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영화] 이란영화는 어떻게 성공했는가?
[이란영화] 이란영화는 어떻게 성공했는가?
  • Riza Oylum(영화평론가, 우슈타르대학교 영화 및 텔레비전학과)
  • 승인 2023.05.02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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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영웅〉

오늘날 가장 인기 있는 내셔널 시네마 중 하나는 이란영화이다. 이슬람 율법의 지배하에 정부가 사회 문제에 깊숙히 개입하고, 서구의 이데올로기가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란에서 어떻게 서양 예술 형식인 영화가 이러한 명성을 얻게 된 것일까? 그리고 황금종려상과 아카데미를 석권한 이란감독들의 성공 비결은 무엇일까? 이 글에서는 이란영화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와 함께 그 인기 요인을 살펴보려고 한다. 아스가르 파르하디 감독의 〈어떤 영웅A Hero〉이 한국에서 개봉한 지금, 이란영화를 한번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역사적 관점

이란영화는 1979년 이란혁명 이전과 이후로 시기를 구분할 수 있다. 영화가 천대받던 이란혁명 이전 시기에는 두 가지 중요한 영화운동이 펼쳐진다. 하나는 인도와 이집트 등의 외국 상업영화를 모방해 인기를 끈 필름 파르시Film Farsi이고 다른 하나는 1960년 이후에 데뷔한 감독들이 정부 지원 없이 영화를 만들어 대중적으로 성공한 이란 뉴웨이브다. 두 운동은 모두 사랑, 멜로드라마, 뮤지컬, 소외계층의 투쟁을 다루었다. 필름 파르시의 기본 토대는 신체를 드러낸 채 춤추고 노래하는 여성과 끊임없이 투쟁하는 남성의 모습이다. 이게 쌓여 강력했던 팔라비 왕조를 무너뜨렸고 보수적인 이란 사회가 영화관에 불을 지르게 만들었다. 그렇게 수많은 영화관이 혁명을 거치며 파괴되었다. 이 때문에 이란의 혁명 지도자였던 루홀라 호메이니는 “우리는 영화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가 사용되는 방식에 반대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택시〉

혁명 이후의 이란영화

2019년 혁명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테헤란에서 열린 파즈르영화제에 초청받았다. 그해 튀르키예에서 이란영화에 관한 책을 출간했는데, 영화제측에서 지난 40년간의 이란영화의 발전을 주제로 하는 컨퍼런스에 참여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지난 40년을 돌아보면, 아무래도 가장 중요한 발전은 토론할 수 있는 영화관이 설립된 점이다.

이란영화가 처음부터 인기를 끈 것은 아니다. 혁명 직후는 격동의 시기였다. 혁명이 끝나자 독재자 사담 후세인이 이끌던 이라크는 이란에 선전포고를한다.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빠르게 승리할 것으로 예상한 후세인의 기대와 달리 전쟁은 8년 동안 지속된다. 뚜렷한 승패가 갈리지 않은 이 전쟁은 두 나라 모두에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 이러한 전쟁의 혼란 중에 새로운 영화기관들이 설립된다. 혁명을 거치며 이란에서는 영화에 대한 체계적인 투자가 이루어졌고, 영화 제작을 장려했다. 이 기간 동안에는 반제국주의적 영화만 해외에서 수입되었고, 미국 영화 수입은 중단되었다. 자국영화 지원을 위해 1984년 설립된 Farabi Cinema Foundation을 통해 국가에서 카메라와 조명 등의 필수 장비를 제공해 주었다. 이 무렵에 나온 영화들은 ‘이란영화’라는 정체성을 확립해 가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영화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얼마 후 사람과 사회의 일상을 묘사한 작품으로 이란영화는 성공을 거두기 시작한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혁명 이후의 초기 성공: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과 〈달리는 아이들〉

1980년대에 처음으로 국제적 성공을 거둔 대작은 아미르 나데리 감독의 〈달리는 아이들〉(1984)이다. 무지한 노숙자 청년의 이야기를 그린 이 영화는 분명 사회비판적이다. 이 영화의 성공 요인은 보편적인 주제 의식에 있었다. 그리고 1980년대 후반을 대표하는 작품으로는 이란영화 전체에서 가장 유명한 영화 중 하나인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가 있다. 키아로스타미의 지그재그 3부작 중 첫 번째 작품인 이 영화는 로카르노영화제에서 수상하며 유명세를 얻는다. 이후 1990년대를 거치며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락샨 바니 에테마드, 모흐센 마흐말바프, 자파르 파나히, 마지드 마지디, 아스가르 파르하디 등은 이란영화를 전 세계에 알렸다.

〈오프사이드〉

1990년대 칸영화제에서의 성공

다리우스 메흐르지의 〈소〉(1969)는 이란영화 최초로 전 세계 무대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사랑하는 소를 빼앗기고 외양간에서 살게 된 마을 주민이 소처럼 행동하기 시작하는 이야기로 베니스영화제에서 비평가상을 받았다.

이러한 성과를 거둔 뒤 거의 30년이 지나고서 이란영화는 다시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상을 받는다. 1997년 칸영화제에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체리향기〉가 황금종려상을 받는다. 자살을 생각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 〈체리향기〉는 도덕성, 자살할 권리, 연민에 대한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이란영화에 대한 투자 수익은 이 무렵부터 구체화되기 시작했고, 다른 이란감독들 또한 전 세계의 국제영화제에서 명성을 쌓기 시작한다.

이란을 대표하는 여성감독 락샨 바니 에테마드는 여성 캐릭터, 소외계층, 노동자를 강조하는 독보적인 스타일을 자랑한다. 1995년 테살로니키영화제에서 수상한 〈블루 베일드〉는 상업적인 면에서 그의 첫 해외 성공작이었다.

혁명 이후 가장 국제적으로 부상한 감독은 모흐센 마흐말바프이다. 커리어 초반에 조악한 이슬람영화만 만들던 그는 1987년 영화 〈싸이클리스트〉를 내놓으며 처음으로 상업적으로 성공한다. 이 영화는 아프가니스탄 난민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1995년에는 영화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허구와 진실이 뒤섞인 영화 〈살람 시네마〉를 만들어 뮌헨영화제에서 최우수영화상을 받는다. 또 다른 작품 〈가베〉(1997)는 이란에서 유목 생활을 이어가는 카슈카이 투르크족의 삶의 방식을 동화 같은 스토리라인으로 묘사했다. 〈가베〉는 칸영화제 등 50개 이상의 이란 밖 영화제에서 상영되었고, 아카데미상 이란 후보작에 오르기도 했다.

재밌는건 모흐센 마흐말바프가 집에서 아내와 아이들에게 영화를 가르치기도 했다는 점이다. 그는 1990년대 후반에 자신의 집을 마흐말바프필름하우스로 개조하여 아카데미로 활용했는데, 여기서 공부한 그의 아들 하이삼, 딸 사미라와 한나, 아내 마르지메쉬키니는 모두 영화감독이 되었다. 모흐센 마흐말바프는 해외에 거주하며 더 이상 이전처럼 왕성하게 활동하진 않지만, 90년대 이후 가장 중요한 영화감독 중 한 명이다.

1959년에 태어난 마지드 마지디는 이란혁명 이후 영화계에 등장한 감독 중 한 명이다. 그에게 명성을 안긴 〈천국의 아이들〉(1997)은 오스카상 후보에 오른 최초의 이란영화이고, 맹인 소년의 삶을 묘사한 〈천국의 미소〉(1999)는 미국에서 가장 많이 본 외국영화 중 하나이다. 마지디는 〈참새들의 합창〉, 〈바란〉, 〈무하마드: 신의 예언자〉, 〈태양의 아이들〉 등을 통해 경력을 계속 이어가며 이슬람 신념을 홍보하는 데 영화라는 매체를 사용하겠다고 선언한다.

1960년생인 자파르 파나히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조감독 출신으로, 그의 데뷔작 〈하얀 풍선〉의 각본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맡았다. 그해 칸영화제에서 〈하얀 풍선〉은 신인 감독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영예인 최고상인 황금카메라상의 영예를 안았다. 〈거울〉(1997)은 베니스영화제와 이스탄불영화제에서 각각 심사위원 특별상과 황금 튤립상을 받았고, 2000년에 만든 영화 〈써클〉은 제57회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또한, 축구장에서 여성을 배제하는 문제를 다룬 〈오프사이드〉(2006)로 베를린영화제에서 은곰상을 받는데, 이후 그는 정치적 이유로 영화 제작을 금지당한다. 그래서 그는 택시 운전사로 분해 핸드헬드 카메라를 사용하며 〈택시〉(2015)를 만들었고, 베를린은 이 작품에 최고상인 황금곰상을 수여한다. 최근 다시 한 번 수감된 자파르 파나히는 1월에 석방되었다.

도시화된 이란영화, 아스가르 파르하디의 오스카 수상

2004년 〈아름다운 도시〉, 2006년 〈불꽃놀이〉를 연출한 아스가르 파르하디는 2003년 첫 영화 〈사막의 춤〉으로 데뷔했다. 2009년 〈어바웃 엘리〉로 베를린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았고,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2011)로 황금곰상과 이란 최초의 오스카상을 동시에 들어 올리는 영예를 안았다. 그리고 〈세일즈맨〉(2016)은 그에게 두 번째 아카데미 국제영화상을 안겼다. 파르하디 영화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작품에서 계급 간의 갈등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점이다. 파르하디 이전의 이란영화는 계급적 구분이 드러나지 않았고, 이는 의도적이었다. 개인적으로 아스가르 파르하디의 성공은 이란영화에 있어 가장 큰 변화의 시작을 알렸다고 생각한다. 그의 대도시적인 캐릭터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를 기반으로 한 컨트리 영화 장르를 버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한때 유행했던 어린이가 등장하는 영화도 더는 흔치 않게 되었다. 파르하디의 영향을 받은 젊은 영화 제작자들은 결혼 문제, 남녀 관계, 도시의 젊은 가족들이 직면한 문제를 다룬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반복되는 주제

이란감독들이 도시 생활 문제에 초점을 맞춘 프로젝트를 제작하기 시작하면서 영화가 다루는 범위가 크게 넓어졌다. 일자리를 찾아 해외로 나가려는 젊은이들이 겪는 어려움, 의료 및 보험 시스템 문제, 낙태 금지, 약물 오남용과 마약 거래로 인한 폐해 등이 최근 몇 년 동안 영화에서 광범위하게 다뤄졌다. 이란영화에서 처벌로써의 사형 제도의 폐해를 다룬 작품도 꽤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란감독들이 사형을 주제로 한 다양한 시나리오를 쓰면서, 죄수, 재판, 판사, 판결 자체 등 다양한 관점에서 주제의식을 발전시키고 있다.

〈동물〉

단편영화의 토대 위에 성장하는 이란영화계

이란에는 큰 규모에도 불구하고 잘 알려지지 않은 단편 영화 산업이 있다. 이란 청소년들에게 단편영화를 제작하는 것은 예술가로서 그들의 삶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영화는 주로 검열로 인해 국가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이곳을 떠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묘사하고 있으며, 청년 세대의 경제적 어려움을 표현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자연스럽게 국제영화제에 이란 지원자들이 늘어났는데, 단편영화의 인기와 발전에 가장 크게 기여를 한 단체는 의심할 여지 없이 이란청소년영화협회IYCS이다. 약 40년 전에 활동을 시작하여 현재 이란 내 66개의 지부를 두고 있는 이란청소년영화협회는 세 가지 중요한 활동을 하고 있다. 1년간의 속성 영화교육을 진행하고, 핵심적인 필수 촬영 기회를 제공하며, 단편 영화를 배급한다. 이란청소년영화협회가 주관하는 테헤란국제단편영화제는 매년 10월에 열리며 전국에서 6,000여 명의 지원자가 몰리고 있다.

2018년에는 아르다빌 주 메쉬긴샤르에서 열린 지역 단편영화제에 참가했다. 그해의 영화제는 무려 61번째였고, 여기서 이란의 단편영화 시스템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매년 이란에서는 주제와 스타일이 다양한 2,000여 편의 픽션,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 단편영화가 만들어진다. 내가 수집한 데이터를 보면, 2017년 총 1,967개의 국제영화제에 약 600편의 이란영화가 출품되었다. 이중 375편이 수상했고, 128편이 후보에 올랐다. 이해 칸영화제 시네파운데이션 섹션에서는 626개 학교의 경쟁이 벌어졌는데, 이란청소년영화협회를 대표하여 출품한 아크형제의 〈동물〉이 2위를 차지했다.

이란에서 장편 영화를 제작하려면 상당한 행정절차를 거쳐야 한다. 영화 제작과 상영 모두 승인이 필요하다. 하지만 단편영화는 좀 더 자유롭다. 단편 영화는 극장에서 상영되지 않기 때문에 절차가 훨씬 간단하다. 그리고 많은 감독 지망생들은 단편 영화를 통해 국내외를 여행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도 한다. 해외로 여행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 중 하나는 단편영화로 수상하는 것이다. 국가 차원의 협회를 통한 적극적 지원과 영화를 삶과 자기 표현 도구로 보는 청년들의 인식, 기술 발전으로 인한 접근성 향상 덕분에 단편영화 문화는 이란영화와 불가분의 관계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후에 장편영화로 넘어가는 이란감독들의 우수한 초기작을 주기적으로 볼 수 있다.

 

 


Riza Oylum 1984년 이스탄불 출생. 이스탄불쿨투르대학교 터키어문학부에서 학사 학위를, 트라키아대학교 터키어문학부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극동영화, 러시아영화, 독일영화, 중동영화, 세계 감독의 영화 수업 및 이란영화에 관한 저서 집필하였으며, 국내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큐레이터, 출판편집자로 활동했다. SIYAD(터키영화평론가협회-FIPRESCI Turkey), FEDEORA(유럽및지중해영화평론가연맹), PEN-Turkey의 회원이며, 현재 우슈타르대학교의 연구자이자 Gazete Duvar의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번역 설재원 에디터

 

* 《쿨투라》 2023년 5월호(통권 107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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