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예술가의 썰] 의외성의 오염을 긍정하기
[청년예술가의 썰] 의외성의 오염을 긍정하기
  • 이우빈(영화평론가)
  • 승인 2023.10.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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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예술가로서 청년의 눈으로 바라본 동시대 청년 감독, 청년 영화들”이란 글의 주제를 읽고 한참을 고민했다. 굳이 따지자면 나는 아직 충분히 청년이다. 20대를 채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청년 혹은 젊은 예술이나 영화가 무엇인지는 영 요령부득이다. 이에 생각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최근 떠올렸던 몇 가지의 단상을 마구잡이식으로 엮어 봤다. 다소 비겁하지만, 미흡할지라도 그 시도만으로 가치 있는 것이 지금 나이의 특권이라면 특권이겠다.

영화를 찍어봤고 영화로 글도 써봤다. 사람 마음은 참 간사하다. 영화를 찍을 땐 무언가 쓰고 싶고, 글을 쓸 땐 영화를 찍고 싶다. 두 활동이 지닌 결함들 때문인 듯하다. 영화 찍는 일은 꽤 답답한 행위다. 예산을 짜고 쓰는 일, 시나리오와 콘티 작성, 촬영과 편집에 이르기까지 실행보단 계획의 수립이 중요하다. 돈도 사람도 많이 투입되는 일이니 자연스레 그렇게 된다. 글쓰기는 비교적 자유롭다. 다만 자유가 쉬움을 뜻하진 않는다. 자유로운 만큼 괴롭고 지지부진할 때가 더 많다. 이런 답답함과 괴로움 사이에서 종종 반대편의 일을 꿈꾸는 게 요즘의 일일이다.

사람들은 대개 영화 찍기와 쓰기의 고유한 약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어떻게 보면 집단창작과 개인 창작 형태의 필연적인 문제이기도 하겠다. 흥미로운 점은 이 두 행위의 성질이 서로에게 침입하고 상대를 오염시킬 때 의외의 결과물이 만들어진단 것이다.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떠오른다. (올해 여름 영화 빅4의 감독 중 실제로 가장 어리기도 한) 엄태화 감독은 영탁(이병헌 분)이 〈아파트〉를 부르는 잔치 장면에서 콘티의 계획을 지키지 않았다. 그는 군중들의 리액션 숏 등 수 개로 분할됐던 기존의 컷 구성을 배제했다. 대신 영탁의 표정에 집중한 롱 테이크 숏을 선택했다. 촬영 현장에서 이병헌 배우가 뿜어낸 연기의 힘이 그 판단의 이유다. 배우의 힘을 느낀 감독이 즉흥적인 컷 수정으로 돌아섰다고 한다.

이곳에서 커다란 분기점이 솟아났다. 분명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민성(박서준 분), 명화(박보영 분) 부부의 이야기로 매듭지어지는 구조인데, 힘의 축이 영탁에게로 확 옮겨진 것이다. 이로써 결말에 이르러 작은 희망을 말하려던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되려 철저한 절망에 가득 차 보이기까지 한다. 한국 사회 속 아파트의 부당함과 기괴함이 투영된 영탁이란 망령에 관객들이 홀리면서다. 혹자는 이 불균형을 잘못된 것으로 지적한다. 너무 거세고 뚜렷한 롱테이크가 그릇된 사상의 영탁 캐릭터에 관객들의 건전치 못한 몰입을 유도한다는 골지다.

 조금 달리 보고 싶다. 만약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원래의 계획대로 민성과 명화의 감정선에, 그리고 그들이 택한 행위의 개연성에 집중했다면 혹은 영탁으로의 몰입을 의도적으로 방해했다면 영화는 어떤 형태로 변했을까. 짐작하건대 썩 좋은 변화는 아니었을 것이라 느낀다. 현장에서 나타난 연기의 의외성, 그 의외성을 수용한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외견은 건물 어느 구석이 폭삭 무너진 형태같다. 영화 속에 수없이 무너져있는 아파트들처럼, 무척이나 견고하게 설계해놓은 영화의 구조를 감독 스스로 무너뜨린 셈이다. 그런데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별다른 해석이 나오지 않을 통상의 웰메이드 디스토피아물이 되지 않은 근거가 여기 있다. 어딘가에 나타난 균열 탓에 외려 묘한 생명력을 얻게 된 것이다. 글쓰기의 자유로움을 흡수한 영화가 그 자유로움의 부덕을 본능적으로 감지하려는 글쟁이들의 욕망을 일깨웠다. 그 욕망의 방향성이 긍정이든 부정이든 간에 목소리의 출현은 늘 의미 있다.

통념과 다른 의외의 순간이 발현된 사례라 말할 수도 있겠다. 사실 이는 태고부터 영화 매체가 긍정하려던 방향이다. 카메라의 힘을 찬양했던 지가 베르토프는 인간의 눈 역시 꽤 괜찮은 영화적 도구라고 말한 적 있다. 꽤 괜찮아지는 때란 인간의 인지가 숏의 간격을 포착하는 경우다. 숏의 간격을 몹시 거칠게 단순화하자면, 시나리오의 의도나 예상된 서사의 흐름에서 빗겨나간 틈을 일컫는다. 이병헌 배우의 연기를 두고 엄태화 감독이 ‘힘’이라 표현했던 그것에 가깝다. 그 힘이 카메라에 기록된 것이다. 배우가 자아낸 균열의 틈을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메꾸지 않았다. 계획은 도식이고, 콘티는 관습에 가깝다. 도식과 관습은 오용할 시 상투가 된다. 그 상투를 벗고 돌출되는 의외의 순간이 〈아파트〉 장면에 서려 있다. 이는 영화 제작의 프로세스에서, 특히 고도로 체계화된 동시대 한국 텐트폴 영화의 만듦새에서 쉬이 나오지 못할 순간이다.

물론 의외성에의 집착은 방임이나 혼란으로 변질하기 일쑤다. 비교적 자유로운 글쓰기 작업에서도 마찬가지다. 적절한 끈기 없이 흩어지는 글을 좋은 글이라 하진 않는다. 애초 계획의 미덕이 중요한 영화에서 이러한 리스크 부담은 더 치명적인 독이며 외려 철저한 계획에서 탄생하는 걸작들도 우리는 충분히 봐왔다. 하지만 그런 독을 삼키는 일에 주저하지 않는 이들을 더 자주 만나고 싶다. 어쩌면 이것이 젊음이지 않나 싶다. 편견일 수 있지만, 무릇 젊음이란 넘어지고 변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자세라 말해진다. 자신과 영화에 깃드는 의외의 순간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 그 시작이 〈콘크리트 유토피아〉 같은 우연일지라도 마찬가지다.

이 역시 지나치게 상투적인 표현이겠으나 오염에의 용기는 이른바 청년들의 특권이라 할 법하다. 이곳에서 젊음의 생기와 진보가 피어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최근 등장하는 일군의 영화, 심지어 독립영화마저 이 특권을 내려놓는 듯한 인상이 크다. 오염되지 않고 표백된 이야기들만이 가득하단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비단 창작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산업의 구조적 결함이 크지만, 이곳에서 거시적 문제까지 다루기엔 무리겠다. 대신 간청하듯 바란다. 응당 바람의 대상은 만드는 이들뿐 아니다. 영화에 투자하고, 영화를 보거나 쓰는 이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의외성의 오염을 긍정해주길 원한다. 재밌는 영화를 더 많이 보고 싶다는 순수한 욕심에서다.

 


이우빈 《씨네21》 기자, 독립 영화잡지 《섭씨 233》 편집장으로 활동 중. 2023 쿨투라 신인상 당선.

 

* 《쿨투라》 2023년 10월호(통권 11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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