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 월평] 빙하의 죽음과 우리의 삶, 초록소 〈28조톤〉

2022-03-01     임수진(무용평론가)
ⓒ초록소

객석 안으로 관객들이 하나 둘 입장하는 동안 무대 한쪽에 설치되어 있는 천장 높이 길이의 차이니스폴Chinese Pole 위에 한 남자가 앉아 있다. 어깨를 늘어뜨린 채 무대 뒤쪽을 응시하며 한동안 그대로 앉아있던 그가 이내 상체를 아래로 떨구자 암전과 함께 공연이 시작된다.

초록소의 〈28조톤〉(1월 15일-16일,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은 2021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창작산실의 무용 부문에 선정되어 무용 작품으로 소개되지만, 그 뿌리는 거리예술에 두고 있다. 작품의 연출가 정성택은 서울거리예술창작센터의 거리예술전문가양성과정을 수료한 후 초록소를 창단, 그동안 거리를 중심으로 예술활동을 해왔다. 비록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공연된 무대예술이지만, 초록소의 〈28조톤〉에 갖게 되는 특별한 기대감은 바로 무대 예술에 국한되지 않은 탈양식화와 그에 따른 자유로운 상상력과 표현에 대한 것에 있다.

공연은 크게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뉘어 구성된다. 전반부는 인간의 일상을 기후 변화라는 심오한 주제와 연결시키는데 집중한다. 일곱 명의 무용수들과 일곱 대의 냉장고를 통해 이상 기후에 무관심한 현대인들의 일상을 이미지화한다. 평상복을 입은 무용수들의 무미건조한 걸음, 목적없이 수시로 여닫히는 냉장고의 문들로 상징되는 일상의 모습들은 물방울이 떨어지거나 얼음이 깨지고, 빙하가 갈라지는 듯한 효과음과 함께 무심한 일상이 파급하는 기후의 변화를 형상화한다. 무대 위의 유일한 소품인 냉장고는 계속해서 여러 구도로 재배치되고, 무용수들은 냉장고를 무대 장치 삼아 위에 올라서거나 미끄러지고 쓰러지며 ‘냉장고’라는 오브제로 상징되는 인간의 탐욕과 무관심, 그리고 기후변화에 따른 일상의 위기를 서로 연결시킨다. 잔잔한 일렉트로닉 음악과 미니멀적인 무대구성 및 다소 정적인 무용수들의 움직임들이 소극적으로 나열된다.

ⓒ박김형준
ⓒ박김형준
ⓒ박김형준
ⓒ박김형준

“1994년부터 지금까지 녹은 빙하 빙붕을 포함한 얼음의 총량”이라는 작품의 제목 〈28조톤〉이 주는 묵직함은 공연의 후반부에 본격적으로 실현된다. 뒷막이 오르며 무대가 확장되고, 거대한 집 모형의 장치가 공간을 채운다. 전반부에서는 거리예술을 기반으로 하는 이 단체의 장점이나 차별점이 크게 드러나지 않아 아쉬웠다면, 후반부의 확장된 공간에서 초록소의 매력이 보다 본격적으로 발견된다. 새하얀 집, 노을 색 조명의 배경, 까만 그림자 색으로 비춰지는 지붕 위에 오른 무용수들의 몸. 무대는 세 가지의 색으로 이미지화 되며 무대라는 제한된 공간을 남북극 빙하, 그리고 인간의 보금자리로 형상화한다. 지붕 위에 오른 무용수들은 지붕의 흰 비탈을 따라 계속해서 미끄러진다. 끊임없이 오르고 미끄러지는 무용수들은 빙하라는 보금자리를 잃은 남북극 동물, 그리고 동시에 그것이 초래하는 인간의 위기를 상상하게 한다.

거리를 매개로 하는 거리예술은 공간과 삶, 사회적 맥락 등을 성찰하게 한다. 열린 공간에서 탈양식화를 통해 이루어짐에 따라 예술적 장르의 경계와 형식 또한 모호해진다. 특히 무엇보다 관객과의 직접적인 소통을 통해 주제를 함께 공감하고 이를 통해 공동체 의식을 갖게 되는 것이 거리예술의 매력이라 할 수 있다. 초록소의 〈28조톤〉은 무대 안으로 들어오면서 단체가 지닌 정체성을 조금 변화시켰다. 거리예술과 달리 무대라는 제한된 공간인 만큼, 거리의 지형을 그대로 활용하는 것 대신 정돈된 극장 안의 준비된 무대 소품과 조명, 음악들로 구성되었다. 빙하의 거대함이 무대 위에서 형상화 되지 못한 점은 아쉽지만, 연출은 공연의 시작과 끝에 차이니즈 폴을 등장시켜 무대예술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작품은 전형적인 무대예술의 형식을 띄고 있지만, 주제를 표현하는 방식에서 차별점을 찾을 수 있다. LDP무용단을 기반으로 활동 중인 류진욱이 참여한 안무는 형식적이거나 표현적인 동작들보다는 마임적인 요소들이 주를 이뤘다. 특히 끊임없이 정상에 오르고 비탈에서 미끄러지는 장면은 마치 태양의 서커스Cirque du Soleil의 한장면을 보는 듯 서커스적인 이미지로 관객을 집중시키며 공연을 절정에 치닫게 했다. 연출 역시 주제에 관한 이야기를 구체적이고 다층적으로 풀어내기 보다 간결한 이미지와 사운드를 통해 상상의 여지를 남겨두며 관객들과 기후변화와 지구생명체의 위기에 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시간으로 공연을 이끌었다. 정성택 연출의 예술적 뿌리를 기반으로 거리예술과 무대예술의 특성들을 혼재한, 앞으로의 예술 활동들에 기대를 갖게 하는 무대였다.

공연의 마지막 홀로 남아 차이니즈 폴 위에 위태롭게 선 한 인간의 모습이 진한 여운을 남긴다. 지금, 여기, 일어나고 있는 이상기온과 빙하의 죽음은 우리 모두의 보금자리에 어떤 위기를 초래하게 될까.

 

 


임수진
성균관대학교 트랜스미디어연구소 선임연구원. 성균관대에서 예술학 박사, 뉴욕대(NYU)에서 공연학(Performance Studies) 석사 학위를 받았다.
무용월간지 《몸》 편집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무용 및 공연예술에 대해 연구하고 글을 쓰고 있다.

 

* 《쿨투라》 2022년 3월호(통권 93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