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호와 청년문화] 한국 대중 서사의 원형, 최인호
[최인호와 청년문화] 한국 대중 서사의 원형, 최인호
  • 강유정(영화평론가, 강남대 교수)
  • 승인 2023.09.01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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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들의 행진〉 스틸컷

최인호는 전설이다. 사실 최인호는 이미 전설이었다. 10대 시절 신춘문예에 입선했던 최인호는 문학사에 새로운 감수성을 선사했다. 최인호, 하면 신문연재 소설과 영화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는 역사 속 추억의 단어가 된 신문연재 소설이지만 최인호 소설이 가진 힘은 폭발력 외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1972년 당시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던 소설 『별들의 고향』은 연재와 함께 신문 정기 구독자 수를 3배 이상 늘렸다. 신문을 보다 소설을 읽는 게 아니라 매일 연재되는 소설을 보기 위해 신문을 구독하게 된 것이다.

베스트셀러 『별들의 고향』의 영화화는 대단한 관심의 대상이었다. 문제는 누가 감독을 맡느냐였다. 이때 이장호라는 신인 감독의 이름이 등장했다. 서른도 안 된, 말 그대로 젊은 감독이 연출한 『별들의 고향』은 소설 이상의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그건 독자의 상상력으로 펼쳐나가던 세계가 이미지로 재현되는 순간의 시각적 혁명이기도 했다. 경아가 신체와 목소리를 가지고 사랑과 고통, 즐거움과 괴로움을 육성으로 전달할 때, 경아는 어떤 실체로 다가왔다. 경아, 이장호 그리고 최인호가 70년대 청춘의 아이콘으로 자리잡는 순간이었다.

최인호를 말할 때면 늘 ‘청년문화’가 동반된다. 최인호에게 ‘청년’은 단순히 생몰연대로 구분되는 특정한 시기가 아니라 차별적인 정신의 집약체이자 일종의 증상이었다. 통기타, 청바지, 장발은 청년 정신을 물리적 실제로 구현하는 일종의 미장센이었다. 핵심은 기성세대에 대한 저항 그리고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지배 권력으로부터 벗어나고픈 자유였다. 언젠가 최인호는 〈별들의 고향〉 경아의 기구한 삶에 대해 “서울이라는 대도시가 주는 폭력 속에서 상처를 입고 죽어가는 인물, 20대 청춘의 자화상 같은 인물”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문화사적으로야 호스테스 문화의 기원, 한국형 멜로드라마의 원형으로 지칭되는 인물이지만 적어도 원작자 최인호에게 경아는 당대 청춘을 살아야 했던, 작가 자신의 아픔과 고통을 공유하는 인물이었다.

최인호의 작품들 중 청춘물은 대중에게 일종의 상징이었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온 하길종 감독의 출세작인 〈바보들의 행진〉 역시 최인호의 동명 청춘 연작 중 하나를 원작으로 삼고 있다. 흥미로운 것 중 하나는 대학생이 등장하는 첫사랑 이야기의 원형이 최인호 소설 원작영화 <바보들의 행진>에 담겨 있다는 사실이다.

 주인공인 영자는 병태와 처음 만난 날, 카뮈의 『이방인』을 읽었느냐고 묻는다. 대학생이니 만큼 지성인으로 고담준론을 논하려나 싶은 그때, 영자는 병태에게 레포트를 대신 써달라고 제안한다. 이 장면은 2012년 병태의 학교이기도 했던, 연세대 출신의 이용주 감독의 <건축학 개론>에서 독특하게 재연된다. 건축학과 학생 승민과 우연히 만난 음대생 서연은, 교양 수업 ‘건축학개론’을 함께 듣고 있지 않냐며 승민에게 말을 건다. 그렇다고 하자 서연은 대뜸 영자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럼 우리 숙제를 같이 하는 게 어때? 넌 건축학과고, 이 동네 사니까, 공평하잖아?”라며 뜬금없는 제안을 한다. 당돌한 제안을 하는, 깜찍한 외모의 1학년 여대생, 한국형 첫사랑 영화에 클리셰로 등장하는 장면에 경아와 병태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다.

깜찍하고 발랄한 대학생들의 연애담처럼만 보이지만 사실 <바보들의 행진>은 1970년대 억압적인 군사독재정권 아래에서 숨죽여 청춘의 열기를 눌러야 했던 당시 분위기를 고스란히 저격하고 있다. 때론 은유적으로, 때론 직접적으로 말이다. 강의를 시작했지만 집회에 나갈 사람은 나가도 된다고 허락하는 교수, 이상국가라는 교수의 판서를 지우며 거짓말을 뜻하는 사쿠라로 바꿔 장난을 치는 병태의 모습은 당대 시대에 대한 우회적 비판을 잘 보여준다.

〈바보들의 행진〉 스틸컷

〈바보들의 행진〉은 사전 검열로 인한 편집권 침해와 수많은 금지곡으로도 유명한 작품이다. 〈왜 불러〉는 공권력에 대한 조롱으로, 〈고래사냥〉은 염세주의라는 이유로 말도 안되는 이유로 노래까지 금지당하던 세상, 미래를 계획하기에도 그렇다고 거리로 마냥 나서기에도 답답하던 시절의 청춘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다.

〈바보들의 행진〉 영철이 꿈꾸던 어여쁜 동해의 고래는 한편 최인호 청춘 연작 소설이 지향하는 이상적 세계의 존재다. 1984년 배창호 감독이 연출한 〈고래사냥〉은 그런 점에서 최인호의 소설에 구현된 고래의 상징성을 낭만적이면서도 섬세한 감수성으로 재현해낸 작품이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가수 김수철을 병태 역으로 캐스팅한 것이다. 생활 연기에 기반한 김수철의 연기는 과거 영화적 문법이나 상투성에서 벗어나 새로운 핍진함을 선사했다. 괴짜 민우 역할을 맡았던 안성기의 연기도 무척 인상적이었다. 고래를 찾아 바다로 향하는 여정 가운데서 언제나 작가 최인호가 꿈꾸었던 세계의 이미지가 구체화되었다. 이젠 되돌아갈 수 없는, 잃어버린 이상향에 대한 깊은 갈망과 좌절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세계를 그리는 갈망 말이다.

〈고래사냥〉 스틸컷

최인호라는 작가야말로 떠나온 바다를 꿈꾸는 고래와 같은 작가였을 지도 모르겠다. 세속적 관점에서 아주 이른 나이 작가로 등단해, 20대 젊은 시절에 모르는 이 없는 초대형 스타 작가의 반열에 올랐으나 순수 문학 위주의 문단에서 멀어져 자기만의 방식으로 날카로운 현대적 감각을 보여주었던 작가, 소설가. 최인호의 소설이 드러낸 건 결국 달라진 세계, 현대성의 감각과 정서 구조였다. 최인호 소설 원작영화 중 대표작으로 남은 작품들이 모두 신선한 감각과 정서로 환기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최인호 그리고 그의 소설 원작영화가 우리 문화에 선사한 건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시대 감성과 정서였다. 최인호의 작품들이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정치,문화, 사회적 맥락에서 재평가되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최인호는 한국적 현대성의 원형이자 원전이다.

 

 


강유정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졸업. 2005년 《조선일보》 《경향신문》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으로 등단, 저서로는 『영화 글쓰기 강의』 『타인을 앓다』 등이 있다. 현재 강남대학교 한영문화콘텐츠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 《쿨투라》 2023년 9월호(통권 11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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