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호와 청년문화] 최인호라는 청년의 시간
[최인호와 청년문화] 최인호라는 청년의 시간
  • 이광호(문학평론가)
  • 승인 2023.09.01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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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호가 「청년문화선언」(한국일보, 4. 24)을 발표한 것은 스물아홉의 나이였다. 최인호는 낡은 시대는 가고 청년들의 시대가 온다는 내용의 글을 한국일보에 보냈고 신문사는 그 글에 ‘청년문화선언’이라는 제목을 단다. 최인호는 문화가 선택된 개념이 아니라 생활 그 자체이며, 청년문화는 침묵의 다수 위로 올라가는 상향식 문화라고 설명한다. 기성 지식인들이 청년문화를 엘리트주의적인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고고춤과 통기타 그리고 장발과 미니스커트 같은 새로운 스타일을 문화수용자의 관점에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최인호는 ‘고전, 권위, 위선, 남녀차별’을 인정하지 않는 청년문화의 태동기가 시작되었다고 쓴다. 이보다 먼저 청년문화에 역사적 맥락을 부여하고 ‘청년문화 논쟁’을 촉발시킨 것은 동아일보 기자 김병익이었다. 김병익은 「오늘 날의 젊은 우상들」(동아일보, 1974. 3. 29.) 이라는 글에서 블루진과 통기타, 생맥주와 포크송 같은 당대 젊은이들의 문화적 풍속을 다루면서 최인호, 이장희, 양희은, 김민기 등을 청년문화의 기수로 소개하였다. 더 나아가 청년문화은 3·1 운동과 광주학생 운동, 4·19와 6·3 시위로 이어온 청년문화 운동이 ‘70년대에 착용한 새로운 의상’이라고 적극성을 부여한다. 젊은이들의 감각과 표현을 퇴폐로 규정하는 것은 위선적이고 획일주의적인 색안경 때문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오늘 날의 젊은 우상들」(동아일보, 1974. 3. 29.)

최인호와 김병익에 의해 적극적으로 주창된 청년문화의 가능성은 1970년대라는 역사적 상황에서는 다수의 지지를 받는 것은 아니었다. ‘청년문화 논쟁’은 뜨거워졌지만 논쟁의 구도에서 청년문화의 의미는 대학생과 지식인들에게 적극적인 지지를 받지 못했다. 최인호와 김병익 등의 주장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논의들은 대부분 ‘딴따라패’와 같은 퇴폐적인 소비문화가 청년문화를 대변할 수 없으며, 이것은 젊은 세대의 건강성을 오도하고 말초적인 신경을 자극하는 대중매체의 선정적인 호명 방식이라고 비판한다. 지식인 엘리트들은 새로운 청년문화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청년문화가 서양 유스 컬처의 표피적인 복제와 맹목적인 모방에 그치고 있으며, 매스 미디어의 선정주의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와 같은 비판에는 1970년대 유신시대라는 역사적 특수성이 자리 잡고 있다. 유신시대는 강제된 산업근대화를 국가과제로 삼고 민주주의에 대한 탄압과 노동자들의 희생에 의해 지탱되었다. 청년문화 비판은 통기타와 청바지의 스타일에서 유신 시대의 폭압에 대한 뚜렷한 저항의 정신을 찾기 힘들다는 논리에 연유한다. 여기에는 사회적 저항이 민족주의적인 것이었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고,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비판의 구조는 유신체제를 유지하는 지배 권력의 담론과 거리가 멀지 않았다. 젊은이들의 새로운 문화양식을 퇴폐로 규정하는 것은 유신 시대의 지배세력이 주도한 것이기도 했다. 지배 권력은 ‘사회정화’라는 슬로건 아래 장발과 미니스커트를 단속하는 것을 저질 퇴폐문화를 봉쇄하는 것으로 선전했고, 조국 근대화와 민족 중흥을 위해 청년들은 향락과 탈선에 빠져서는 안되는다는 것은 통치 담론의 논리였다. ‘민족 문화’와 ‘민족 주체성’을 강조했고, 청년문화의 타락은 사회의 건전한 재생산을 위해 선도되어야 할 대상이었다. 유신을 비판하는 엘리트 지식인과 ‘국민총화’를 주창하는 지배 권력 모두 청년문화의 스타일을 부정하는 상황은 민족주의적 엄숙주의에 바탕한 70년대의 억압적인 두 측면이다.

〈별들의 고향〉 스틸컷

중요한 것은 1970년대의 청년문화와 이와 연관된 문화적 텍스트들은 새로운 세대가 향유하기 시작한 취향과 스타일과 감수성을 반영한 문화적 기호들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유신체제에 대한 목적의식이 뚜렷한 저항의 표지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지배 이데올로기가 감당할 수 없는 새로운 욕망과 문화적 구별 짓기를 드러내는 장소였다. 청년문화는 1970년대의 문화적 통치성을 거부하고 그 안에 균열을 만드는 새로운 삶의 스타일과 그를 둘러싼 불온한 욕망의 지점을 드러내고 있었다. 새로운 문화적 스타일은 단지 소비의 문제가 아니라 일상 공간에서의 심미적 실천이며, 다른 사회적 의사소통의 방식이고 신체적 자기발견의 형식이다. 청년문화의 스타일은 주류 문화 내부에서 작동하는 상징질서를 교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신체제와 그 비판자들 모두에게 이 새로운 스타일의 욕망은 불온하고 위험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청년문화의 상징으로서의 최인호의 위치는 그가 다만 ‘청년문화’를 주장했다는 데 머물지 않는다. 그는 스스로 그 청년문화의 심벌이 되었으며, 그의 소설들과 <별들의 고향>을 비롯한 문화적 텍스트들은 그 청년문화 내부의 심층적인 욕망이 무엇인가를 드러내주고 있다. 최인호의 소설 「술꾼」에는 아버지를 찾는다는 핑계로 여러 술집을 전전하며 공짜 술을 얻어 먹고 취하는 아이가 등장한다. 사실은 고아원에 머물고 있는 아이는 어머니가 죽어가고 있어서 아버지를 찾아다니고 있다는 거짓말로 어른들을 속이고 술을 얻어 먹는다. 아이에게 아버지는 부재하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술을 향한 욕망을 위해 이용되는 ‘가짜 가족 이야기’의 일부일 뿐이다. 감각적인 문체를 보여주는 이 소설의 후반부에서 아비 찾기가 아니라 술 자체가 만취한 아이의 목적이 되어 버린다. 이 ‘아버지-어른-기성 세대’를 향한 불온한 욕망은 기성세대가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새로운 욕망의 징후이기도 했다.

별들의 고향과 최인호 (조선일보, 1978. 2. 15)

새로운 세대의 소비 문화를 미성숙하고 불온하고 퇴폐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세대를 통해 반복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문화적 스타일은 기성의 질서에 균열을 가하고 그 균열 사이에서 다른 삶의 시간이 시작된다. 청년문화는 언제나 징후적인 시간으로서의 지배적인 담론과 이념에 대해 파괴력을 갖는다. 물론 거기에는 문화자본의 논리가 만들어내는 대중소비사회의 시스템이 작동한다. 1990년대 이후의 대중문화는 대규모 문화산업의 형태를 띠기 시작한다. 이를테면 가장 최근의 청년문화의 일부인 ‘아이돌 문화’는 기성의 질서에 대한 저항적인 의미보다는 거대 자본이 만들어내는 기획된 상품으로서 기능하고, K-팝이라는 이름의 경쟁력있는 국가적인 문화상품으로 인정된다. 이 경우에도 K-팝을 향유하는 글로벌한 청년문화는 인터넷과 디지털 환경을 통해 문화를 소비하는 방식 자체를 혁명적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것을 부정하기 힘들다.

〈별들의 고향〉 스틸컷

또한 여전히 거대 자본의 생산 시스템과 관계없는 지점에서 새로운 문화적 스타일을 만드는 청년들의 예술적 욕망은 멈추지 않는다. 이를테면 독립영화와 문학, 그리고 인디음악 등의 영역에서 청년문화는 여전히 지배적인 문화와는 다른 시간을 살고 있으며, 페미니즘 리부트 같은 사회적 움직임 역시 남성 중심의 상징질서를 파열시키는 청년문화의 에너지라고 볼 수 있다. 제도화된 주류문화와 지배적 이데올로기로부터 이탈하려는 문화적 욕망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살아 움직인다. 부모 문화의 평균적이고 획일적인 문화에 대한 반역의 움직임은 동시대 문화의 불온성으로 남아있다. 그 불온성이 거대 문화산업에 의해 배제 혹은 포섭될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지배적인 상징질서를 교란하는 예측할 수 없는 청년문화의 에너지는 문화를 역동적으로 만든다. 최인호라는 이름은 50년이 지난 지금에도 청년의 스타일로 남아있으며, 청년문화는 ‘다른 미래’를 사는 방식이다. 최인호는 그 규정할
수 없는 시간의 이름이며, 최인호라는 청년의 시간은 그렇게 지속된다.

 

 


이광호 198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서울예술대학교 교수를 거쳐, 현재 문학과지성사 대표. 저서로 『익명의 사랑』 『시선의 문학사』 『너는 우연한 고양이』 등이 있음.

 

 

 

* 《쿨투라》 2023년 9월호(통권 11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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