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호와 청년문화] 소설가 최인호와 연극
[최인호와 청년문화] 소설가 최인호와 연극
  • 홍창수(극작가, 고려대 교수)
  • 승인 2023.09.01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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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소설가 최인호의 서거 10주기를 맞이하여 작가와 관련된 연극 기록과 자료들을 살피면서 작가와 연극, 작가의 인생과 연극의 의미를 되짚어보려 한다. 소설가 최인호와 연극의 관계는 매우 낯설게 느껴진다. 최인호와 소설, 최인호와 영화는 매우 친숙한데 반해 연극은 작가와는 거리가 먼 예술영역 같다. 그러나 작가의 연극에 대한 관심은 그가 신춘문예에서 소설로 등단했던 고교시절까지 거슬러간다. 최인호와 연극의 관계는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작가가 연극의 주체로서 희곡을 창작하고 연극 공연에 관여했던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작가의 원작 소설이 연극이나 뮤지컬 등 공연예술 작품으로 재창조되어 작가와 새롭게 관계를 맺게 되는 방식이다. 최인호 작가만큼 소위 OSMU의 방식으로 영화, TV드라마, 연극 등 매체 전이를 통해 많은 원작 소설이 재창조된 예는 흔치 않을 것이다. 연극만 하더라도 〈잠자는 신화〉, 〈진혼곡〉, 〈타인의 방〉, 〈어머니가 가르쳐준 노래〉, 〈고래사냥〉 등 다양한 원작 소설이 각색, 공연되었다. 특히 1996년에는 〈고래사냥〉이 뮤지컬로 만들어져 1970년대 아웃사이더들의 자유와 꿈을 향한 절규와 문제의식이 20년 만에 재현되었다. 이듬해에는 영화와 TV드라마로 방영되어 인기가 높았던 〈겨울나그네〉가 뮤지컬로 재탄생되어 1990년대의 관객의 감성을 적시며 사랑의 감동을 선사했다. 작가의 입장에선 자신의 소설들이 장르와 매체의 경계를 넘어 새로운 관객과 시청자들을 만난다는 것은 유쾌한 일일 것이다. 왜 최인호의 소설들이 20여 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계속 호명되는가는 앞으로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연극의 주체로서 작가가 직접 희곡을 창작하고 연출을 하며 연극에 열정을 불태웠던 삶을 잠시 들여다보기로 한다. 소설가 최인호에게 연극은 무엇이었을까?

〈노부인의 방문〉

최인호 인생의 연극 이야기는 고교 시절에서 시작된다. 월간지 《한국연극》 1981년 7~8호 특집 ‘소설가와 연극’에서 최인호는 연극에 미쳤던 학창시절을 이야기한다. 그가 연극에 관심을 가졌던 때는 서울고교 2학년 때다. 가을예술제에서 제임스 콘라드의 연극 〈빌리 버드〉가 올려졌는데, 여기에서 선원 역할을 맡았다. 연극의 매력에 빠졌던 그는 연세대학교에 입학하여 연극부에 입단, 소도구나 조명부 따위의 스태프에서 일을 했고 손톤 와일더 작 〈우리 읍내〉의 신문팔이 역을 맡았다. 그리고 그는 연극에 미쳐 여러 대학 연극부 학생들과 모여 본인이 직접 창작한 〈메리 크리스마스〉를 연출하였다. 이 작품은 Y.M.C.A 강당에서 4회 공연되었다. 그런데 제작비를 마련하려고 본인의 시계를 전당포에 맡기면서까지 의욕적으로 공연을 올렸으나 적자로 끝이 나고 말았다. 그는 군대를 마치고 학교에 복학한 후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여대생들과 고등학생들을 상대로 연극 연출을 하였다. 

〈세일즈맨의 죽음〉

어떻게 대학교 시절 몇 편의 연극과 연출 경험만으로 여대생들과 고등학생들을 상대로 연극을 가르치고 연출을 하였냐고 묻겠지만, 그 시절에는 낯선 풍경이 아니었다. 작가가 대학을 다녔던 19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반에는 고등학교, 대학교에 연극반이나 연극 동아리가 생겨나 연극이 대학 문화의 하나로 자리잡아가고 있었다. 신생 연극반이나 동아리는 연극을 공연하기 위해 연출해줄 연출가를 필요로 했는데, 당시 집안이 가난했던 작가는 등록금 마련을 위해 아르바이트로 연출한 것이다. 작가는 전문교육기관에서 연극과 연출을 체계적으로 교육 받지도 않았고, 전문 프로 극단에 배우나 연출로 정식 입문하여 활동한 것도 아니었다. 고교 시절에 소설만큼이나 연극을 좋아하여 대학 시절까지 연극 활동을 이어간 것이다.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한 이후에 작가는 학생들을 가르치며 몰리에르의 〈수전노〉, 유진 오닐의 〈고래〉, 손톤 와일더의 〈결혼중매인〉, 〈유식한 이 아들〉 등을 연출하였다고 한다. 이 시기 몇 편의 연출 경험 때문인지 작가에게 연출은 매우 각별했던 것처럼 보인다. “연극을 연출할 때면 나는 나 자신도 모르게 열정과 정열과, 의지와, 힘과, 기쁨이 솟아올라서 나는 조금만치의 허점도 용서할 수 없는 독재적인 연출가였음을 자부하고 있었다. // 만약 글을 쓰지 않고 연극을 계속했더라면 나는 제법 개성 있는 연출가가 되었으리라고 감히 건방진 결론을 내려보곤 한다.” 본인 스스로 ‘독재적인 연출가’, ‘개성 있는 연출가’를 언급할 정도로 연출에 관한 한 자신만만함을 엿볼 수 있다.

그의 학창 시절 언급에서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작가가 타 대학교 연극부 학생들을 모아 제작비를 부담하며 직접 창작한 희곡으로 연출했다는 점이다. 작가가 ‘연극에 미친 나’라고 표현하고 그때 자비를 들여 제작한 공연을 ‘기막힌 짓’이라고 표현한 것은 연극에 대한 열정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게 해준다. 나이 스물 무렵의 작가가 캠퍼스 내 연극 동아리의 울타리를 벗어나 직접 극작과 연출과 제작을 겸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연극계의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말한다면, 한마디로 말해 겁도 없고 무서울 것도 없는 젊은 패기와 도전이다. 작가가 자신이 직접 쓴 창작 희곡으로 연출을 하여 자신만의 창조적인 연극 세계를 만들어나가겠다는 것. 근현대연극사에서 극작과 연출을 겸한 대표적인 연극인으로 유치진을 꼽을 수가 있겠지만, 이때만 해도 문학청년 최인호는 소설가의 길과 연극인의 길을 넘나들려는 의지를 불태웠다.

〈유리동물원〉

당시에 작가가 좋아했던 희곡들은 아서 밀러의 〈세일즈 맨의 죽음〉, 테네시 윌리엄즈의 〈유리 동물원〉, 뒤렌 마트의 〈노부인의 방문〉, 샐라 딜래니의 〈꿀맛〉이었다고 한다. 작가가 영문과에 다녀 서양문학에 친숙하기도 했겠지만, 당시에 공연되었던 주옥같은 서양 희곡들을 자연스레 접하면서 희곡과 연극의 매력에 푹 빠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성향으로 볼 때, 작가에게 연극은 매우 친숙한 예술영역이었고, 굳이 소설과 구분하여 경계를 지을 영역이 아니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작가는 소설을 쓰면서도 연극계에 발을 들여놓고 활동하였다. 작가는 1969년 2월 극단 ‘전진극회’ 창단 발기 동인으로 참여했다, 연출가 권오일, 극작가 김용락 등 문인과 연극인들이 참여하였는데, 연극 심포지움과 살롱드라마 발표회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1971년 6월 작가가 처음으로 창작한 희곡 〈달리는 바보들〉이 극단 ‘현대’의 문인극회에서 공연되었다. 이 문인극회는 1971년 5월에 창단된 극단 ‘현대’에 소속된 세 팀 중 하나였다. 문예지 『현대문학』을 발간하는 현대문학사에서 극단을 만들어 A(본격 배우), B(연극학도), C(아마추어 문인) 세 팀을 운영하였다. 중고교 순회공연, 살롱드라마의 진출 및 지방문예 강연 때의 부수 행사를 통해 연극관객을 개발할 계획이었다. 문인극회에는 최인호를 포함, 천승세, 정현종, 이광훈, 김원일, 김용운, 유현종, 강은교 등이 참여하였다. 카페 테아트르에서 공연된 최인호의 첫 희곡 〈달리는 바보들〉은 어떤 작품일까? “진정한 의미에서의 주자들은 스타트라인에 서지도 못했는데 사회 모든 부문에서 당돌한 바보들은 벌써 뛰고 있고 그것을 강요할 수밖에 없는 현세대의 전위적 예술의 허위성을 풍자한 작품”이라고 한다.

경향신문, 1971. 5. 11.

이듬해 2월 최인호는 연암 박지원의 〈양반전〉에 배우로 출연했는데, 책방 역할을 맡았다. 문인극회의 두번째 작품으로서 소설가 유현종이 각색하여 한국일보사 소극장에서 공연되었다. 특이한 점은 이 작품의 연출, 배우, 스태프 모두 문인들이 전담했다는 점이다. 연출은 극작가 차범석, 무대감독은 시인 정현종, 효과·장치는 시인 김영태, 등장인물들은 모두 시인과 소설가들이 맡았다. 황순원, 최정희, 박영준 작가도 동네사람으로 잠깐 특별출연하였다.

연극의 완성도와 공연에 대한 평가는 차치하더라도 문인들이 희곡을 쓰고 배우를 하고 공연을 올리는 현상은 오늘날의 문단의 관행으로 쉽게 이해되지 않는측면이다. 1960년대와 70년대 연극이 대학 문화의 하나로 자리잡아가던 연극계에는 대학극 운동과 청년 중심의 소극장 운동이 전개되었다. 당시의 연극은 젊은이들이 즐겼던 고급 예술의 하나로 인식했고 동시에 축제 문화가 부족했던 시기에 예술적, 문화적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예술작품이기도 했다. 6・25 전쟁 이후 폐허와 복구의 시련기를 지나면서 대학생들과 젊은이들 중심으로 연극에 대한 관심과 작품 제작의 수요가 증대되었지만, 이것을 충족시켜줄만한 전문 공연 극장, 극작가들, 창작극이 부족한 실정이었다. 이 시기에는 카페, 살롱, 다방 등 배우가 연기할 수 있는 공간과 관객들이 관람할 수 있는 객석만 확보되면 공연이 성사되었다. 1977년 삼일로 창고극장에서 배우 추송웅이 〈빨간 피이터의 고백〉을 올려 장기공연에 성공한 것이 좋은 사례다.

이 시기에 시, 소설을 창작하던 문인들에게 연극은 낯선 영역의 세계가 아니었다. 문단의 일각에서 일군의 시인들이 ‘시극동인회’를 결성, 시극을 발표하며 시극운동을 전개한 것도 문학과 연극의 경계를 크게 의식하지 않은 문화적 분위기를 보여준다. 창작극이 부족하여 번역극에 많이 의존했던 연극계는 문인들의 희곡 집필을 반기는 측면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연극계에선 문인들이 배우나 스태프로 현장 작업하는 것을 아마추어리즘의 측면에서 받아들였지만, 적어도 문인들이 창작한 희곡은 당시 일반적이었던, 유형화된 극구조의 틀이나 사실주의 극작의 매너리즘에서 벗어나 신선한 시선과 다양한 문제의식을 제공해줄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동아일보, 1974. 05. 07.

1974년 5월 극단 ‘산울림’이 예술극장에서 최인호의 첫 장막희곡 〈가위 바위 보〉를 공연했다. 이 작품을 통해 작가는 편리하지만 실상은 서로 유리되고 소외되어 있어 마치 철책 속에 갇힌 실험용 동물 같은 아파트 주민들의 상황을 풍자적으로 그려 현대인의 의식을 나타내고 싶었다고 말한다. 4년 후인 1977년 같은 극단에서 그의 장막희곡 〈향기로운 잠〉이 공연되었다. 〈향기로운 잠〉은 불면증에 시달리는 주인공 선영이 자신을 괴롭히는 소리의 근원을 찾기 위해 세상밖으로 나가 다양한 상황에서 속물적인 인간 군상을 만나며 타락하고 무서운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향기로운 잠〉 이후에는 희곡을 창작하지 않은 듯하다.

소설가 최인호에게 연극은 무엇이었을까? 작가가 연극에 열정을 불태운 시기는 고교시절인 1960년대부터 30대 중반인 1970년대다. 최인호의 연극 열정은 연극이 젊은이들의 청년문화와 대학 문화의 한 갈래로 형성되었던 당시의 문화적 풍토와 분위기와 깊은 관련이 있다. 연극에 관한 전문 교육과 지식을 학습하지 않았음에도, 그는 연극반과 연극 동아리에서 배우와 스태프의 다양한 경험을 바탕삼아 창작희곡을 써서 직접 제작까지 했던 연극 청년이었다.

최인호의 연극은 작가의 인생에서 청년시대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창작한 세 편의 희곡 중 현전하는 두 편 〈달리는 바보들〉과 〈향기로운 잠〉. 현전하지 않지만 공연 정보가 남아 있는 〈가위 바위 보〉를 살피면, 청년 세대의 정체성이 확연히 느껴진다. 젊은 청년 작가의 시선으로 한국 산업 사회와 서울이라는 대도시의 세속 세계를 비판과 풍자의 시선으로 극화하였다. 타락한 속물적 인간, 기성의 권위적인 예술, 사이비 종교, 전체주의적인 사회 등을 비판하고 풍자하며 자유와 순수, 꿈과 사랑의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였다.

조선일보, 1971. 06. 25.

작가가 고교시절부터 접한 서양 희곡과 서양 연극에 대한 직간접적인 체험은 그의 소설에도 일정하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좀더 분석적인 연구가 필요해 보이나, 하나의 예로 그의 초기 소설 중 현대문학상 수상작인 〈타인의 방〉을 들 수 있다. 아파트의 복도에서 이웃과의 짧은 만남을 제외하면 주인공이 주로 방이라는 공간에서 벌인다는 점에서 모노드라마이고, 소설의 말미에 사물화된 주인공을 폐기하는 아내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2인 드라마다. 최소한의 인물과 제한된 공간 안에서 집중적이고 세부적으로 주인공의 생각과 말을 전하고 움직임을 표현하는 서사는 마치 아내마저 타인이 되는 관계의 단절 속에 고립과 소외로 고통받는 현대인의 심리를 내밀하게 들여다보는 한 편의 드라마와 흡사하다. 이점에서 최인호의 연극은 소설 및 산문과 별개의 영역이 아니고, 권위적이고 위선적인 기성 제도와 사회에 대항하려는 청년 작가의 정신을 잘 보여준다.

최인호 작가의 서거 10주년을 맞이하여 그분의 청년문화 정신과 창조적인 업적을 기리는 모임이 만들어지고 작가의 이름을 붙인 청년문화상이 제정되었다. 매우 고무적이고 의미 있는 움직임이다. “젊음이란 미래를 의미한다”는 최인호 작가의 말은 오늘날에도 음미해볼 만하다. 작가가 지냈던 청년시대로부터 멀리 떨어진 지금, 21세기 AI 인공지능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사회와 세계 속에서, 청년들의 청년 정신과 청년문화는 무엇인지, 왜 우리는 역사와 시대가 변해도 청년정신과 문화와 가치를 옹호하고 추구해야 하는지 계속 되묻고 실천할 필요가 있다.

 

 


홍창수 1999년 첫 장막극, <원무>가 동아연극상 대상 후보작으로 선정되면서 연극 연구와 극작 활동을 겸하고 있다. 2020년에 창작산실 올해의 신작에 선정, 2023년에 대한민국 극작가상을 수상했다. 대표작으로는 〈누란누란〉, 〈오늘 나는 개를 낳았다〉, 〈원무인텔〉, 〈그들이 쫓아온다〉 외 작품 다수. 현재 고려대 교수이자 극작가.

 

 

* 《쿨투라》 2023년 9월호(통권 11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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