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이 슌지 감독] 재해와 개인의 경험 사이, 기억이 노래가 될 때: 〈키리에의 노래〉로 돌아온 이와이 슌지
[이와이 슌지 감독] 재해와 개인의 경험 사이, 기억이 노래가 될 때: 〈키리에의 노래〉로 돌아온 이와이 슌지
  • 이지혜(영화평론가)
  • 승인 2023.11.03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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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개봉 이후, 겨울이 오면 크고 작은 극장에서 상영되는 오래된 영화가 있다. 바로 〈러브레터〉(이와이 슌지,1999)다. 명대사 “오겡기데스까?(잘 지내고 있나요?)”로 세기말 겨울 감성을 견인했던 이와이 슌지 감독이 신작 〈키리에의 노래〉(이와이 슌지, 2023)를 들고 27년 만에 한국을 찾았다. 이와이 슌지 감독은 부산국제영화제1 회 당시 〈4월 이야기〉로 초청을 받아 부산을 방문한 경험이 있다. 〈키리에의 노래〉는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이하 부국제) ‘아시아 영화의 창’ 부문에 공식 초청되었으며 11월 1일 국내 개봉 예정이다. 월드 프리미어 상영이 끝나고 신작으로 부산을 찾은 이와이 슌지 감독을 만났다.

정말 오랜만에 한국을 찾으셨지요?

아는 분들도 있겠지만 1996년에 영화 〈4월 이야기〉로 부국제(1회)의 초청을 받았습니다. 아무래도 제 커리어와 함께 발전해 온 영화제라 그런지 형제나 동창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친근감이 느껴집니다. 대략 27년 만에 새 작품으로 초청을 받아 부산을 찾을 수 있어서 반갑고 기쁩니다. 어제 오늘 새로운 세대의 젊은 팬분들을 많이 만났는데 그런 부분도 특별하네요.

많은 일본인이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동일본 대지진과 쓰나미를 소재로 영화를 만드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재해의 상흔이 현재진행형인 만큼 관객의 정서 등 고려할 사항도 다양했을 것이고요. 저는 동일본 센다이(미야기현)라는 도시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대지진이 일어난 2011년 당시 큰 피해와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고 직후에는 트라우마 극복을 위한 프로젝트 ‘꽃이 핀다’에 10년 동안 참여하며 노래 가사를 작사하기도 했어요. 따라서 지진 그 자체를 매우 가까운 존재처럼 느꼈습니다. 그러다보니 언젠가는 본업인 영화로 표현하거나 다뤄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12년이 지난 지금이 그 시기가 되었다고 봅니다.

어찌 보면 지진이라는 큰 재해를 사건 그대로가 아니라 영화로 표현하는 건 사실 좀 불가능한 일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감독으로서 할 수 있는 부분을 더 고민했습니다. 결과적으론 개인의 차원과 경험적 측면에서 지진을 어떻게 받아들이거나 맞서는지에 대해 보여주기로 했습니다. ‘지진이라는 재해와 개인의 경험 사이에 있는 어떤 것은 내가 감독으로서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 〈키리에의 노래〉를 만들었습니다.

특히 나츠히코(마츠무라 호쿠토 분)에 대한 캐릭터 설정과 에피소드 일부는 대지진 1년 후 구상을 완료했는데요, 나츠히코 부분 외 이야기는 미완성이었고 엔딩도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로부터 12년이라는 시간을 거친 지금에서야 〈키리에의 노래〉라는 영화를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지진이나 쓰나미 등이 몰고 온 피해와 상처는 여전히 해결된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계속해서 함께해야 하는 주제이지 않을까 생각해요.

영화제에서 상영된 감독판은 극장판보다 상영시간이 1시간가량 길어요. 〈키리에의 노래〉는 모든 등장인물의 성격이 다층적이고 모순적인 면모를 갖고 있어서 특히 장면마다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이런 특징을 살리기 위해 편집을 할 때 아무래도 더 신경을 쓴 부분이 있을 것 같은데요.

등장인물 중 잇코(히로세 스즈 분)의 삶에 대해 설명하고 싶습니다. 고등학생 때의 잇코와 성인이 된 잇코의 가치관은 고작 3년이라는 시간 사이 180도 돌변해요. 이 점이 가장 모순적으로 보일 것 같은데, 저는 잇코라는 캐릭터를 통해 도쿄도 미나토구라는 지역 속에서 일본이 갖고 있는 전형적 어둠의 패턴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부산에서 상영된 감독판을 보고 혹시라도 잇코의 삶을 더 들여다보고 싶어졌다면 제가 쓴 동명의 소설을 한 번 읽어봐 주시길 조심스럽게 권유하고 싶습니다. (웃음)

그리고 일본에서는 감독판도 일반 극장에서 상영됩니다. 아무래도 나라마다 정서가 다르다 보니 2시간 분량으로 편집해달라는 요청을 많이 받았는데, 감독으로서는 아끼는 장면을 잘라내느라 정말 힘들었습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이 영화가 2시간짜리 〈키리에의 노래〉에 1시간 정도 공연이 있다는 것 입니다. 그래서 관객들이 영화만 즐기는 것이 아니라 키리에(아이나 디 엔드 분)의 공연을 보러 온다는 생각도 해 주시면 좋겠어요. 편집 또한 “음악을 살리자!”라고 생각했고, 최대한 영화 속의 음악을 소중히 다루고자 노력했습니다. 사실 2시간짜리 영화를 본 관객은 3시간짜리 영화도 다시 한번 봐주시리라고 믿으며 편집했어요. (웃음) 그리고 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 6곡의 노래를 제작했습니다. 키리에라는 역할 자체가 노래 외에는 말을 하지 않는 설정이기 때문에 ‘비명에 가까운 방식으로 노래를 전달해야 사람들에게 간절한 메시지가 전달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촬영에 임했어요. 그래서 노래하는 기술, 노래의 세련미, 멜로디의 아름다움을 고려하기보다는 내장 속부터 내뱉는 소리, 영혼에서 찢어져 나오는 비명의 감정이나 극치 같은 부분을 전달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곡 작업을 했습니다. 편집에서 그런 부분을 최대한 살려보려고 노력했구요.

〈키리에의 노래〉에 등장한 6곡의 노래 중 한 곡을 이와이 슌지 감독이 작사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어떤 곡인지, 어떤 마음으로 작사하셨는지요.

〈혼자가 좋아〉라는 노래를 작사했고 아낍니다. ‘우리 앞으로도 소중한 친구로 남자. 나는 네가 소중해. 이 노래를 들어줘. 난 혼자가 좋아’라는 식의 조금 아이러니하고 웃기기도 한 가사예요. 언젠가 대본에 이런 내용의 곡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메모 같은 시를 적어둔 적이 있는데, 이 시를 바탕으로 아이나가 멜로디를 만들었어요. 이 노래는 영화 후반부 바다에서 키리에와 잇코가 함께한 장면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이 곡을 녹음할 때 신경을 꽤 많이 썼어요. 후반부 믹싱 작업도 제가 직접 했는데, 최대한 버스킹의 현장감을 살리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음악 영화를 제작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어요. 스튜디오에서 음악을 따고 거기에 맞는 연주 장면을 나중에 촬영할 수도 있죠. 저는 이 영화에서 생동감 있는 음악을 관객에게 그대로 전달하고 싶어서 좀 더 노력했습니다. 예를 들어 촬영팀 반대쪽에 빌딩이 있다면, 소리가 반사될 것을 계산하고 빌딩까지의 거리가 몇 km인지, 소리가 부딪혀 반사되는 총소요 시간이 몇 초인지 계산하면서 녹음했어요. 이러한 작업이 모두 버스킹의 현장감을 살리기 위한 것이죠. 정말 즐거웠습니다. (웃음)

〈키리에의 노래〉는 감독의 전작들과 달리 관객이나 평단의 호불호가 갈릴만한 장면이 꽤 있어 보입니다. 이와이 슌지 감독의 오랜 팬이기도 한 저도 영화 후반부에서 루카(키리에)가 성범죄에 노출되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장면은 촬영기법이나 전개 방식이 좀 낯설게 느껴졌어요. 혹시 이 장면에 대해 조금만 더 설명 해주실수 있을까요?

루카(키리에)라는 캐릭터를 만들 때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게 아니라 노래로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인물로 설정했어요. 주연배우인 아이나 디 엔드도 고등학생 때 영화 속 키리에와 비슷한 시절이 있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캐릭터의 그런 부분을 부각해서 말이 아닌 노래로 소통하는 방식을 활용하다 보니 화면으로 보여지는 장면이나 전개 방식이 낯설게 느껴질수도 있었을 것 같아요.

또 말씀하신 대로 성범죄 관련 장면이나 일부 장면이 관객에게 불편하게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이야기의 흐름상 꼭 필요한 부분이었어요. 연출 방식에 대해서는 정말 말씀드리고 싶은 내용이 있는데요, 이 영화의 어떤 부분은 제가 정말 사랑하는 일본 영화 〈하나레 고제 오린Hanare goze Orin〉(시노다 마사히로, 1977)(이하 〈오린〉)의 오마주예요. 이 영화의 철학을 담고자 시도한 부분이 있습니다. 제 작품 중에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1996)도 이 영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할 수만 있다면 〈오린〉의 시노다 마사히로 감독님께 “〈키리에의 노래〉는 〈오린〉의 리메이크작”이라고 말씀드리고 언젠가 꼭 이 영화를 봐달라고 부탁드리고 싶어요. 그 정도로 〈키리에의 노래〉에서 몇 가지 포인트를 재현하기 위해 신경 썼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키리에의 노래〉를 보는 관객도 가능하다면 〈오린〉을 보고 ‘이 장면이 이렇게 재현되었구나’ 찾아보며 영화를 즐기는 시간을 가져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오린〉은 ‘미야가와 카즈오’가 촬영했는데, 여러 장면이 정말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이 인터뷰를 보는 모든 분들이 〈오린〉도 꼭 봐주셨으면 합니다.

영화에서 중요하게 사용되는 요소 중 하나가 ‘파란색’이죠? 키리에가 공연할 때 입는 옷, 잇코의 머리색, 잇코가 키리에에게 들고 가는 꽃다발의 색도 파란색입니다. 이와이 슌지 감독의 영화는 늘 특정 모티브가 뚜렷하게 강조되는데, 이번에는 파란색이 주된 요소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 파란색이 한 가지 의미로 해석되기보단 다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 같아서 특별하게 느껴졌어요.

제가 구상한 키리에는 집 없이 떠돌아다니는 여자아이였어요. 집 없이 떠도는 키리에를 안타까운 시선으로만 볼 게 아니라, 집이라는 어떻게 보면 갇힌 공간에서 벗어나 상흔을 딛고 이 세상 모든 푸른 하늘 아래를 자신의 집으로 삼아 하고 싶은 말들을 노래로 하고자 하는 자유로운 여성임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이런 부분에서 파란색이 다의적으로 사용된 것 같아요. 특별하게 봐주셨다니 고맙습니다.

동일본 대지진으로 가족을 잃은 소녀 루카가 거리 곳곳에서 슬픔과 희망을 노래하는 키리에로 변모하는 과정을 담은 영화 〈키리에의 노래〉는 역설적으로 이와이 슌지 감독의 전작들을 전부 떠오르게 한다. 첫 GV에선 한 관객이 “〈키리에의 노래〉는 감독 자신의 영화적 세계를 한 번 마무리 하는 듯 오마주 한 영화처럼 느껴진다. 〈러브레터〉와 〈4월 이야기〉(2000), 〈릴리슈슈의 모든 것〉(2005) 등 수많은 장면이 보였다. 의도한 부분인가.”라고 묻는 질문도 있었다. 감독은 “전혀 의도된 연출은 아니었다. 제 취향이 겹친 것 같다.”라고 웃으며 대답했다. 또한 자신의 전작 중 〈라스트 레터〉(2021)를 언급하며 “일전에 배두나와 함께 찍은 단편영화〈장옥의 편지〉(2017)가 〈라스트 레터〉의 시초인데, 두 영화 속에 등장하는 소설이 있다. 영화 속에 소설 내용이 나오진 않지만 소설 속에서 독립영화를 찍는 내용이 있는데, 그 영화가 이번 〈키리에의 노래〉의 바탕이 되었다.” 라고 밝히기도 했다.

인터뷰를 마치며 이와이 슌지는 주제 특성상 즐거운 장면도, 무거운 장면도 있지만 결과적으론 푸르고 파릇파릇한 영화였으면 좋겠다고 진심을 전했다. 끝으로 처음에는 영화를 보기 위해, 두 번째로는 공연을 감상한다는 생각으로 극장을 찾아달라고 당부했다.

이날 인터뷰는 부산에서 상영된 감독판을 기준으로 진행되었다. 10월 26일 기준 열린 <키리에의 노래> 일반판 언론배급상영회에서는 인터뷰에서 질의했던 성범죄 관련 씬이나 잇코의 이야기가 대폭 삭제되었다. 평론가의 시선으로 일반판과 감독판은 완전히 다른 영화다. 일반판은 슌지 영화의 계보로 분류하자면 화이트슌지, 감독판은 블랙슌지 쪽으로 갈음할 수 있겠다. 어떤 방법으로도 영원히 다독여지지 않는 상처가 있다. 그런 상처는 상처입은 사람의 기억에만 남아 삶 자체를 덧나게 만든다. 〈키리에의 노래〉 속 루카는 보이지 않는 상처를 끄집어내려는 사람들에게, 재해의 기억을 진술하는 대신 입을 다물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키리에가 되어 비명을 노래한다. 루카가 끝까지 키리에로 산다고 할지라도, 쭉 혼자이기로 결심해도 그녀가 외롭지 않기를 늘 자유롭기를 가만히 바랐다.

 

사진 제공 부산국제영화제, 미디어캐슬

 


이지혜 영화평론가. 제16회 《쿨투라》 신인상 영화평론으로 등단. 경희대 K-컬처·스토리콘텐츠 연구소 연구원A로 동대학에서 강의. 2023 전주국제단편영화제 전북 부문 심사위원, 《쿨투라》 및 《코아르》 등에 영화평론을 기고하며,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국내판에 문화평론을 연재한다.

 

 

* 《쿨투라》 2023년 11월호(통권 11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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