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예술가의 썰] 미디어 속 청년예술가의 현재와 새로운 초상
[청년예술가의 썰] 미디어 속 청년예술가의 현재와 새로운 초상
  • 변해빈(영화평론가)
  • 승인 2023.10.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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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내세요, 병헌씨〉 인디스토리 제공.

최근 미디어 콘텐츠에서 적당한 희망과 적당한 실패담을 동시에 짊어지고 등장하는 청년 예술가를 인상적으로 그려낸 경우는 드물다. 픽션에서조차 예술가인 청년 캐릭터들을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한동안 미대, 영화과, 포괄적으론 국문학에서 예술의 길로 뛰어들려는 대학생들에게 ‘졸업하면 뭐하고 살까?’가 따라붙으며 일련의 담론이 생성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젠 그 음울한 이야기는 이미 다아는 것이어서 더는 다루지 않아도 된다거나 또는 막연함을 누리는 일조차 허상에 가까운 이야기가 되어버린 것 같다.

영화 〈힘내세요, 병헌씨〉(2013)의 마지막, 주인공 병헌(홍완표 분)이 ‘신발 밑창 수준의 영화’라는 지적에 대해 이렇게 덧붙인다. “근데요…. 저는 사람의 발이 아니라 마음을 적시고 싶네요….” 신인 감독의 장편영화 입봉기를 그린 이 작품에서 병헌의 마지막 호소는 여전히 막연하지만, 열정과 호기를 잃어선 안 된다는 듯 끝까지 한마디 말을 더하며 결국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고 말았을 터. 한동안 ‘병헌씨’는 동시대 신인 영화인, 넓게는 어두컴컴한 현실을 안고도 무언가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청년 예술가들의 곤궁하지만 꿈틀거리는 열망과 꿈을 대변하는 캐릭터 중 하나였다. 마음이라는 벙벙한 추상과 은유에 뒤따르는 것이 달곰씁쓸한 웃음이든, 현실에 대한 차가운 직시든, 적어도 ‘젊음’에서 가능한 위태로운 시절을 치열하게 보내는 예술가의 초상을 그려내는 한 방식이었다.

그렇다면 2023년의 ‘병헌씨’, 청년 예술가들은 어디로 갔을까. 우선 청년의 시대상을 끈끈하고 활력 넘치게 그려내는 독립영화 시장에서도 네다섯쯤 되는 젊은이들이 좁은 스터디룸에 둘러앉아 서류 따위를 주고받는 풍경은 일상적으로 여겨지지만, 그들이 (설령 한량처럼 보일지라도) 예술의 미학을 논하는 대화의 장은 마련되지 않는다. 어느 순간 N년 차 고시생, 워홀과 취준생,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채 등장하는 코로나 시대의 청년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는데, 급기야 어떤 구체적인 직종을 드러내는 이미지는 보이지도 않는다. 그들은 아예 특정 직업을 통해서 정체성, 자아를 드러내지 않게 되었다.

〈힘내세요, 병헌씨〉 인디스토리 제공.

자신들을 예술가라 자칭하지도, 사회적으로 예술가의 명칭으로 불리지도 않는 평범성이 포진하게 되었다. 주류를 벗어난다고 해도 경계적 위치의 ‘○○준비생(지망생)’이거나 엇비슷한 사무실에서 색채 없이 섞여 들었다가 어렵사리 퇴사를 선언하고 자아 (되)찾기. 하기야 ‘프리터족’을 선언하는 시기인데, 미디어 콘텐츠 속에서 청년 예술가가 사라진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결과일지도 모른다.

미약한 가망에 속 쓰려하면서도 희망을 외치며 술을 퍼마시던 청년예술가들은 이제 돌아갈 수 없는 시간과 누군가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술잔을 기울인다. 작년 개봉한 영화 〈모퉁이〉(2022) 역시 영화과 동문인 세 인물의 우연한 재회를 그리지만 그들 사이를 잇고 또 분절시키는 건 비정한 꿈과 실패된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다. 젊은 신인 감독의 자서전처럼도 들리는 영화는 골목의 한 노포에서 시작해서 모퉁이를 돌아 나가는 결말까지, 그들의 과거였고 미래이며, 더없이 분명한 현재인 예술은 ‘놓을 수 없는 꿈’이 아니라 ‘꿈이었던 것’으로서 짙은 상실의 기운을 머금고 있다. 이상하게도 열정은 죽고 상실이 산다.

그런가 하면 청년 예술가는 차라리 드라마틱한 표식이 덧씌워진 채 현실과 밀착되지 않는, 말 그대로 캐릭터로서만 살아남았다. 이를테면 〈무지개 여신〉(2006) 〈허니와 클로버〉(2006) 〈소라닌〉(2010) 등 일본 인디영화에서 볼 법한 ‘사랑스러운 괴짜’ 캐릭터. 천재적인 재능과 괴상함 사이의 존재들. 우여곡절의 슬픔과 기쁨을 적절히 누리는 이야기는 최근의 〈썸머 필름을 타고!〉(2022)와 같은 영화로까지 이어졌다. 드라마 〈박하경 여행기〉 2회에 등장하는 연주(한예리 분)는 여러모로 별스럽고 개성 강한 소위 일본 감수성이 장착된 캐릭터다. 애매한 재능을 가진 연주를 보며 그녀 말대로 “(예술을) 사랑하면 됐지”하고 읊조리는 결말은 조금은 붕 뜬, 낙관으로 포장했다는 인상에 더 기울어있는 듯하다.

〈모퉁이〉 영화사 그램 제공.
〈박하경여행기〉 웨이브 제공

마냥 우울한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인위로는 도달할 수 없는 ‘버팀’의 생기가 지금 어디에 존재하는지 시야를 확장시킬 필요가 있다. 스스로를 호명할 마땅한 언어를 갖지 못한 이 젊은이들은 대안적인 루트를 통해 막연함을 자기표현의 한 양식으로 만들어낸다. 올해 〈라이스보이 슬립스〉(2023)로 얼굴을 알린 배우 최승윤(소영 역)의 캐스팅 일화가 흥미롭다. 앤소니 심 감독은 인터뷰에서 유튜브 콘텐츠 ‘dxyz - 최승윤 배우 만들기 프로젝트’에 출연한 그녀를 관심 있게 보았다고 전한다. 영상 안에서 최승윤은 관상을 보고 포털 사이트에 자신을 배우로 등록하는 과정을 담는다. 다소 산으로 가는 듯한 전개 말미, 연기도 한다. 〈밀양〉의 전도연도 되었다가 유튜브 구독자 깜짝 이벤트를 위한 ‘택배 기사 목소리’ 역으로 즉흥 연기도 선보인다. 물론 우리가 알던 전형적인 배우 트레이닝 방법론과는 현저히 다르다. 다만 주류 미디어에서 배제되어 온 이들이 1인 미디어를 통해 재현의 틀에 균열을 발생시킨다는 점. 동시대의 ‘진짜’ 지망생들은 프로필 투어라 불리는 오디션 지원 과정을 담은 브이로그를 제작하고, 십여 개의 건물을 잇는 동선을 따라 두 다리로 씩씩하게 이동하며 저마다의 경로를 개척한다. 이들에게 유튜브라는 매체가 경제적 수단이 되기엔 생계 수단으로까지 가기에도 무리 있어 보이지만, 더 중요한 건 지망생 상태의 막막한 생활을 자발적으로 드러낸다는 것이다. 간절함으로 버티는 면면을 자기 연민하지 않으며 절망은 절망대로 충분히 받아들이는 자발적이고 솔직한 태도를 우리는 마주할 수 있다. 누군가 ‘힘내세요’를 말해주길 염원하기보다 절망을 두 다리로 버티고 선 스스로의 힘, 그 절실한 초상이 우리 시대를 지탱하는 예술가의 초상이 아닐까. 

〈라이스보이슬립스〉 판씨네마 제공.
유튜브 채널 dxyz - 최승윤 배우 만들기 프로젝트.

 

 


변해빈 2020 제1회 박인환상 영화평론 부문, 2020 경기인디시네마 경기씨네 영화관 영화평론 우수상을 수상하며 평론을 시작. 연출과 마케팅 등 미디어 산업에 다년간 종사했으며, 현재는 영화전문매체 코아르(CoAR) 전문 영화평론가로 다양한 비평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 《쿨투라》 2023년 10월호(통권 11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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