오르게 한다. 풍요와 과잉 속에 움튼 무질서와 방만, 정치·인종적 이유로 손쉽게 혐오에 빠지는 대중의 모습은 지금의 미국을 비추는 거울과도 같다. 이런 시국 저격 영화를 미국 대선으로 이미 정권 교체가 이뤄진 마당에 개봉을 더는 미룰 수 없었으리라. 바꿔 말하면, 할리우드의 웬만한 블록버스터가 수익 회수가 불투명한 극장가에 나서기를 꺼리는 시점에 <원더 우먼 1984>는 그런 손해를 보더라도 꼭 세상에 선보여야 했던 작품이란 뜻이기도 하다. 그저 코로나19로 얼어붙은 극장가를 구원한다는 의미만은 아니었단 얘기다.

  세상이 ‘셧다운’ 될 줄 상상조차 못한 작년 초엔 극장 관객 수가 역대 최다 2억 2000만 명을 기록한 2019년에 이어 팡파레를 울릴 것을 기대하며 ‘우주선·복제인간… 2020 한국영화, 더 대담한 상상력이 온다’란 제목의 기사도 썼다.

  당시 기사에서 딱 30편만 추린 기대작 중 실제 극장에서 개봉한 것은 단 12편. <사냥의 시간> <콜> <승리호> 등 숱한 기대작이 온라인 스트리밍 창구(OTT) 넷플릭스로 직행했다.

  특히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는 말 그대로 멈춰선 상태다. 디즈니의 디즈니플러스, 워너브러더스의 HBO맥스처럼 자사 OTT 고객유치를 겸해 극장·OTT 동시 개봉하는 게 아니면, OTT 직행도 어렵다. 워낙 대자본이 투입된 데다, 전 세계 극장 개봉할 경우의 평년 수익을 가정하면 그 어마어마한 ‘몸값’을 감당하겠다고 나서는 OTT가 드물어서다.

  아무도 겪어보지 못해서,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던 팬데믹 속 2020년을 지나 영화는, 아니, 영화를 마주한 우리는 어떤 2021년을 맞게 될까. 분명한 사실은 ‘원더 우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곁을 찾았다는 것. 여전히 극장에, 영화가 있다.

 

* 《쿨투라》 2021년 1월호(통권 79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