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예술가의 썰] 시간을 길어 전시로 삼기
[청년예술가의 썰] 시간을 길어 전시로 삼기
  • 최영건 소설가
  • 승인 2023.10.04 00: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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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생각지 못했던 곳에서 귀한 책들을 전시할 기회가 생겼다. 내가 몸담은 출판사가 여의도 더현대에 팝업 매장을 연 브랜드로부터 협업 제안을 받은 것이다. 작가로서 나 개인이 받은 의뢰는 아니었지만, 나는 출판 편집자이자 기획자로서 내가 담당하게 된 그 제안이 무척 흥미로웠다. 우리 출판사에서 만들어내는 것들은 귀하지만 대중적이지만은 않은 책들이다. 오래전의 시간을 길어 올려 오늘날로 되살려내는 작업을 주로 한다. 나는 팝업 전시를 기획하며 그중에서도 김수남, 구본창, 이갑철, 최민식 등 근현대 한국 사진가들의 사진집들을 중심에 두기로 했다.

근현대 한국 사진가라는 개념은 이들 작업의 다양성을 직관적으로 전하기에 조금 밋밋한 말이다. 우리의 근현대가 어떠했는지에 대해 이들은 저마다의 시선으로 기록을 남겼다. 예컨대 김수남은 ‘굿’이라는 신비롭고도 기묘한 체험을 따라 굿판 사진을 찍으러 다닌 사진가다. 그의 작업은 사진이라는 정적인 단일 프레임에서 도약해, 춤과 제의의 역동성에 가닿고자 시도한다. 김수남의 아들 김상훈은 부친의 사진에 대해 이런 재밌는 평을 남기기도 했다. “어릴 때 집에 왜 귀신 사진처럼 보이는 것이 많냐고 했어요. 그러자 아버지는 네가 이 사진을 멋있고 아름답게 보게 될 때면 어른이 되어 있을 것이라고 하셨어요.”1 나는 이 평이 무척 마음에 들어 문장 카드로 만들고자 발췌했다. 그렇게 과거의 기록 한 점이 더현대 팝업 매장의 선반에 새카만 문장 카드로 전시되었다. 굿 사진들의 멋짐을 알아챌 수 있으니, 그렇게 본다면 나는 가까스로 조금은 어른인지도 몰랐다.

또 다른 강렬한 예시로서, 사진가 최민식의 작업들에 담긴 것은 가장 날것으로 기록하려 한 곤궁이다. 소설가 조세희는 ‘종이 거울 속의 슬픈 얼굴’이라는 최민식 작가론에서, 그의 사진을 볼 때면 “우리가 이미 겪었던 일과 지금도 겪고 있는 일, 그리고 그것이 크고 깊어 무엇으로도 감출 수 없는 우리의 상처에 대해 말하고 싶어진다”2고 썼다. 그가 그렇게 쓴 것은 이제 꽤나 까마득한 오래전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오래전에 쓴 ‘우리’가 여전히 ‘우리’라는 사실로부터 완전히 등을 돌리기 어렵다. 모두의 정신과 마음이 조금씩 무너져내릴 만큼 혹독한 폭염으로 뒤덮였던 올여름, 빈곤은 사람들을 겨눈 죽음의 총구와 같았다. 방아쇠가 당겨지고 누군가가 죽었다. 나는 폭염에 맞서 실내 온도가 통제된 더현대의 내부에 조세희가 쓴 최민식에 대한 작가론을 놓아 보고 싶었다. 우리는 여전히, 행복하게 살아야 하고, 생존은 늘 상처와 공존하고야 마는 일이다. ‘우리’는 늘 그런 방식으로 이곳을 깁는다.

더현대라는 상업 공간과 이런 사진집들이 과연 얼마나 호응할지 고민이 들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글을 쓰고 예술 책을 만드는 이로서, 시간을 길어 올리는 종류의 예술이 지니는 정체성을 한층 오롯하게 드러낼 수 있는 기획을 해보고 싶었다. 오래된 시간을 되살려낼 수 있는 건 오래전의 그들이 아니라 지금을 사는 우리다. 그들이 그들을 되살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가 그들을 되살린다. 나는 예술이 시간에 대하여 지니는 그런 수행성을 전시로 삼고 싶었다. 

특히나 책을 중심으로 한 기획이니 더욱 그랬다. 너무도 빠르게 많은 게 휘발되어 버리는 이 시절에, 책은 여전히 보존과 복원이라는 오래된 가치를 현현한다. 그것은 책의 어쩔 도리 없는 숙명이다. 또 바로 그런 까닭에 책이 지닌 최후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책은 휘발성에 저항하며 시간을 길어내는 데 적합한 사물이다. 그런 생각을 할 때면 책이 일종의 출판 예술이라는 장르를 이루고 있는 듯도 하다. 대량 생산될 수 있기에 예술품이 아니라고 하기엔, 이미 수많은 아트워크들이 동일하게 복제되어 범람하는 중이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책은 예술을 ‘기록’하는 매개로서만 묵묵히 출판 ‘시장’을 이룬다. 기록들의 시장이다.

하얗게 구불거리는 더현대의 한구석에서, 조용히 근현대 한국 사진가들의 작업을 길어 올려 보려 한 이번 팝업 기획과 전시는 그 과정과 결과 모두 퍽 흥미로웠다. 이 기억을 오래 간직하고 싶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이 팝업 역시 끝날 것이다. 많은 전시와 프로젝트가 으레 그렇듯 다시는 온전히 복원될 수 없는 채로 사라질 것이다. 그게 좀 쓸쓸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당연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전시는 시간에 동화되어 있다. 시간이 지나면 전시는 막을 내린다. 그럼에도 나는 책들로 이루어진 이 작은 전시에 대해 기록을 남기는 중이다. 여기 한구석에 이렇게 엷고 묵묵한 책의 시간이 있었다고, 전시된 책들은 인쇄물답게 조용했고, 인쇄물답게 오래 남을 것이라고. 요즘 나는 이런 것을 기록하고 그 기록을 엮어 다시 책으로 만들려 하고 있다. 책들의 시간에 관한 책을 쓰는 것, 그게 그 시간에 비해 늘 새파랗게 어리고 어릴 나를 사로잡은 일이어서다.

 


1. 최성자, 「굿판에서 찾아낸 인간의 기록」 중 김수남의 아들 김상훈의 말, 『김수남』, 열화당, pp. 8-9.
2. 조세희, 「종이거울 속의 슬픈 얼굴」, 『최민식』, 열화당, p. 3.


최영건 연세대학교에서 국문학과 신학을 전공하고, 동대학원 국문학과를 석사 졸업했다. 『문학의 오늘』 신인문학상(2014),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크로스로드 프라이즈(2021)를 수상했다. 장편 소설 『공기 도미노』(2017)와 단편집 『수초 수조』(2019), 공저 『키키 스미스 -자유 낙하』(2022) 등이 있다. 기억과 복원, 메타모르포시스를 다루는 예술에 관심을 갖고 소설과 에세이를 쓰며 번역과 기획을 하고 예술 도서를 만드는 중이다.

 

* 《쿨투라》 2023년 10월호(통권 11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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