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안내] 신정일 시집 『아직도를 사랑하는 까닭은』
[신간 안내] 신정일 시집 『아직도를 사랑하는 까닭은』
  • 쿨투라 cultura
  • 승인 2023.11.15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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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그 섬이 어딘가에서 푸른빛 단장을 하고
여전히 나를 기다릴 것만 같다

서정의 詩바다에 다다른 ‘길의 정령’

- 신정일 시집, 『아직도를 사랑하는 까닭은』

걷기 열풍을 가져온 도보답사의 선구자가 펴낸 새 시집

가장 많이 걷는 이 시대의 인문학자, ‘우리땅걷기’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신정일 시인이 두 번째 신작 시집 『아직도를 사랑하는 까닭은』을 도서출판 작가에서 출간했다.

시인은 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이사장으로 우리나라에 걷기 열풍을 가져온 도보답사의 선구자다.

1980년대 중반 ‘황토현문화연구소’를 설립하여 동학과 동학농민 혁명을 재조명하기 위한 여러 사업을 펼쳤으며, 1989년부터 문화유산답사 프로그램을 만들어 현재까지 ‘길 위의 인문학’을 진행하고 있다.

또한 한국 10대강 도보답사를 기획하여 금강·한강· 낙동강·섬진강·영산강 5대강과 압록강·두만강·대동강 기슭을 걸었고, 우리나라 옛길인 영남대로·삼남대로·관동대로 등을 도보로 답사했으며, 400여 곳의 산을 올랐다. 부산에서 통일전망대까지 동해 바닷길을 걸은 뒤 문화체육관광부에 최장거리 도보답사 길을 제안하여 ‘해파랑길’이라는 이름으로 개발되었다.

2010년 9월에는 관광의 날을 맞아 소백산자락길, 변산마실길, 전주 천년고도 옛길 등을 만든 공로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저서로 자전적 이야기인 『느리게 걷는 사람』을 비롯하여 시집 『꽃의 자술서』 , 『왕릉 가는 길』 . 『신정일의 신 택리지』(전10권), 『신정일의 동학농민혁명 답사기』 등 100권이 넘는 저서를 펴냈다.

4부로 나뉘어져 총 62편의 시를 수록한 신정일 시인의 『아직도를 사랑하는 까닭은』에는 시인이 걷고 또 걷는 이유에 대한 문답이 시편으로 오롯이 담겨있다.

시인은 삶의 목적이 길 위에 있는 것처럼 걷는다. 신정일의 사유는 길 위에 있고, 길은 몸으로 쓰는 원고지인 셈이다. 그는 오늘도 걷고 있을 것이며, 길에 대한 원고를 쓰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걷는다’는 행위와 ‘쓴다’는 행위는 그에게 ‘왜 사는가’와 같은 실존의 물음과 같다. 이처럼 ‘아직도’라는 단어는 신정일 시인이 육필로 쓰는 시의 문법인 셈이다.

 

책에서 책으로, 길에서 길로 이어진 생활,

그 길에서 만나고 헤어지는 몇 사람들과

단조롭기도 하고, 경탄을 자아내게 하는 풍경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닌 ‘길 위의 사람’이다.

그렇게 길에서 보낸 나날이 많았고,

살만큼 살았는데도

가끔씩 길에서 길을 잃고 헤맬 때가 많이 있다.

이것이 나의 길인가 싶어서 안도하면서 잠시 걷다가 보면

그 평온하던 길이 어느새 사라지고 다시 악전고투의 시절이 돌아온다.

눈앞이 캄캄한 고난 속에서, 더 이상 걸을 수가 없다는 느낌이 올 때

기다리고 기다리던 시가 나온다.

- 「시인의 말」 부분

 

시인은 “시는 곤궁한 다음에야 나온다.(詩窮而後工)”는 구양수의 말을 실감하며, “길은 잃을수록 좋”고 “더 많이 길을 잃고 헤매야 하는 그것이 내 운명”이라고 말한다. 시집의 제목을 ‘아직도’라는 단어로 시작한 것도 ‘걷는 인류’의 숙명을 이어받은 종족의 후예임을 자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현생 인류는 아프리카 대륙의 칼라하리 사막을 떠나 약 6만 년 전부터 걸어왔다. 걷는 행위는 인류사의 기원인 셈이다. 정착지를 벗어나 위험을 무릅쓰고 처음 걸어간 이는 누구였을까? 시인은 인도와 중국을 거쳐 한반도까지 걸어온 그들의 후예인 셈이다. 현생 인류가 정착지를 떠나 걸어간 것은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손민호 중앙일보 레저팀장은 “신정일 선생으로부터 ‘길’과 ‘글’은 모음 하나 차이라는 걸 배웠다. 길을 걷다 보면, 걷는다 생각하지 않고, 여기저기 두리번거리고 어정거리며 해찰하면서 살다가 보면, 길이 글이 되는 이치를 휘적휘적 앞서 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 알았다. 글에도 스승이 있듯이 길에도 어른이 계시다. 내 책장에 또 한 권의 길을 모신다.”고 말한다.

 

‘아직도’라는 섬은 시적 화자의 이상향

신정일 시인은 역사의 현장을 걷는 자신의 모습에서 역사적 인물의 고뇌를 발견한다. 그래서인가. 이 시집에서는 ‘아슬아슬’하다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시인은 가파른 절벽의 잔도를 걷듯 ‘아슬아슬하게’ 걸어왔다. 시인이 길에서 보낸 시간의 사유가 이번 시집 『아직도를 사랑하는 까닭은』에서는 부정에서 긍정을 찾는 희망의 어법으로 표현된다. 이번 시집의 표제시는 길의 시인이 자신의 다른 모습을 찾아가던 실존의 기록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내가 ‘아직도’라는 말을

사랑하는 까닭은

내 마음속에

이해할 수 없는,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그리움이

파도처럼 넘실거리기 때문이다.

(중략)

내가 ‘아직도’라는 말을

사랑하는 까닭은

아직도 그 섬이

어딘가에서 푸른빛 단장을 하고

내게 들려줄 절절한 이야기를 간직한 채

여전히 나를 기다릴 것만 같기 때문이다.

- 「아직도를 사랑하는 까닭은」 부분

 

‘아직도’라는 섬은 시적 화자의 이상향이다. ‘아직도’는 과거의 특정한 공간이자 미래의 가상의 공간이자, 시인의 정신적 지향을 말놀이를 통해 장소성으로 구현한 것이다. 그것은 ‘오늘도’라는 구체적 시간과 ‘어딘가’라는 불확정적 장소와 만난다. ‘아직도’의 사전적 정의를 살펴보면 어떤 일이나 상태가 완성되기까지 시간이 더 지속되어야 함을 나타낸다.

따라서 이 시를 문맥적으로 살펴보면 시인이 ‘사랑하는 까닭은’ 시인의 목적이 완성되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아직도’는 시인의 역사적 시공간과 소통하고자 하는 삶의 문법일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모든 순간의 모든 시도가 완성되지 못했지만, 여전히 그것에 도달하기 위해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겠다는 다짐이다.

그리하여 ‘아직도’라는 삶의 자세를 통해 시인은 길을 걷고 역사와 질문한다. 그것은 ‘아직도’가 자신을 ‘기다릴 것만 같다’는 낭만적 희망에 기인한 것이다. 한 번도 가지 못했으나 여전히 ‘아직도’라는 섬을 찾는 그의 자세는 부조리극의 대가인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떠올리게 한다. 부정의 부정은 강한 긍정을 낳는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까지 시인의 삶의 자세는 유지될 것이다. 베케트의 소설에서 앙상한 나무 아래,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에게 시인은 스스로 고도가 되어 찾아간다. 아직 오지 않았다고 그렇다고 결코 오지 않지는 않을 것이라는 부정의 부정을 통해 시인은 부조리한 세계를 넘어서려 한다.

아마도 시인이 ‘아직도’를 찾게 되는 날은 시인이 평생 추구했던 길에 대한 사랑이 완성되는 시점일 것이다. ‘아직도’는 경험하지 못한 상상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은 길을 걸으며 ‘아직도’에 가까운 이상향의 형태를 과거의 한 순간에서 찾으려 한다. 시집에 등장하는 색채적 이미지가 흐릿하고 희미한 것은 그 때문이다. 시인의 길 찾기는 ‘아직도’ 지속되어야 하는 것이다.

 

추억의 한 장면으로 그려진 시인의 유년 시절

 

반딧불이 지천이던 시절

한밤중에 반딧불 서너 마리를 잡아

꽃 속에 넣고 꽃을 오무리면

등불이 되어

깜빡거리던 호박꽃!

내 유년을 쓰라리게 밝히는 꽃

─ 「호박꽃」 전문

 

시인의 유년 시절이 추억의 한 장면처럼 서정적 이미저리로 그려진다. 시인은 반딧불이 지천이던 시절 호박꽃 속에 반딧불이를 넣어 ‘호박꽃 초롱’을 밝히던 시절에서 지금까지 이어온 시간을 반추한다. 이는 첫 시집에서 사실적으로 드러난 가난의 풍경과 시적 자아가 화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시인은 호박꽃송이를 오므리던 유년의 기억을 회상하며 고향 집으로 찾아간다. 과거의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호박꽃에서 깜박이던 반딧불이처럼 ‘유년을 쓰라리게 밝힌다.’ 시인이 떠올린 낭만의 충동으로 닿은 곳은 ‘고향’이라는 단어일 것이다. 떠도는 자에게 고향은 영원히 가 닿을 수 없는 상실된 장소다. 시인은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의 이상향을 찾아 이곳에서 저곳으로 끝없이 걷는다.

시적 화자는 그 문 너머에 기척이 없음을 예감하고 있으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고리에 손을 얹는다. 아무도 없음을 알면서도 혹시나 기대하는 마음의 기원은 낭만적 충동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는 ‘아직도’가 주는 불확실성에 근거하고 있음으로 선명하지 못하고 흐릿하게 묘사된다. “어둠 너머 보이는 희미한 불빛” (「소리」), “흐릿한 호롱불 아래 물레가 돌아가고”(「이 잡는 남자」), “저 문을 열면/무엇이 보일까/고향 집 토방이 보일까//문을 닫고 추녀를 보니/이 집처럼 텅텅 빈/몇 개의 벌집”(「문 닫힌 점방」) 과거는 흐릿하고 희미하다.

 

구도의 행위, 실존을 확인하는 길

신정일 시인에게 길을 걷는 것은 ‘구도(求道)’의 행위다. 시인은 길 위에서 “차고 넘칠 만큼 방황했고,/충분히 고통스런 삶을 살았고./충분히 고독했다/세상에 수많은 길들을 걸으면서/세상의 많은 사람,/수많은 사람을 만났다/충분히 많은 책을 읽었으며,/충분히 슬펐고 쓸쓸했다”(「여한이 없다」) ‘여한이 없다’는 말은 부정의 부정이다. 시인이 그동안 걸었던 길은 선인들이 걸었던 길. 그가 다시 걸었던 길은 “굶어 죽고, 얼어 죽고./병들어 죽고, 매 맞아 죽고./그리고 성 쌓다가 깔려서 죽고.”(「고사부리성에서 오사(五死)를 생각하다」) 역사의 뒤안길로 쓸쓸히 패배한 민중의 길이다. “시누대가 겨울바람에 떨고/나무들이 바람에 우수수 눈을 떨구는”(「북미륵암 가는 길」) 길을 걸어 도착한 곳은 미륵암이기도 하고 항구이기도 하고, 또 다른 길의 끝이기도 하다. 시인은 역사가 된 길을 다시 걸으며 ‘산다는 것은 길을 걷다가 죽는 일’이라는 것을 문득 깨닫는다. 고희의 나이에 ‘아직도’ 길에서 사유하고 길에서 쓰는 그를 ‘길의 사제’라고 불러도 좋으리라.

이번 시집에서 등장하는 밤과 관련된 시어는 자신을 돌아보는 상념의 시간을 의미한다. 밤은 고독이 오롯이 시인을 둘러싸는 시간이다. “밤이 어느 순간 내려왔습니다./살며시 내려앉은 밤의 한가운데서/나는 창문을 활짝 열지 않고/반쯤만 열어둡니다/오는 꿈도 가는 꿈도/여미가 있어야 할 것이니까요/(중략)/저 혼자서 슬픔에 잠겼다가/새벽녘에서야 깨어날 것입니다”(「반딧불 켜진 밤에」), “지금은 깊은 밤/문을 다 열어 놓았습니다”(「밤손님께」) 등의 시편이 그렇다. 밤은 슬픔과 회한이 밀려오는 홀로 된 시간이며, 고독을 확인하는 시간이다. 존재의 고독을 견디는 자가 새벽을 기다리는 것은 깨달음의 시간을 희구하기 때문이다.

또한 신정일 시인에게 ‘걷는다’는 행위는 실존을 확인하는 길이다. 시인은 “거리를 걸어가다가/눈에 띈 국숫집에 들어가/국수 한 그릇을 시키고/거울에 비친”(「국숫집에서」) 자신의 낯선 모습을 물끄러미 보며 ‘그가 나인가, 내가 그인가?’라고 자문한다. 먼저 걸었던 이들의 발자국을 따라 옛길을 다시 걷는다는 것은 죽은 이의 타협하지 않는 정신을 상기하는 것. “길이 너무 아름다워서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머뭇머뭇 멈칫멈칫/주위를 맴돌기만 할 때”(「김일손」) 시인이 발견한 역사적 시공간은 치열하게 현현한다. 과거의 인물과 함께 걸으며 시적 화자는 정서적 황홀감에 빠진다. 김일손은 세조의 찬위를 풍자한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적었던 연산군 때의 사관이다. 당대 권력자들에게 강직했던 그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자신의 모습을 비춰본다. 걷는 행위는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실감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누더기 못 벗은 세월을 살게 하는/먼 듯 가까운 듯/그대 발걸음 소리”(「소리」)를 따라가는 행위다. 발걸음 소리는 걷는 행위가 계속될 때만이 지속된다. 그리하여 소리를 따라 걷는 그의 걸음은 멈출 수 없다. 길道을 찾아 걷는 사람은 구도자라 부른다. 지금은 사라진 보이지 않는 세계를 찾아 걷는 신정일 시인을 길의 구도자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꽃은 서사가 서정으로 변환될 때 새로운 서사의 가능성으로 개화

 

산은 깎아지른 벼랑에

구절초 싸리꽃을 피워놓고

아슬아슬한 잔도棧道까지 만들어 놓고

지나가는 사람과 소곤거린다

─ 「태항산」 부분

 

시인은 천길 낭떠러지의 협곡 사이로 아슬하게 난 잔도를 걸으며 역사적 인물과 상상 속에서 소곤거린다. 깎아지른 절벽에 피워낸 꽃을 ‘아직도’ 잊지 못하기에 시인은 ‘아직도’ 걷기를 지속하는 것이다.

시인이 싸우는 벽의 존재는 2019년 발간한 첫 시집(『꽃들의 자술서』)에서도 등장한다. “눈뜨면 벽/차디찬 벽이 있고/가까스로/밀어뜨리면/다시 벽이 있다/밀면 벽 /다시 밀면 벽/무너뜨려도/무너뜨려도/쏜살같이 나타나/태산처럼 나를 압도한다(「벽」 전문). 첫 시집에서 언급된 벽은 시인을 가로막는 현실적 한계를 의미했다. 그런데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벽과 싸우는 대신 절벽에 꽃을 피워낸다. 이 꽃은 시인이 견지한 고독한 정신의 고갱이를 의미한다. 꽃은 ‘벼랑에 홀로’ 핀다. 벼랑에 꽃을 아슬아슬하게 피워내는 정신이 시인이 현실을 견디게 한 삶의 자세다.

김미옥 문예평론가는 “길에서 쓴 시를 가슴으로 읽는다. 길 위의 사유와 길가의 풍경이 ‘걷는 사람’의 시가 되었다. 문득 뿌리내려 담장 오르는 능소화 앞에 발길이 멈출 때 유목과 정주의 먼 기원을 생각하며 떠나는 자의 그림자는 시를 닮았다.”고 평한다.

신정일 시집에 등장하는 꽃은 서사가 서정으로 변환될 때 새로운 서사의 가능성으로 개화한다. ‘꽃’은 시적 화자가 감각적으로 느끼는 바람이라는 실제계를 만나 촉매작용으로 개화된다. 시인이 벽(벼랑)에 꽃을 피워낼 수 있었던 것은 ‘백척간두에 선 절박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시인은 이제 ‘한 집안의 소망이 그려진 희디흰 벽’(「흰 종이 위에 쓴 말」 )에 꽃을 피워내는 힘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세계의 끝에서 새로운 길을 발견하듯이 막막함에서 꽃을 상상하는 반전의 시학이다. 이와 같은 예는 다른 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지나가는 바람결에 /그 향기 뿜어내면서/한 시절을 살다 갈/능소화여’(「능소화」), ‘저 빨간 양배추꽃’(「저것 봐, 저것 봐」), ‘희망과 기쁨의 꽃은/피어났을까?/그를 쓰러뜨린 총소리는/푸르른 하늘이 되고/들꽃이 되고’(「키릴로프」) 등이 그것이다. 호박꽃은 ‘유년을 쓰라리게 밝히는 꽃’ (「호박꽃」)이며, 달개비꽃은 ‘서러움도 모른 채 피고 지’며(「강은 흐른다」), 해당화는 ‘파도가 밀려오고 밀려가며 저녁이 내리는 소리’(「부안 솔섬에서」)와 함께 핀다. 시인은 ‘조선의 새악시 같은/탑 옆에 살구꽃 피고’(「비인 오층석탑에서」), ‘고마리 풀이 늪가에 가득/그 잎 위에 떨어진 꽃잎 한 송이’(「김포 장릉의 재실」)가 피었다 지는 순간을 ‘시간이 감기는 소리’로 듣는다.

 

역사에 ‘꽃’이 된 선인들의 흔적을 찾아서

이번 시집에 등장하는 역사적 인물은 당대의 시대정신으로 시대의 벽과 싸웠던 이들이며 현실에서는 실패했으나 그것으로 역사에 ‘꽃’이 된 이들이다. 시인은 역사적 장소를 답사하면서 시대의 벽과 싸웠던 선인들의 흔적을 찾아간다. 시인은 백제 무왕의 꿈을 익산에서 「비인 오층석탑에서」, 「미륵사지」, 「왕궁리 오층 석탑」을 찾고, 폐망한 백제의 부흥을 왕자 풍의 흔적 찾아 부안의 산사에서 만난다.(「개암사 겨울비」) 진도에서는 대동세상을 꿈꿨던 정여립(「죽도를 죽도록 사랑했던 한남자」)을 생각하고, 노정객 송시열이 유배길에서 만난 지명들을 하나씩 호명한다.(「위리안치」) 무오사화로 희생된 김일손(「김일손」)과 고려말 개혁을 꿈꿨던 이색(「여강에서 목은 이색」)과 풍찬노숙하던 독립군 안중근(「안중근」)등 시집에 등장한 이들은 ‘고도’를 기다리지 않고 전 생애를 바쳐 당대의 ‘고도’를 찾았던 인물이다. 하여, 시인은 삼한시대에서 근대시절 동학(「고사부리성에서 오사를 생각하다」)에 이르기까지 벽과 싸웠던 투쟁의 장소이며 패배할 줄 알면서도 당대의 강고한 벽에 도전하던 인물들의 꿈을 찾아 ‘아직도’를 구체화 한다.

 

그의 무너지고 쓰러지는 슬픔을 보다 못한 그 사람,

여기저기 수소문하여

사람들을 모으고, 그 사람들과 함께

벽절이라고 불리는 신륵사 앞, 여강으로 갔다

그리고 그를 위한 뱃놀이에 나섰다.

누군가 그를 위해 술 한 병을 보내왔고,

뱃놀이 시작에 앞서 술 한 잔을 따라서

그에게 주었다.

그런데 그만, 그 술 한 잔을 마시자마자

그 자리에서 피 토하고 그가 세상을 등졌다

─ 「여강(驪江)에서 목은 이색(李穡)」 부분

 

시인은 신륵사에서 고려삼은(高麗三隱)이라 불렸던 이색의 죽음을 떠올리며 한국 현대사를 반추한다. 시대에 저항하는 의인들의 죽음은 반복되는 것. 시인은 강물을 보며 “지금까지도 그 죽음은 그냥 의문사로 남아 있다/고금이 지금이 되는 지난한 세월 속에서”(「여강(驪江)에서 목은 이색(李穡)」) 현대사의 비극을 품고 흐르는 역사적 시간을 발견한다. 시에서 신륵사의 별칭이 ‘벽절’이라고 밝힌 것은 ‘벽절’이 이정표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벽절의 유래를 찾아보면 뱃사공들이 멀리서도 보이는 신륵사의 탑을 등대처럼 이정표로 삼아서 ‘벽절’이라고 불렸다 한다. 한때 비극은 역사가 되고 시련이 벽이 되는 것. 시인은 서산대사의 유명한 시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이리저리 함부로 걷지 마라.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답설야(踏雪野)」)를 떠올린다. 그리고 한때 자신의 한계였던 벽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이정표가 되는 역사적 현실을 목도한다.

시인은 점으로 존재했던 사건들에 거리를 두고 관조하는 여유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삼한시대에서 근현대사의 수많은 사건들을 살펴보건대 역사는 강물처럼 흘러왔음을 깨닫는다. 이 강물이 흘러 바다가 되는 것처럼 의도하지 않아도 “잘못 살아온 생도/잘 살아온 생도/이제 생각해 보니/흔들리는 물결”(「갈매기에 묻다」)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시인은 그토록 찾아 헤맸던 ‘아직도’가 ‘구름’이 흘러가는 것처럼 순간의 시학에서 발견하게 됨을 발견한 것이다. 이제 시인은 구름과 벗하며 살기로 한다. “신념에 찼던 그의 목소리가/구름이 되고/그를 쓰러뜨린 총소리는/푸르른 하늘이 되고/들꽃이 되고,”(「키릴로프」),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짧은 길/문득 바람이 불고/잔잔하던 물살이 술렁이면서/한오리 구름이 피어오른다”(「이윽고 그림자 하나가」), “기다리고 또 기다리면/그날이 온다고/바람과 구름과 새들도 말하네”(「미륵사지」), “왕궁리 오층석탑이/낮은 구름 아래 서 있다”(「왕궁리 오층석탑」), “어허, 무심타!/대구의 하늘은 검은 구름이 가득”(「위리안치」), “하늘을 흐르는 구름도/시간도 멈출 것 같은 순간을”(「김일손」) 구름은 자유의지가 아닌 바람의 의지로 흘러가는 것. 바람이 신이 보여주는 기척이라면 바람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사람들이 나에게 묻네

어쩌면 그렇게 힘도 들이지 않고

휘적휘적 잘 걷느냐고

나는 그들에게 말하네

걷는다는 생각도 하지 않고

여기저기 두리번거리고, 어정거리며

해찰하면서

바람과 구름하고 벗하며

걸어가는 것뿐이라고

그렇게 살다가 보니

여기에 이른 것이라고

─ 「사람들이 나에게」 전문

 

시인은 이제 ‘걷는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 단계에 이르렀다. 목적지에 도달하려는 것도 잃고 걷는 것 자체가 목적인 경지다. 그는 오히려 ‘두리번거리고, 어정거리며 해찰’할 때 보이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목적을 내려놓았을 때 ‘바람과 구름하고 벗’할 수 있다는 것. 그리하여 ‘아직도 걸어가는 것’을 견지하는 것이 삶의 자세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제 시인은 ‘걷는다’는 행위 자체를 의식하지 않는 구도의 경지에 다다른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을 갖게 된 것은 자신의 생을 돌아보게 된 여유에서 비롯된다. 시인은 “지상에서 떠나야 할 시간은/누구에게나/순식간에 찾아온다//봄 눈이 녹듯/바람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가듯”(「순식간에」) 지난했던 생도 돌이켜보면 순식간에 끝나갔음을 깨닫는다.

박태건 시인은 해설에서 “시인의 첫 시집(『꽃들의 자술서』)이 산의 서사라면 이번 시집 『아직도를 사랑하는 까닭은』에는 바다의 서정이 담겼다. 바다는 산골짜기에서 시작한 물줄기가 바위에 부딪치고 수많은 부침을 겪어도 닿게 되는 곳이라는 점에서 화쟁의 장소”라고 평한다.

“바다는 파랗고 하얗게 들끓고 있었다/세상의 한복판이 싸움터라는 걸/아는 것처럼”(「추암의 새벽」), “그리움이 눈물의 강이 바다에 이르면/모두가 꿈꾸는/미륵의 세상이 환하게 열릴 것이라고”(「미륵사지」). 신정일이 몸으로 기록한 인문지리학이 도달한 장소가 화쟁의 바다라는 점은 시사하는 점이 크다. 그가 이정표를 삼아 아슬아슬 지나온 산들의 이야기가 강물로 흘러 바다에 닿기까지 유장한 서정의 문법이 ‘아직도’인 것이다.

신정일 시인은 ‘아직도’를 견지하는 사랑의 힘으로 역사의 강물이 유장히 바다로 흘러갈 것을 믿는다. 미래의 어느 시간에도 신정일 시인은 ‘아직도’를 찾아 걷고 있을 것이다. 그는 머무는 자가 아니라 걷는 자이고, (길을)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걷는 것은 현재를 확인하는 행위이자 자신의 진짜 모습을 찾아가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독자들이여, 신정일 시인의 아름다운 서정의 문법을, 시의 행간을 따라 걸으며 진짜 나의 모습을 한번 찾아가 보자.


저자 신정일(辛正一) 시인

 

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이사장으로 우리나라에 걷기 열풍을 가져온 도보답사의 선구자다.

1980년대 중반 ‘황토현문화연구소’를 설립하여 동학과 동학농민 혁명을 재조명하기 위한 여러 사업을 펼쳤다. 1989년부터 문화유산답사 프로그램을 만들어 현재까지 ‘길 위의 인문학’을 진행하고 있다.

또한 한국 10대강 도보답사를 기획하여 금강·한강· 낙동강·섬진강·영산강 5대강과 압록강·두만강·대동강 기슭을 걸었고, 우리나라 옛길인 영남대로·삼남대로·관동대로 등을 도보로 답사했으며, 400여 곳의 산을 올랐다. 부산에서 통일전망대까지 동해 바닷길을 걸은 뒤 문화체육관광부에 최장거리 도보답사 길을 제안하여 ‘해파랑길’이라는 이름으로 개발되었다.

2010년 9월에는 관광의 날을 맞아 소백산자락길, 변산마실길, 전주 천년고도 옛길 등을 만든 공로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그의 저서로 자전적 이야기인 『느리게 걷는 사람』 『모든 것은 지나가고 또 지나간다』와 『가슴 설레는 걷기 여행』 『천재 허균』 『길을 걷다가 문득 떠오른 것들』 『왕릉 가는 길』 『홀로 서서 길게 통곡하니』 『조선 천재 열전』 『섬진강 따라 걷기』 『대동여지도로 사라진 옛 고을을 가다』(전3권) 『낙동강』 『영남대로』 『삼남대로』 『관동대로』 『조선의 천재들이 벌인 참혹한 전쟁』 『시집, 꽃의 자술서 시집』 『시선집, 그곳에 자꾸만 가고 싶다』 『신정일의 신 택리지』(전10권) 『신정일의 동학농민혁명 답사기』 등 100권이 넘는 저서를 펴냈다.

 


추천사

 

신정일 선생으로부터 ‘길’과 ‘글’은 모음 하나 차이라는 걸 배웠다.

길을 걷다 보면, 걷는다 생각하지 않고, 여기저기 두리번거리고 어정거리며 해찰하면서 살다가 보면, 길이 글이 되는 이치를 휘적휘적 앞서 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 알았다. 글에도 스승이 있듯이 길에도 어른이 계시다. 내 책장에 또 한 권의 길을 모신다.

- 손민호 중앙일보 레저팀장

길에서 쓴 시를 가슴으로 읽는다. 길 위의 사유와 길가의 풍경이 ‘걷는 사람’의 시가 되었다. 문득 뿌리내려 담장 오르는 능소화 앞에 발길이 멈출 때 유목과 정주의 먼 기원을 생각하며 떠나는 자의그림자는 시를 닮았다.

흔들리며 망설이며 시가 길 위에서 꽃처럼 피어났으니

그대여 받으시라.

- 김미옥 문예평론가


본문 속으로

 

나의 생활을 자세히 살펴보면

단순하기 이를 데 없다.

책에서 책으로, 길에서 길로 이어진 생활,

그 길에서 만나고 헤어지는 몇 사람들과

단조롭기도 하고, 경탄을 자아내게 하는 풍경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닌 ‘길 위의 사람’이다.

그렇게 길에서 보낸 나날이 많았고,

살만큼 살았는데도

가끔씩 길에서 길을 잃고 헤맬 때가 많이 있다.

이것이 나의 길인가 싶어서 안도하면서 잠시 걷다가 보면

그 평온하던 길이 어느새 사라지고 다시 악전고투의 시절이 돌아온다.

눈앞이 캄캄한 고난 속에서, 더 이상 걸을 수가 없다는 느낌이 올 때

기다리고 기다리던 시가 나온다.

“시는 곤궁한 다음에야 나온다.(詩窮而後工)”

구양수의 말을 실감하는 시간이다.

길은 잃을수록 좋다.

더 많이 길을 잃고 헤매야 하는 그것이 내 운명이다.

- 「시인의 말」, 본문 4-5쪽

 

내가 ‘아직도’라는 말을

사랑하는 까닭은

내 마음속에

이해할 수 없는,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그리움이

파도처럼 넘실거리기 때문이다.

내가 ‘아직도’라는 말을

사랑하는 까닭은

아직도 가야 할 미지의 곳이

섬처럼 남아 있다는 것이고,

걸어가야 할 길이

길길이 펼쳐져 있어서

잠시도 멈추지 않고,

아직도 가슴이 뛰기 때문이다.

내가 ‘아직도’라는 말을

사랑하는 까닭은

아직도 그 섬이

어딘가에서 푸른빛 단장을 하고

내게 들려줄 절절한 이야기를 간직한 채

여전히 나를 기다릴 것만 같기 때문이다.

- 「아직도를 사랑하는 까닭은」, 본문 14-15쪽

 

사람들은 말하네

기다리고 또 기다리면

그날이 온다고

바람과 구름과 새들도 말하네

잊어버리고 기다리면

그분이 오실 거라고

그리움이 눈물의 강이 바다에 이르면

모두가 꿈꾸는

미륵의 세상이 환하게 열릴 것이라고

오래고 오랜 세월이 지나서도

오지 않는 그날,

그 사람을 기다리다가 지친 사람들이 말하네

오늘이 아니고

내일이 아니라도 언젠가 꼭 오기는 올 것이라고

- 「미륵사지」, 본문 67쪽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꽃잎 13

아직도를 사랑하는 까닭은 14

흰 종이 위에 쓴 말 16

갈대 17

바다 18

갈매기에 묻다 20

몸살 21

순식간에 22

저것 봐, 저것 봐 23

밤손님께 24

파도 26

호박꽃 27

이 잡는 남자 28

소리 29

지리산이 말하지 않으면서 말을 했다 30

제2부

문 닫힌 점방 33

길 35

입도 없냐? 36

능소화 37

키릴로프 38

우체국에 가면 40

구절초 42

어디 있어요? 43

반딧불 켜진 밤에 44

강은 흐른다 46

시퍼렇게 살아 48

국숫집에서 49

여한이 없다 50

이윽고 그림자 하나가 52

광기의 시대 53

어디를 그렇게 바삐 가세요? 54

제3부

부안 솔섬에서 57

추암의 새벽 59

비인 오층석탑에서 60

김포 장릉의 재실 62

생일도生日島 64

차이 66

미륵사지 67

어청도 68

슬픔처럼 70

왜 이제야 왔어? 71

물 위에서 사는 사람들 72

왕궁리 오층석탑 74

하루에도 열두 번씩 변하는 76

태항산 78

내 사랑 소나무 79

북미륵암 가는 길 80

사람들이 나에게 82

제4부

두승산하斗升山河 85

개암사 겨울비 88

안이쁜이라는 여자 90

눈물 93

고사부리성에서 오사五死를 생각하다 94

김일손 96

나는 신랑 얼굴도 몰라 98

신화가 되고 역사가 된 사람 101

竹島를 죽도록 사랑했던 한 남자 104

위리안치圍籬安置 106

여강驪江에서 목은 이색李穡 110

그대에게 사랑한다 말할 때 112

봄눈 113

내 그리움은 114

해설

서정의 바다에 다다른 산의 서사_박태건(시인·문학박사)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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