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오늘의 영화 - 가버나움] 자식 노릇도 부모 노릇만큼이나 힘들다

2020-04-02     설규주(경인교대 교수)

세 개의 가족: 자인의 가족, 요나스의 가족, 그리고 요나스의 가족+자인

〈가버나움〉에는 세 개의 가족이 보인다. 우선 자인의 가족이 등장한다. 자인과 엄마, 아빠 그리고 사하르를 비롯한 여러 동생까지 모두 열 명이 넘는다. 다음은 요나스의 가족이다. 젖먹이 요나스와 엄마 라힐 단 두 사람으로 자인의 가족에 비하면 단출하다. 여기까지가 혈연 관계로 맺어진 전통적 의미의 가족이다. 가족의 범위를 좀 더 넓혀 보면 요나스의 가족에 자인이 더해진 ‘유사 가족’도 하나 찾을 수 있다.

첫 번째 가족: 자인의 가족

자인의 가족은 가난하다. 부모가 가족의 생계를 위해 무슨 일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일단 자인의 엄마는 직업을 갖기 어려워 보인다. 아이들이 워낙 많고 어리기 때문이다. 자인의 아빠도 딱히 직업이 있는 것 같진 않다. 12살 정도 된 자인이 사실상의 소년 가장이다. 자인은 동생들과 함께 마약성 약물을 탄 주스를 만들어 팔고 배달 심부름을 하며 돈을 벌어온다. 다른 나라같으면 중학생쯤 될 자인은 아직 학교에 가보지도 못했다. 학교 공부 대신 밥벌이가 그의 몫이다. 부모가 자인을 학교에 보낼까 말까 저울질할 때조차 그 목적은 교육이 아니라 학교에서 무언가 먹을 것, 입을 것이라도 얻어오기 위함이었으니, 그 가난이 짐작되고도 남는다.

자인의 가족에게 욕설과 폭력은 일상이다. 물론 이것은 상호적이지 않다. 아빠 엄마의 욕설과 폭력의 방향은 자식들을, 그 중에서도 특히 자인을 향해있다. 서슴없이 욕을 하고 주먹질과 발길질을 한다. 그 폭력의 원인은 가난일까, 경험일까? 답하기 어려운 문제지만 아마도 둘 다일 것이다. 부모도 가난에 지쳐 자기가 낳은 자식에게도 웃어줄 여유가 없다. 게다가 자인 아빠의 고백에 따르면, 자기 자신도 그렇게 가난하고 폭력적인 가정에서 자랐다. 가난이 가난을 낳고, 가난이 폭력을 낳고, 폭력은 또 폭력을 낳는다. 

자인의 가족에서 부모의 보살핌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동생들은 부모가 아니라 자인을 따라 다니며 주스 만들어 파는 일을 돕는다. 젖먹이 아이야 어쩔 수 없이 엄마가 데리고 다니기는 하지만, 엄마는 젖먹이를 품에 안고서도 거침없이 입에 담배를 문다. 그다지 아이를 소중히 대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그러면서도 아이를 또 만든다.

자인의 가족에게는 그래도 형제애가 있다. 자인은 특히 한 살 어린 여동생 사하르를 무척 아낀다. 옥상에서 둘이 함께 시간을 보낼 때는 얼핏 남매가 아니라 연인처럼 보이기도 한다. 우연히 사하르의 초경을 발견한 자인은 어떻게든 사하르의 결혼을 막아보려고 한다. 더 정확히는 사하르가 돈을 받고 아내로 팔려가는 것을 막으려고 한다. 자인은 둘이서 몰래 도망치려는 시도까지 해보지만, 결국 부모의 저지로 실패하고 사하르를 빼앗긴다. 분노를 이기지 못한 자인은 이에 가출로 답한다. 자인을 거두어 준 라힐이 가족이 보고싶지 않은지 물었을 때 자인은 사하르가 제일 보고 싶다고 하면서도 동생이 팔려갔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화려하게 옷 입고 축하 받으며 시집 잘 갔다고 말한다. 할 수만 있었다면 그렇게 해 주고 싶었던 오빠의 바람이고, 사실은 그렇게 못해준 오빠로서의 미안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두 번째 가족: 요나스의 가족

요나스의 가족도 가난하다. 에티오피아 출신 불법 체류(미등록 체류) 노동자 라힐은 예기치 않게 요나스를 임신하면서 그동안 해오던 일을 그만두어야 했다. 나중에 음식점에서 일자리를 얻었지만 젖먹이를 둔 탓에 밤늦게까지 일할 수도 없다. 레바논에 체류하며 계속 일하기 위해서는 가짜 서류라도 만들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브로커에게 줄 돈이 필요하다. 게다가 매달 에티오피아의 가족에게도 돈을 부쳐줘야 한다. 돈이 더 나올 곳은 없고 결국 자기 머리카락마저 잘라 파는 상황에 이른다.

요나스의 가족에게도 가난은 있지만, 그래도 여기엔 부모의 욕설과 폭력은 없다. 요나스가 비록 계획된 아이는 아니어도, 그리고 요나스로 인해 라힐이 6년이나 해오던 일을 그만두게 되었어도 요나스는 엄마의 사랑만큼은 듬뿍 받는다. 라힐이 일하는 동안 요나스를 맡길 곳이 없어 심지어 화장실에 몰래 요나스를 넣어두기도 하지만, 그래도 요나스는 라힐의 포근한 보살핌 아래 있다.

어떻게 보면 요나스는 라힐의 힘든 삶을 예약해 놓은 존재이기도 하다. 라힐은 요나스로 인해 괜찮은 일자리를 잃었고 앞으로도 이른바 ‘미혼모’로 살아가야 한다. 또한 시시때때로 먹여주고 재워줘야 하는 요나스는 라힐이 좋은 직장을 구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 그럼에도, 라힐은 요나스만 넘겨주면 돈 들이지 않고도 계속 체류할 수 있게 해 준다는 브로커의 말에 흔들림이 없다. 내 아이는 내가 키운다고 단칼에 거절하며 요나스를 포기하지 않는다. 집 밖에서 라힐은 매순간 전쟁을 치르지만, 집 안에서는 요나스에게 키스를 퍼붓는다. 

세 번째 가족: 요나스의 가족 + 자인

가출한 자인의 합류로 만들어진 이 가족은 유사 가족이다. 가족의 전통적 구성 원인인 혼인, 혈연, 입양과는 무관한 자인 때문에 이 가족은 ‘유사’라는 꼭지를 달아야 한다. 그렇지만 가족의 전통적 기능인 양육과 보호를 제공한다는 점에서는 가족이라고 할 만하다. 혼인과 혈연으로 이루어졌지만 양육과 보호에 무심한 자인의 가족과는 딴판이다.

라힐이 갈 곳 없는 자인을 받아들인 것은 어쩌면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약자에 대한 동정심이나 책임감으로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일종의 계약 관계가 작용했다고도 볼 수 있다. 자인과 라힐은 서로 이해관계가 맞았다. 부모를 떠나 집을 나온 자인은 잠잘 곳과 먹을 것이 필요했다. 체류 연장을 위해 브로커에게 줄 돈을 마련해야 하는 라힐은 일하거나 서류를 준비하는 동안 요나스를 봐줄 사람이 필요했다. ‘기브 앤 테이크’가 작동할 수 있는 조건이다.

이 유사 가족도 앞의 두 가족만큼이나 가난하다. 라힐이 벌어 오는 돈은 그대로인데 입만 하나 더 늘었으니 생활이 나아질 리 없다. 냉장고에는 얼음 말고는 먹을 게 없고 수도꼭지를 돌리면 녹물이 나온다. 남들이 먹다 남은 케익 한 조각이라도 더 챙겨두는 수밖에 없다. 

그래도 식구가 하나 더 들면서 이 유사 가족에게 추가된 게 있다. 바로 형제애다. 라힐은 법정에서 자인과 요나스가 친형제 같았다고 증언한다. 처음엔 자인이 못 미덥고 불안했지만, 요나스를 자인에게 맡기고 일하러 나갈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점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실제로 자인은 나중에 난민구호 단체 직원에게 도움을 청할 때 자신이 시리아 난민이라고 둘러대면서 요나스를 자기 동생이라고 말한다. 요나스의 검은 피부색은 엄마가 임신 중에 커피를 많이 마셔서 그렇게 된 거라고 능청을 떨기까지 한다.

자인과 요나스는 국적도 인종도 피부색도 다르다. 그런데 한 가지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둘은 출생증명서가 없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다. 영화 속 표현에 따르면 “케첩병에도 이름이 있고 제조사가 있고 유통기한이 있”는데 자인과 요나스는 그렇지 못하다. 

‘유령 인간’이라 할 수 있는 요나스와 자인의 유사 가족 관계는 라힐의 체포로 인해 ‘기브 앤 테이크’가 더 이상 작동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한동안 더 이어진다. 라힐이 잡힌 이후 요나스를 돌보는 일은 완전히 자인의 몫이 되어 버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라힐은 돌아오지 않고 자신은 요나스에게 먹일 우유조차 구할 수 없어서 요나스를 떼어내 보려고도 시도하지만 쉽사리 버리지 못한다. 자신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팔려간 동생 사하르를 떠올리면 더더욱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결국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음을 알고 브로커에게 요나스를 내어 주지만 차마 눈길을 떼진 못한다. 떠나가는 자인을 바라보는 요나스 또한 마찬가지다.

부모 노릇과 자식 노릇, 어느 것이 더 힘든가?

가족은 부모가 있고 자식이 있어서 늘어나고 또 이어진다. 부모는 부모대로, 자식은 자식대로 욕구가 있고 필요가 있다. 또 부모는 부모대로, 자식은 자식대로 역할이 있다. 부모 노릇 하는 것과 자식 노릇 하는 것, 어느 것이 더 힘들까? 아마도 부모는 부모 노릇이, 자식은 자식 노릇이 더 힘들다고 할 것이다. 군대에서 이등병은 이등병 나름대로, 병장은 병장 나름대로 힘들다고 하는 것처럼.

〈가버나움〉의 가족에서 부모를 맡은 자인의 엄마와 아빠, 그리고 요나스의 엄마도 힘들기 그지 없다. 〈가버나움〉을 보는 관객 다수는 자인의 시선과 감정을 따라가면서 자인의 부모를 비난할 수 있지만, 자인의 부모도 할 말은 있다. 법정에서 자인의 엄마는 자기도 죽을힘을 다해 살고 있다고, 자기 입장이 되어 보고서 비난하라고 말한다. 자기 말고는 아무도 자기를 비난할 수 없다고 말한다. 자인의 아빠는 퇴거통보서를 받고서도 빌붙어 살 수밖에 없는 자신의 가족을 기생충에 비유하며 가정을 꾸린 걸 후회한다고 말한다. 요나스의 엄마도 에티오피아 본국 엄마에게 돈 부치랴, 요나스 먹여 살리랴, 체류 서류 꾸미랴 정신이 없다. 이렇게 부모 노릇하기가 힘들다. 

자식 노릇은 쉬운가? 자인과 동생들은 학교 다닐 나이가 한참 지났음에도 일하느라 바쁘다. 특히 자인은 지식이나 규범이 아니라 욕을 배우고 싸움을 배우고 요령을 배운다. 부모에게 기대할 것이 없으니 그런 생존 능력은 스스로 터득해야 한다. 그렇게 거칠게 버티고 싸워서 번 돈은 고스란히 부모의 몫이 된다. 젖먹이 요나스라고 다를까. 요나스는 그렇게 좋아하는 엄마를 마음껏 누리지 못한다. 하루 종일 안겨 있어도 모자란 것이 엄마 품인데, 요나스는 엄마가 일을 마칠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한다. 그래도 젖먹이라 그 정도지만 요나스가 그 상태에서 조금 더 자라면? 아빠 없이 혼자서 돈벌이하는 엄마를 도와야 할 요나스의 삶 역시 평탄치만은 않아 보인다. 이렇게 자식 노릇하기도 힘들다.

자인의 엄마도, 아빠도, 요나스의 엄마도 한때는 누군가의 자식이었다. 자인도 요나스도 아마 언젠간 누군가의 부모가 될 것이다. 부모가 되어 봐야 부모 마음을 안다고 했던가. 한때 자식이었던 부모는 자식의 마음을 잘 헤아리는가. 부모도 자식도 다 할 말이 있고, 내가 더 힘들다고 내가 더 애쓰고 있다고 말할 자격이 있지만, 적어도 〈가버나움〉에서는 과거에 자식 노릇하며 힘들었던 기억은 거의 잊어버린 부모에게 자식 노릇 하는 것도 사실 만만치 않음을, 고되고 고됨을 보여주는 데 방점을 찍는다. 그러면서 지금 부모인 당신도 자식으로서 어린 시절 겪어보지 않았었냐고 묻는 것 같다. 자인과 요나스가 겪은 것만큼은 아니더라도 그때 그 나름의 힘듦이 있지 않았었냐고.

평범해서 슬픈 엔딩

영화의 엔딩에 이르러 자인은 미소를 보여준다. 영화를 보는 사람 대부분은 이때 자인이 처음 웃는 거라고 착각하기 쉽다. 이전 장면에서 웃음을 보여주기엔 자인의 삶이 너무 고단했기 때문이다. 사실 자인은 요나스의 가족과 함께 있을 때 두어 번 웃기는 한다. 자신을 환영하기 위해 라힐이 챙겨온, 손님이 먹다 남은 케익 위의 촛불을 끌 때, 그리고 옆집 사람을 욕하며 라힐과 몸장난을 칠 때… 워낙 짧은 순간이라 관객은 자인의 웃음을 의식하기도 힘들다. 

그러나 엔딩에서 보여준 자인의 웃음은 누구나 기억할 수 있다. 치아가 드러날 정도로 활짝 웃은 것도 아니고 입꼬리가 조금 올라가는 정도의 가벼운 미소다. 자인의 미소 자체가 다른 아이의 웃음보다 특별히 더 멋지다거나 밝다거나 한 것도 아니다. 미소를 머금은 자인의 얼굴은 여느 12살 어린이의 표정과 그리 다르지 않다. 그냥 평범하다. 그런데 그 평범한 웃음을 짓기까지 자인에게는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사실 자인은 고급스러운 차를 타고 기름진 음식을 먹고 좋은 옷을 입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냥 보통의 부모와 함게 보통의 가정에서 보살핌 받으며 자라길 바랐을 뿐이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다. 평범함이라는 게, 일상이라는 게 그렇게 어렵다. 그래서 평범한 일상이라는 게 그리도 소중한 것이다.

자인의 이 잔잔하지만 강렬한 웃음은 묘하게도 자인 엄마의 눈물과 대비된다. 그 눈물은 자신이 낳은 자식에게서 부모 자격을 박탈당한 데서 오는 눈물로 보인다. 자인은 판사에게 말한다. 자신의 부모가 더 이상 아이를 낳지 못하게 해 달라고. 자기도 자라서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고 존중받고 사랑받고 싶었지만 자신은 욕을 들어가며 바닥에 짓밟혔다고. 그리고 동생 사하르의 죽음 이후 엄마가 새로 가진 아이도 결국 자기처럼 될 거라고. 부모에게 이보다 더한 저주가 있을까. 자인의 부모 입장에서는 퇴거통보서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자식에게 고소당했다는 사실보다도 더 무서운 형벌이 바로 이 저주가 아니었을까…

영화와 현실을 오가는 뫼비우스의 띠

영화가 끝나고 자인, 요나스, 라힐, 사하르, 메이소운 등이 전문 배우가 아니라 실제로 난민이거나 불법 체류자(미등록 체류자)라는 자막이 뜬다. 이 순간 〈가버나움〉은 하나의 거대한 뫼비우스의 띠가 된다. 흔히 실화를 소재로 만든 영화가 주는 먹먹함이나 묵직한 감동 같은 게 있다. 그렇게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라 하더라도, 영화는 영화 아닌가. 다큐가 아닌 이상, 그래도 영화만큼은, 적어도 영화 속 배우만큼은 허구가 아니던가.

그런데 〈가버나움〉은 그런 차원이 아니다. 영화 속 허구가 허구가 아니며, 영화 속 배우가 배우가 아니다. 자인, 요나스, 라힐, 사하르, 메이소운은 배우가 아니라 현실의 자연인이고, 그들의 말과 행동은 대사나 연기가 아니라 증언이고 증거이며 역사가 된다. 

꽃을 파는 난민 소녀 메이소운은 스웨덴으로 갈 거라며 그 나라를 이렇게 묘사한다. “그 나라 아이들은 병에 걸려야만 죽어.” 자인도 거기 가고 싶다고 말한다. 아이들이 병에 걸려야만 죽는 나라에서는 아이들이 적어도 맞아 죽지는 않을 것이다. 굶어 죽지도 않을 것이다. 현실의 자인은 영화 속 그 신기한 나라 스웨덴 옆에 있는 노르웨이에 실제로 정착한다. 자인과 메이소운의 목소리를 통해 〈가버나움〉 속 아이들이 동경했던 평범한 삶이 현실에서 이루어진다. 안전, 건강, 교육과 같이 아이들에게 당연한 일상으로 주어져야 할 것들이 정말로 주어졌다.

‘가버나움’이 무슨 뜻인가 찾아보니 ‘나움(나훔; 위로)의 마을’이라는 의미였다. 성경에서 ‘가버나움’은 예수가 많은 기적을 행한 곳으로 묘사된다. 성경의 역사 속 ‘가버나움’은 그랬는데 영화 〈가버나움〉에서 우리는 어떤 위로를, 어떤 기적을 찾을 수 있을까. 예수는 ‘가버나움’ 사람들이 많은 기적을 목격하고도 아무런 변화가 없는 걸 보고 꾸짖었다. 영화 〈가버나움〉도 현실 속 우리에게, 이미 어떤 기적을 목격한 우리에게 어떤 꾸짖음을 주지는 않는가?

 


설규주 _ qzoos@hanmail.net
서울대학교 사회교육과 학사, 석사, 박사 졸업. 현재 경인교육대학교 사회교육과 교수. 문화와 미디어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음.

 

* 『2020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