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예술가의 썰] 인간 체스
[청년예술가의 썰] 인간 체스
  • 김해솔(시인)
  • 승인 2023.10.0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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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인간 체스〉1를 소개해 드리죠. 이 연극의 무대는 체스판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배우는 무대에 올라간 바로 그 순간부터 체스판의 체스 말 같은 것이 되는 것처럼 보이죠. 아, 보이는게 아니라 정말로 체스 말이 된다, 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관객은 체스판 위에 서있는 두 배우를 객석에 앉아 바라보고 있고, 두 배우는 각각 체스판 가장 모서리에 해당하는 부분에 서있습니다. 서로를 대각선으로 마주 본 채로. 음, 이렇게요.

이때 각각의 관객은 순서에 따라, 배우들의 말과 행동을 택할 수 있는 카드를 고를 수 있습니다. 가령 세 개의 카드가 있고 그 카드에 각각 다음과 같은 문장들이 적혀 있다 가정해보죠.

카드1. “배우1은 배우2에게 사랑한다고 말한다.”
카드2. “배우2는 배우1의 뺨을 때린다.”
카드3. “배우1과 배우2는 아무 사이도 아니다”.

관객이 고른 카드가 어떤 카드이냐에 따라, 배우1과 배우2는 서로 가까워지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합니다. 관객이 1번 카드를 고르면 두 배우가 서로에게 가까워지는 방향으로 한 칸 움직이고, 2번 카드를 고르면 서로에게 멀어지기 위한 방향으로 한 칸 움직이는 식으로 말이죠. 3번 카드를 고르면? 그때는 게임 마스터가 개입해 두 배우를 멀어지게 만들지 가까워지게 만들지 택할 수 있습니다. (게임 마스터는 위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듯, 관객들 바로 맞은편에 존재합니다.) 게임 마스터의 권한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제 친구 솔몬은 묻더군요.

“그럼 게임 마스터의 힘이 너무 세지는 거 아니야?”

맞습니다. 뭐랄까요. 게임 마스터는 마치…… 운명 같은 거죠. 하지만 게임 마스터가 연극에 개입할 수 있는 조건은 관객이 3번 카드를 택할 때뿐입니다. 만일 모든 관객이 1번이나 2번 카드만을 고집한다면? 게임 마스터가 이 극에 개입할 기회는 없게 되죠. 아, 연극이 끝나는 순간은 두 배우가 목적지인 중앙에서 서로 만나는 순간인데요. 그러니까 너무 빨리 만나버리면 안 되잖아요? 연극이 끝나는 시간은 정해져 있으니까. 그래서 게임 마스터의 존재가 필요한 겁니다. 연극이 너무 빨리 끝나지 않도록. 물론 게임 마스터가 아무리 방해를 해도 연극은 끝나죠. 정해져 있잖아요. 연극 시간이. 매번 동일하게.

이 연극의 정해진 결말은 두 가지이지만, 연극 하나가 끝날 때 우리가 볼 수 있는 결말은 하나뿐입니다. 두 사람이 만나거나, 만나지 못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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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인간 체스〉를 보고 집에 돌아왔다. 볼 때는 몰랐지만 집에 돌아온 지금 내가 이 연극에 대해 알게 된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카드에 적혀있던 모든 문장은 배우들이 하고 싶은 말과 행동에 관한 것뿐이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렇기 때문에 내가 고를 수 있던 카드는 사실 세 장이 아니라 한 장뿐이었다는 것. 오호, 나는 책상에 앉았다. 지금부터 원고 청탁 하나를 마감할 예정이다. 청탁서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적혀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청년예술가들의 창작과 그 이야기(썰)를 실을 예정입니다. 청년예술 가로서 청년의 이름으로 써 내려간 동시대 청년의 시들, 그리고 나의 시에 대해 자유롭게 써주십시오. 음, 그래 이런 주제라면 이런 이야기를 쓸 수 있을 거야…… 중얼거리며 나는 썼다. 카드4.

‘당신과 만난 날에는 기분이 좋다’.

 

 


1 임솔몬의 기획 연극 〈세계관 무역팀: 노인편〉을 김해솔(필자)이 변용 및 각색한 가상 연극. 〈세계관 무역팀: 노인편〉은, 퍼포먼스와 보드게임(산하, 김모니카의 게임 ‘세계관 무역’)을 결합시킨 실험극이다.


김해솔 2023 《쿨투라》신인상 시 부문 당선.

 

 

 

* 《쿨투라》 2023년 10월호(통권 11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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