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문학] 글, 오래되고 퇴색된 기억을 찾아서

북텍사스이민도민회 전쟁수기집 [집으로]

2019-03-20     김준철(시인, 본지 편집위원)

 

우리는 얼마나 많은 기억을 저장하고 있을까?

얼마나 오래 기억을 가지고 있을까?

 우리의 기억은 바로 어제의 일도 까맣게 잊어 먹기도 하고, 수십 년 전의 일을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기억하고 살아가기 도 한다.

 

 얼마 전, 12월 12일 텍사스 달라스에서 출판기념회 초청을 받아 참석하게 되었다. 북텍사스이민도민회(Associations of Northern Provinces Korea of North Texas) 17명의 회원들의 6·25 전쟁에 대한 기억을 담은 전쟁수기집 『집으로』를 1년 반이 넘는 준비기간을 거쳐 발간하게 된 것이다.

 

 고개를 갸웃하게 했다. 굳이 6월 25일에 책을 낸 것도 아니고 또 한국 땅에서 책을 엮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많은 한인들이 사는 LA나 뉴욕도 아닌 중부로 들어간 이곳에서 전쟁수기집을 낸 이유가 궁금했다. 이 책이 만들어진 뒤에는 박인애 작가의 오랜 노력과 열정, 사명감이 들어있음을 곧 알게 되었다.

 

 달라스에서 달라스한인문학회 5대 회장을 역임한 그녀는 미주한국문인협회 이사이며, 시와 수필을 쓰고 있다. 그리고 그곳 중앙일보문화센터 문학교실에서 수십 명의 작가 지망생을 가르치고 있는데, 이미 열 명의 제자가 등단하여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제29회 세계시문학상과 제26회 해외한국문학상, 그리고 제1회 국제문학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런 그녀에게 한가지 추가된 이력이 있다.그것은 그녀가 북텍사스 이북도민회총무로 봉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도 6·25 전쟁 당시, 이북한 분이었고 그런 아버지를 보며 안타까운 마음에 봉사활동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북도민회 회원들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경청하게 되었고 그런 그들의 이야기가 어느 시기에는 분명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아쉬움과 불안함에 이번 일을 기획하게 되었다고 전했다.

 

 『집으로』의 대부분의 작품들은 거칠고 서툴다. 다듬어지고 숨겨지고 과장되기보다는 오랜 삶 속에 그대로 묻혀있던 기억들이 이 수기집을 통해 깨어났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의미를 지닌 책이었다. 많은 피난민들은 이미 타향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지만 그 짧은 이별은 슬픈 노래가 되어 그들의 가슴에서 떠나지 않는다.

 

 출판기념회 축사를 하기 위해 나온 리차드태리 미 해병대 예비역 중장의 첫마디는 “나에게 시간이 많아 남아있지 않다.”였다. 그것은 자신이 이 한국전 이야기들을 상세히 전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 같아서 더욱 숙연해졌다. 이 책에 적힌 수기들은 대부분 저자들에 의해 평생 입으로 반복되어 왔을 것이다. 끊임없이 도망치고 죽고 또 살고… 바로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반복되어오고 있는 것이다.

 

 역사라는 것은 단순히 어떤 큰 사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이후에 그 시기를 몸으로 살아내 온 누군가의 삶이 곧 역사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 이야기가 어떠한 형태로든 후세에 전해지지 않는다면 결국 어느 순간에는 바람을 타고 가벼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박시인이 엮으며 집필한 이 수기집에 들어있는 글들은 한 번도 발표된 적이 없는 귀한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다. 글쓰기가 서툰 이들의 수기를 직접 자비로 상금까지 걸고 모집광고를 내기도 했고 많은 여러 집필자들을 물색하여 책의 필요성과 의미를 전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17명 회원을 수기를 모았으며 북도민회중앙연합회 김지환회장의 특별기고문도 실었다. 또한 장진호전투의 주역인 미 해병대 예비역 리차드캐리 장군을 비롯한 여러 명의 특별기고문도 읽을 수 있게 했다. 또한 김종회 교수의 평론과 윤수아 시인의 시, 김공산, 조신호 작가의 미술작품도 담기게 되었다.

 

 이곳에 박시인의 시 중에 한 구절을 소개하게 되어 매우 기쁘다.

 

말발굽 소리 멈춘 마을엔

말言을 잃은 철마가

백 량輛넘는 자식을 거느리고

철거덕 철거덕

속울음을 삼키며 지나가고

평생을 달리다

다리가 꺾인 채 주저앉은

이방의 노새 한 마리

낡은 안장 내려놓고

삐걱대는 편자를 벗는다

-「Mustang Park」의 일부

 

 위 시는 그녀의 시집 『말은 말을 삼키고 말은 말을 그리고』에 수록된 시 중에 그녀를 잘 나타내는 「Mustang Park」의 일부 이다. 그녀는 외롭고 지치고 서럽고 아프다. 그것은 아마도 고향을 떠나 살고 있는 많은 이민자들의 감정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여기에 누구보다도 예민하고 섬세한 시인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이 부분이 그녀가 시인으로서의 자리 외에도 더 많은 것에 귀 기울이고 또 반응하게 하는 것 같다. 그녀는 힘든 이민의 삶 속에서 자식을 키우고 아픔을 삭이며 쉴 새 없이 세월을 달려온 노새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지친 몸을 일으켜 터벅이며 자신이 선택한 길을 걸어내고 있는 것이다.

 

 젊은 세대는 손쉽게 말할 것이다. 과거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잊고, 지우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하지만 더 오래, 더 많이 반복되어진다고 해도 우린 귀 기울여 들어야 할 의무가 있다. 그 어두운 시간을 몸으로 지나온, 그래서 우리에게 지금의 시기를 만들어 준 그들의 권리인 것이다. 우린 그렇게 서로 의무와 권리를 충실히 지켜야 하는 것이다. 단 한명이라도 더 이 책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고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박인애 작가의 순수한 바람에 나 역시 바라본다. 또한 그녀의 노새같은 삶의 걸음이 조금은 가벼워지길 소망한다.

 

 

* 《쿨투라》 2019년 2월호(통권 56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