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Theme] 「소나기」와 첫사랑 : 한국문학 및 세계문학

2020-05-29     도윤정(인하대 교수)

  생텍쥐페리는 「어린왕자」를 제2차 세계대전으로 고통받고 있던 친구에게 헌정하였다. 잠시나마 순수했던 시절,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가 보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 위로가 되고 응원이 되었으면 한다.

  소년, 소녀를 만나다

  황순원의 「소나기」는 제목처럼 느닷없이 소년에게 다가온 첫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예기치 않은 순간, 그것이 무엇인지 정체를 채 알아채기 전에 몸을 흠뻑 적시고 떠나버리는 소나기는 참으로 첫사랑에 어울리는 상징이다.

  서울에서 온 소녀는 시골 소년 앞에 불쑥 등장해 그의 일상을 흔든다. 소녀가 개울 한가운데에서 물장난을 치는 바람에 소년은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영문도 모르고 놀림을 받고 부끄러움을 느끼며 징검다리를 건너다 실수를 하고 코피까지 쏟는다. 소년은 내가 왜 이러는 걸까 생각할 겨를도 없이 대담해지기도 한다. 가보지 않았던 산 너머를 향해 길을 나선다. 이웃집 호두를 몰래 따고 옴이 오를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호두를 맨손으로 깐다.

  소녀와 마주친 이후로 소년의 마음은 편할 날이 없다. 소녀가 잔잔한 개울물을 움켜쥐어 흔들었듯 소년의 마음도 뒤흔든다. 징검다리에 소녀가 나타나지 않자 소년은 원상태로 복귀하는 대신 왠지 허전함을 느끼며 소녀가 던지고 간 조약돌을 주무른다. “바보”하던 소녀의 외침을 환청으로 듣기도 하고, 칡넝쿨을 잡으며 소녀가 비탈길에서 미끄러져 다치자 죄책감도 느낀다. 소나기를 함께 맞은 후 며칠 만에 소녀를 만났을 때 가슴이 두근거리고 자신에게서 진흙물이 옮겨 묻었다는 소녀의 말에는 얼굴이 확 달아오른다. 소녀네의 이사 소식에, 소녀가 건넨 큼직한 대추의 단맛을 못 느낀다. 이사가기 전에 한 번 만나자는 말을 하지 못했음을 깨닫고 스스로를 바보 같은 것이라고 자책한다. 소녀네의 이삿날을 앞두고, 가서 보나, 마나 번민에 휩싸이기도 한다. 이렇게 증폭된 감정의 동요는 작품 맨 끝 소녀의 죽음과 죽음 전 소녀의 소망을 스치듯 듣게 되었을 때 최고조에 달했을 것이다. 부모님의 대화로 작품은 끝이 나기에 소년의 마음이 어땠을지 상상하는 것은 독자의 몫으로 남는다. 소년에게 첫사랑은 무엇이었을까?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하나의 사건, 뭔가를 열심히 하기는 했는데 결국은 허둥대기만 했던 것 같은, 그래도 소녀에게 무언가는 해 줄 수 있었던, 그래서 몇 번이고 들춰 보고 되돌아가고 싶은 추억이었을까?

  하늘의 별이 내 옆에 내려오다

  알퐁스 도데의 단편 「별」은 갓 스물이 된 목동의 첫사랑 이야기이다. 마을에서 떨어진 산속에서 지내는 목동에게 유일한 낙은 보름마다 먹을 것을 날라다 주는 꼬마나 아주머니에게 마을의 소식을 전해 듣는 것인데, 그중에서도 주인집 아가씨 스테파네트의 소식은 그에게 초미의 관심사였다. 비록 가까이에서 본 적이 없었지만 아가씨는 그가 아는 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하인들에게 모두 사정이 생겨 아가씨가 직접 식량을 갖고 목동을 찾아오는 사건이 발생한다.

  소년처럼 목동도 아가씨의 등장에 당황하고 가슴이 떨려 이런저런 질문에 제대로 답도 못한 채 되돌아가는 아가씨의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한다. 아가씨와 함께 돌아가는 노새의 발굽에 “구르는 자갈돌 하나하나가 목동의 가슴에 툭툭 떨어”지고 그 소리가 귀에 오래 남아 있어 저녁이 될 때까지 꼼짝을 못 하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하지만, 목동에게는 또 한번의 기회가 찾아온다. 낮에 내렸던 비에 불어난 강물을 건너지 못해 아가씨가 목동의 거처로 되돌아온 것이다. 어느새 밤이 된 탓에 아가씨는 낮의 생기를 잃고 두려움과 추위에 떨고 있었는데, 소년이 꽃을 꺾어 소녀에게 선사하고 수숫단을 세워 비를 덜 맞게 소녀를 보호하고 소녀를 업고 불어 넘친 개울물을 건네주었듯, 목동도 능숙하게 모닥불을 피워 아가씨의 몸을 데우고 안락한 잠자리를 마련해 주고 자신은 밖에서 지킨다. 뒤척이다 밖으로 나온 아가씨가 잠들 때까지 하늘의 별을 함께 보며 별자리 얘기, 하늘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인간의 소리라곤 목동과 아가씨의 목소리뿐, 사방이 자연의 소리로 가득찬 그곳에서 아가씨가 어느덧 목동의 어깨에 고개를 떨구며 잠에 빠져드는 그 신비와 황홀의 절정에서 이야기는 끝이 난다. 화자인 목동은 바로 그 마술의 순간에 이 이야기를 끝내고 싶었으리라 .

  누군가를 진실로 만난다는 것

  「어린왕자」는 앞의 두 작품과는 달리 명시적으로 첫사랑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는 않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이 작품을 이끌어가는, 사막에 불시착한 비행사와 지구에 불시착한 어린왕자의 사귐은 첫사랑만큼 강렬하고 신비롭다.

  비행사는 어린 시절 두 장의 그림을 그려 사람들과의 소통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일을 계기로 홀로지내왔다. 고장난 비행기를 수리하다 잠이 든 그를 양 한 마리를 그려달라는 목소리가 깨운다. 그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만남은 호기심과 갈등과 사과와 이해와 이별과 진한 그리움으로 채워지기에 사랑의 과정과 겹쳐진다.

  둘이 만난 지 닷새째 되던 날, 비행사는 마실 물이 얼마 안 남은 급박한 상황에서 엔진 수리에 몰두하고 있었는데 어린왕자는 양이 꽃을 먹어치우는지, 장미의 가시가 아무 소용이 없는지를 끊임없이 물으며 작업을 방해한다. 급기야 비행사는 화가 나서 아무 대답이나 해 버리곤 지금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고 소리친다. 어린왕자는 자신의 질문이 왜 더 중요한지를 설명하고 흐느껴 운다. “수천만 개나 되는 별중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꽃을 사랑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바로 그 별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행복해질 수 있”다고, 그렇지만 양이 그 꽃을 먹어치우면 그 모든 별들이 다 꺼져버리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그제서야 비행사는 자신이 마음을 닫아 버렸던 여느 어른처럼 어린왕자를 대하고 있었음을 깨닫고 어린왕자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모르는 자신의 서투름을 사무치게 느낀다. 한 존재가 세상 전체가되어 버리는 일, 비행사는 어린왕자를 통해 처음으로 사랑을 배운다.

  「소나기」에서 이별은 금방 지나가는 예고편처럼 전해진다. 「별」에서 이별은 일부러 쓰지 않은 페이지 속에 있다. 「어린왕자」에서 이별은 길게 꼬리를 남기는 유성 같다.

“슬픔이 가시고 나면(슬픔이란 늘가시게 마련이니까) 아저씬 나를 알게 된 것을 기뻐하게 될 거야. 아저씨는 언제까지 나하고 친구로 있을 거고, 나와 함께 웃고 싶어질 거야. 그리고 가끔 그냥 괜히 창문을 열겠지. […] 그렇게 되면 나는 마치 별이 아니라 웃을 줄 아는 조그만 방울들을 아저씨한테 잔뜩 준 것이나 마찬가지가 될 거야.”

  첫사랑이란 대개 미완성으로 남는다고 한다. 갑자기 내 앞에 등장했던 대상은 또 갑자기 사라진다. 그래서 첫사랑은 유난히 헤어진 뒤가 길다. 어떤 목적도 없이 상대를 향하는 마음, 처음이기에 더 순수한 그 열정이 몇 번이고 되돌아보게 한다.

 

 

* 《쿨투라》 2020년 6월호(통권 72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