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성질이라는 감정의 세계, 감정이라는 성질의 위계: 〈엘리멘탈〉
[영화 리뷰] 성질이라는 감정의 세계, 감정이라는 성질의 위계: 〈엘리멘탈〉
  • 권두현(동아대학교 젠더·어펙트연구소 전임연구원)
  • 승인 2023.11.03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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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발 방사성 오염수 논란이 폭염만큼 달아오른 2023년 8월, 광화문의 교보문고에는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가 ‘베스트셀러’라는 소개와 함께 놓여있었다. ‘오펜하이머’에 관한 이 책이 근간은 아니다. 이제 막 개봉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펜하이머〉에 대한 각계의 찬사와 그만큼의 논쟁이 책의 볼륨만큼이나 풍부하게 벌어지고 있었고, 그 결과 이제야 다시금 이 책이 주목받게 되었을 것이다.

‘프로메테우스’라는 비유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오펜하이머를 이해하는 데 신화적 계보가 동원되고 있고, 그 계보에 남성과 테크놀로지가 함께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이 둘은 곧잘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오펜하이머와 원자폭탄이 그렇고, 〈오펜하이머〉라는 영화가 크리스토퍼 놀란의 작품으로 소개된다는 점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세계를 통합하는 중심 거점과도 같은 ‘주체subject’로서 오펜하이머의 관점이 아니라, ‘행위자agent’의 관점에서 사건과 이를 포함한 물질계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행위자란, 자율적으로 사고하는 독립적 인간의 형상을 한 데카르트적 주체를 넘어, ‘생동하는 물질’로서 비인간의 역량까지를 아우르는 개념이다. 이러한 행위자가 만드는 세계에 대해 관심을 가진 과학자가 있었다. 바로 캐런 바라드다. 바라드는 닐스 보어의 양자역학으로부터 힌트를 얻어 관찰 장치와 관찰 대상이─각각 주체와 객체가 아니라─행위자로서 분리불가능하게 뒤얽혀 있는 세계를 설명하는 ‘행위적 실재론’을 펼쳤다. (닐스 보어는 케네스 브래너의 연기를 통해 〈오펜하이머〉에도 등장한다.)

기술을 도구로 삼아 세계를 정복하는 근대적 주체의 자명함 또는 투명함을 재검토하기 위해 페미니즘 및 탈식민주의 비평은 많은 일들을 수행해왔다. 이와 같은 비평적 관점에서 영화계와 문화계를 본다면, ‘프로메테우스’의 후예인 서구 백인 남성이 아니라, 훨씬 더 다양한 주체 또는 주체화되지 못한 것으로 여겨져 온 신체의 형상들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다. 이 형상들은 〈파친코〉랄지, 〈성난 사람들〉 같은 작품들을 통해 출현한다. (《쿨투라》 7월호에는 〈파친코〉와 〈성난 사람들〉에 대한 흥미로운 글이 동시에 실려 있었다.) 〈파친코〉와 〈성난 사람들〉은 ‘프로메테우스’는 아닐지언정 엄연한 ‘아메리칸’을 다루고 있다. 두 작품을 통해 출현하는 아메리칸은 ‘아시안-아메리칸’ 또는 ‘코리안-아메리칸’이다. 두 작품에서 아시안-아메리칸은 배역으로, 또한 배우로, 더 나아가 이민진과 이성진이라는 작가의 페르소나와 함께 그 모습을 드러낸다.

관객은 플랫폼이라는 장치를 통해 〈파친코〉(애플 티비+)와 〈성난 사람들〉(넷플릭스)의 아시안-아메리칸을 관찰할 수 있다. 여기서 플랫폼은 행위자이고, 〈파친코〉와 〈성난 사람들〉이라는 작품은 물론, 여기에 등장하는 아시안-아메리칸의 형상도 마찬가지의 행위자이다. 관객은 플랫폼이 시시각각 전파하는 시청각 코드와 뉴로-시냅스의 화학적 작용뿐만 아니라, 정동적 작용을 통해 그들 신체와 뒤얽혀 있다. 그 정동은 인격화된 감정을 통해, 다시 한번 얼굴에 나타난 표정을 통해 화면을 장악한다.

아시안-아메리칸의 표정은 ‘아메리칸’의 감정 패러다임에 따라 다양한 이름을 부여받는다. 그 감정은 종종 ‘아시안’이라는 정체성과 밀접한 ‘마이너 필링’으로 여겨진다. 표정 너머, 아시안-아메리칸의 감정은 내적 감정과 객관적 현실, 정동적 의식과 물질적이면서 정치적인 조건 사이의 경계에서 작동한다. ‘마이너 필링’이 아시안-아메리칸의 내면을 향하는 약한 감정이라면, 아시안-아메리칸의 외부에서는 ‘어글리 필링’이라는 상대적으로 강한 감정으로 이들을 포착한다. 예를 들어, 감정 분류법상 부정적인 감정인 ‘분노’는 사회적이거나 경제적인 불평등을 실제로 인식하는 것일 수 있지만, ‘아메리칸’의 지배적인 문화는 분노를 ‘아시안’의 인종화된 감정으로, 더 나아가 이러한 고정관념의 논리에 따라 끝내 사소한 감정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점에서 코리안-아메리칸 2세인 피터 손의 손에서 만들어진 〈엘리멘탈〉은 인종의 경계를 초월하는─결코 사소하지 않은─긍정적인 감정으로서의 ‘사랑’과 함께 아시안-아메리칸, 보다 정확하게는 코리안-아메리칸을 전경화한다는 점에서 이채롭다. 다만, 코리안-아메리칸의 얼굴은 〈엘리멘탈〉에서 결코 자명하거나 투명하지 않다. 코리안-아메리칸에 해당하는 앰버가 ‘불’이라는 원소의 형상으로 대체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엘리멘탈〉을 통해 목격하게 되는 것은 인종화라는 것이 과거에는 대부분 혐오스러운 표현을 담고 있는 상징의 동원을 의미했다면, 이제는 그것이 다분히 인도주의적인 구현embodiment의 아카이브와 관련하여 협상되는 장면이다. 〈엘리멘탈〉에서 캐릭터의 원자화는 얼굴과 피부를 통한 도상적 인종화를 우회하기 위해 선택되었을 것이다. 작품이 다분히 근미래적 설정을 취하고 있을지언정, 그 우회로는 고대 그리스로 길을 내고 있다. 불과 물, 흙과 공기 등 〈엘리멘탈〉의 4원소는 고대 그리스인이 상상한 세계의 행위자들이다. 다만, 작품에서 유독 ‘불’만큼은 ‘엘리멘트 시티’로부터 분리되어 있는데, 이 설정이 ‘이민법’으로 상징되는 아시안 배제와 혐오에 따른 것임을 짐작하기란 그리 어렵지않다. 그런 점에서 ‘불’의 속성을 가진 앰버가 언제든 불타오를 수 있다는 설정은 인종차별 논리의 불가능한 요구에 대한 증상적 반응의 함의를 가지게 된다.

〈엘리멘탈〉의 사례는 인종화된 개인과 집단이 ‘가시성’이라는 담론적이고 기술적으로 매개된 공간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게 되는지를 숙고하게 한다. 아시안-아메리칸 학자로서 멜 Y. 첸은 행위자로서의 무생물인 납의 유생성有生性, 즉 애니매시animacy가 중국인의 이미지와 긴밀하게 연결됨으로써 미국 사회와 가정에 위협적 이미지로 등장하고 유포된 사실을 설명해 보인 바 있다. 위협적 속성으로서의 불과 한국인의 연결 또한 이러한 논리와 같은 맥락에 놓인다.

〈엘리멘탈〉에서 무엇보다도 ‘한국적인 것’은 다름 아닌 ‘불’의 형상에 뒤얽힌 감정적 속성이다. 유색인종을 지나치게 발랄하거나 활기차거나 정열적인 것으로 재현할 때, 감정이라는 개념 자체는 인종차별적이 될 수 있다. 유색인종에 대한 이러한 과잉된 생동감animatedness은 눈물을 통해 드러나는 공감의 역량이 백인 남성 주체에게 귀속되는 인종적 논리의 역설적 지표가 된다. 웨이드의 인종적 표현으로서 ‘물’은 기본적으로 도시의 인프라에 해당한다. 물이 초래할 수 있는 누수 및 홍수는 인프라의 고장 또는 붕괴로서 불이 수도관을 망가뜨렸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앰버는 성질을 누그러뜨려야 한다. 그 성질은 곧 감정이다.

피터 손이 직접 언급했다시피, 〈엘리멘탈〉은 코리안-아메리칸으로서 자신의 감정에 형상을 부여한 애니메이션이다. 그 자체로서 인종화되고 젠더화된 감정은 물질적 조건과 사회적 불평등을 진단할 수 있다. 아시안-아메리칸 여성의 감정은 바로 그러한 진단을 위한 중요한 징후적 단서다. 〈엘리멘탈〉이 그려보이는 경계를 초월한 낭만적 관계는 인종적 위계를 은폐하고, 웨이드의 역량과 등가를 이루는 관객의 공감은 이러한 위계를 유지시키는 인프라로 흡수된다. 우리에겐 공감과 찬사만큼이나 비평의 언어가 필요하다. 아시안-아메리칸 또는 코리안-아메리칸의 감정에 대한 관심은 뚜렷한 행위자성을 확보한 주체로서의 코리안-아메리칸 크리에이터가 ‘애니메이션 제국’에서 이룬 가시적 성취에 대한 관심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다.

 

사진제공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권두현 동아대학교 젠더·어펙트연구소 전임연구원. 동국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동국대와 동아대에서 강의한다. 각종 대중문화를 대상으로 언표 너머에서 몸이 하는 다양한 일들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 《쿨투라》 2023년 11월호(통권 11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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