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춘화추실春花秋實: 난정 어효선 선생을 그리며
[에세이] 춘화추실春花秋實: 난정 어효선 선생을 그리며
  • 손정순 시인, 발행인
  • 승인 2023.05.02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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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정蘭丁 어효선, <춘화추실春花秋實>(1989), 가로67cmⅹ세로27cm

우리 집 거실에는 난정蘭丁 어효선 선생의 〈춘화추실春花秋實〉이라는 문인화 한 점이 걸려 있다. “젊어서 꽃을 피우고 늙어 열매를 맺는다”는 이 그림은 1989년 정초, 다시 공부를 시작한 내게 새해 덕담으로 그려준 것이어서 의미가 깊다.

동요 〈꽃밭에서〉의 작사가로도 유명한 선생께서는 저 그림처럼 살다 가셨다. 젊어서는 많은 동요와 동시· 동화로 어린이들에게 꿈을 주었으니 아동문학가로서 꽃을 피웠고, 예순이 지나서는 소장하셨던 모든 책을 춘천교대에 기증하여 ‘난정문고’를 설립, 후대 아동문학 연구에 도움이 될 자료로 남겼으니 또한 향기 나는 열매를 맺었다고 할 수 있다. 정직과 성실을 신조로 무척 검소하셨던 그분과의 인연은 내 인생에서 큰 가르침이 되었다.

1988년, 들끓던 민주화의 물결 속에 나는 대학을 포기하고 출판사를 찾았다. 적성에 맞지 않았던 학과 탓이기도 했지만 그 시절의 방황이 견디기 힘들었고, 또 글을 쓰고 싶다는 막연한 소망 하나로 교학사의 문을 두드렸다. “작가가 되고 싶습니다. 월급은 안 주셔도 됩니다. 출판 일만 배우게 해주세요.” 열아홉 살의 당돌한 젊은이에게 교학사 사장은 망설이다 주간이신 난정 선생과 면접을 보게 해주셨다. 학력도 아무런 경력도 없었지만 두 분의 배려로 나는 짧게나마 내 인생의 첫 직장을 교학사에서 시작할 수 있었다.

첫 출근을 했을 때 “기본 교정은 볼 수 있겠지? 여기 새 맞춤법이 있으니 일주일 안에 공부를 끝내도록!” 그분은 짧게 말씀하셨다.(당시 한글 맞춤법 개정안이 제정되어 출판부에서는 변경된 새국어사전 편찬을 맡고 있었다.) 나는 복사된 새 맞춤법을 받아들고 죽 훑어보았다. 별로 어렵게 생각되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출근한 지 일주일 만에 일어났다. 시험을 보는 것이었다.

당황스러웠다. 얼렁뚱땅, 대충이라는 말은 그분께 먹히지 않았다. 나는 50문항 중 3문제를 놓쳤다. 내 답안지를 보고는 크게 노하셨고 급기야는 시험지를 구겨서 휴지통에 던져버리셨다. 나아가 선배 직원들은 후배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않았다고 혼쭐이 났다. 얼마나 부끄럽고 민망했는지. 나는 그때 일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그 후 선배들은 내게 오랜 출판의 노하우를 하나씩 가르쳐 주었다. 선생께서는 일부러 선배들을 혼내신 것이었다. 어쩌면 나의 부족한 부분을 선배들이 잘 교육해주었으면 하는 작은 배려였을 것이다.)

선생께서는 “책 만드는 일이란 단순한 장사치의 그것과 다르고 한 시대의 정신사를 일깨우며, 인류문화의 정신적 보고寶庫를 소중하게 채우는 일”이라고 늘말씀하셨다.

난정蘭丁 어효선, 〈문방청공文房淸供〉(1988), 가로116cmⅹ세로24cm

종이 한 장도 아껴 쓰셨고 우편물 봉투도 꼭 재활용하셨던 선생님은 검소함이 몸에 배어 있었다. 청빈하셨지만, 멋을 아셨고,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으셨다. 1시간 일찍 출근하셔서 신문을 보면서 차를 끓여 마시고, 클래식 음악을 들으셨다. 어디다 시선을 둘지 몰라 신문을 끄적거리는 나에게 선생께서는 “신문을 보면서 모르는 어휘나 한자가 있으면 그냥 넘어가지 말고 꼭 표시하여 선배나 내게 바로바로 물어보라”고 하셨다.

다음날부터는 아침 일찍 조간을 사들고 출근했다. 교정을 보듯 신문에다 빨간펜으로 내가 모르는 단어와 한자어에 동그라미를 쳤다. 신문이 순식간에 시뻘개졌다. 그러나 날이 지날수록 붉은 동그라미는 조금씩 줄어들었다. 고백컨대 나는 한자를 신문으로 배웠다. 아니 어 선생님께 배웠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아는 모든 어휘는 새국어사전 교정을 보면서 배웠다. 소설책도 아닌 국어사전을 몇 차례 정독하는 일은 내 인생에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89년 다시 대학생이 되어 교양국어 시간에 내가 교정본 새국어사전으로 새롭게 개정된 맞춤법을 배울 때 난 정말 말할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

나는 어 선생님 곁에서 문학과 예술을 어렴풋이 만날 수 있었다. 선생께서는 직접 문인화도 그리셨고, 문학인은 물론 김복태, 김천정, 이우경 화백 등 많은 화가들과 교류하며 『한국전래동화』 전집을 만드셨다. 선생님을 따라 전시회를 다니다보니 미술품을 소장하고 싶은 욕구가 생겨 그때부터 좋아하는 소품들을 구매하기 시작했으며, 음악 하는 친구의 연주로 선생님의 동요곡을 녹음하여 테이프로 만들기도 했다.

선생과의 인연은 내가 교학사를 그만두고도 계속 이어졌다. 대학졸업을 앞둔 학기에는 윤석중 선생께서 발행하는 《새싹》 잡지사에 나를 추천해주셨고, 출판사를 시작했을 때는 노구를 이끌고 몸소 출판사를 방문하여 격려해주셨다.

평생 교육자와 아동문학가의 길을 걸으며 350여 편의 동시를 남긴 난정 어효선 선생은 2004년 5월 15일 영면했다.(시신은 유언대로 한양대에 기증하였다.)

어린이의 달 5월이 오면 나비넥타이를 맨 동화할아버지 어효선 선생님이 생각난다. 30년 이상 출판 일을 해오고 있지만 지금도 그분의 꾸중이 그립다. 과연 나는 선생의 덕담처럼 살아가고 있을까? 한 권의 책을 출간할 때마다 그 분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난정 어효선
난정 어효선

난정 어효선 선생은 1949년 동요 〈어린이의 노래〉와 동시 「봄날」로 문단에 데뷔한 뒤, 1961년 첫 동시집 『비 오는 소리』를 출간하였다. 이후 평생을 자연의 아름다움과 어린이들의 순수한 마음을 담아 낸 동시·동요의 창작·보급과 한국의 아동문학사를 정리하는 데 힘을 쏟았다. 대표작으로는 동요 〈파란 마음 하얀 마음〉 〈과꽃〉 〈꽃밭에서〉 등이 있고, 동시집 『인형 아기잠』(1977) 『고 쪼끄만 꽃씨 속에』(1979) 『아기 숟가락』, 동화집 『도깨비 나오는 집』(1975) 『인형의 눈물』(1976) 『종소리』(1978) 등을 출간하였다.

 

 

 


 

 

* 《쿨투라》 2023년 5월호(통권 107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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