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예술가의 썰] ‘좋아하는 삶’을 책임지는 것
[청년예술가의 썰] ‘좋아하는 삶’을 책임지는 것
  • 함은세(작가)
  • 승인 2023.10.04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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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모 시교육청의 초대를 받아 학부모 대상 토크 콘서트에 다녀왔다. 계속해서 변화하는 시대에 자기주도성을 이끌어내기 위한 방식을 주제로 삼아 대화 자리였는데, 공교육 시스템에서 탈피했기에 지금의 인생을 사는 내 이야기가 학부모들에게 와닿을지 걱정부터 됐다. 그런데 막상 현장에 가보니 반응이 뜨거웠다. 다들 진심으로 귀를 기울였고, 행사 전후에 개인적으로 수많은 질문도 받았다. 어떻게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사람으로 성장하려면 어떤 방법이 있는지 등에 관한 물음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특별한 정답을 제시할 만한 위인은 되지 못하지만, 아주 단호하고 명확하게 말한 것이 있었다.

“당사자가 선택한 인생인지의 여부가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내가 선택한 삶. 그게 나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된 건 꽤나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초등학교 6학년부터 중학교 3학년이 될 때까지, 연극과 뮤지컬 배우를 꿈꾸며 시교육청 산하 영재원에 다녔다. 시작은 우연한 계기였고 처음엔 그렇게까지 진지한 마음도 아니었지만, 어느 순간 일상이 꿈으로, 꿈이 삶으로 변했다. 무대에 서서 내가 빚어낸 인물을 조명 아래에 꺼내놓는 일을 하지 않는 인생은 상상이 잘 안 갔다. 고작 열여섯이었으나 내가 걸어가고픈 길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꿈을 좇는 일을 관둔 게 갑작스레 벌어진 일은 또 아니었다. 나 자신의 한계를 느낄 즈음에 당연히 합격할 줄 알았던 예술고등학교 입시에서 미끄러진 것이다. 항상 남들보다 ‘조금 더’ 뛰어남을 인지해온 나에게 그 결과는 충격이었다. 일반 고등학교에 입학해 뮤지컬 동아리에서 활동했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기까지구나.

내가 꿈과 이별하는 동안, 나와 함께 공부하고 배우며 같은 길을 걸은 친구들은 여전히 그 길 위에 서 있었다.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우리는 성인이 되었고, 다들 흔히 말하는 ‘전공자’로 거듭나는 걸 지켜봤다, 물론 어떤 변화 속에 다른 선택을 하는 친구들도 종종 나타났다. 그럴 때마다 꼭 이런 얘기가 나왔다. “좋아하는 걸 하면서 사는 게 쉬운 일이 아니더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언제나 그 사실을 뼈저리게 체감하며 살아온 나였다.

사실 모로 가나 ‘좋아하는 걸’ 선택한 삶. 어찌보면 내가 지나온 시간은 그렇게 정의가 가능하다. 학교를 그만두고, 여행을 하고, 글을 쓰고, 그러다 일도 하게 되고. 내 마음 속 가장 뜨거운 불꽃은 무대 위의 인생이었지만, 나는 돌고 돌아 또 다른 형태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됐다. 사람들은 내가 대단하다고 한다. 용기와 결단력이 있고, 나 자신에게 중요한 가치를 고르는 데에 거리낌이 없는 것 같아 멋지다는 얘기를 어디를 가나 듣는다. 그렇지만 내 딴에는 연극배우를 꿈꾸던 나와 지금의 내가 품은 의지만큼은 같기에, 그런 말에 돌려줘야 할 대답을 쉽게 찾지 못한다. 내가 선택한 것의 형태만 다를 뿐 그 선택을 둘러싼 열정과 애정은 동일하다. 그러나 이전에는 내가 ‘좋아하는 걸’ 선택하니 왜 그런 길을 가려고 하냐는 이야기만 반복해서 들어왔다.

그게 정확히 내 친구들이 늘 겪어온 상황이었다. “좋아하는 걸 하면서 사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아냐”는 소리를 귀에 박히도록 들어서 넌더리가 난다는 친구도 있었다. 내가 당사자인데 그걸 어떻게 모르겠냐고. 그렇게 대답하며 친구는 씁쓸하게 웃었다. 사람들은 항상 적당히 평범하고 적당히 그럴듯한 결과물을 원한다는 걸 떠올려보면 내 주변에는 ‘해당사항 없음’에 체크해야 할 이들이 많았다.

예술이라는 불꽃을 가슴 속에 품고 산다는 건 대충 그랬다. 남들이랑 같은 길을 걷지 않으니 그만큼 몇 배 더 큰 성공을 요구 받고, 책임져야 할 것들도 도처에 널렸다. 나는 그 사실을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니, 어차피 세상 사람 전부 자기 인생은 자기 책임져야 하는 거 아니야? 왜 본인 자신이 ‘선택한 삶’을 책임지는 이들을 한심해하지?

한국 사회는 당사자가 오롯이 삶을 책임질 수 있는 결정권 자체가 결여되어 있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남이 만들어준 인생의 길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 자체가 어릴 때부터 너무나도 익숙한 탓이다. ‘그냥 하라고 하길래 했다’는 의식의 흐름이 우리 사회에 지나치게 만연하다. 그래서 충실히 삶의 결정을 내리고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나가는 존재들을 무지렁이 취급하게 된다.

나에게 예술이란 ‘내 용기가 부족해 결국은 닿지 못한 것’에 가깝다. 나를 아는 이들에게 나는 ‘용기’라는 단어를 떼어놓을 수 없는 사람처럼 여겨지지만, 그것도 전부 다 내가 가장 원했던 용기를 외면한 채로 살았던 시절의 아쉬움에서 비롯됐다. 그때 조금 더 책임질 걸, 그때 조금 더 꿈꿀 걸, 그때 조금 더 도전할 걸. 지난날이 후회되는 건 아니지만, 결국 가장 마음 아프게 곱씹게 되는 순간은 내가 나 자신이지 못했던 나날들이다. 

그렇기에 이번 토크 콘서트뿐만 아니라 다른 강연, 하다못해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서도 내 삶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게 되면 꼭 잊지 않고 하는 말이 있다. “어쨌든 제 삶은 제가 책임져야 하니까요. 전 제가 가장 사랑하는 삶을 책임지고 싶어요.” 그 말을 하면서 내가 떠올리는 건 ‘책임져온 나 자신’보다도 ‘책임지지 못했던 나 자신’이다. 그러다 불현듯 내 친구들을 떠올린다. 종종 좋아하는 일을, 가슴 뛰게 하는 꿈을 선택하고 그 길 위를 달린다는 사실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상처 받는 무대 위의 내 친구들. 그리고 내 친구들과 같은 이유로 더 좋아하는 삶을 책임지기로 한 예술가들. 우리가 그 용기를 가볍게 여긴다면, 언젠가는 분명 우리 주변이 무채색이 되어 있을 것이다.

각자가 좋아하는 삶을 책임지기 위해 본인만의 방식으로 애쓰는 중일 삶의 예술가들. 내가 손에서 놓은 용기를 아직 꼭 쥐고 있는 그들의 마음이 오늘따라 더욱 찬란하고 눈부시게 느껴진다

 


함은세 고등학교 자퇴한 걸 자랑하고 다니는 02년생. ‘인생 재미있게 살기 프로젝트’ 라는 명목 하에 삶을 모험하며 세상을 읽는 눈을 키우는 중이다.

 

* 《쿨투라》 2023년 10월호(통권 11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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