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오늘의 드라마] 괴물 권하는 사회: 〈무빙〉
[2024 오늘의 드라마] 괴물 권하는 사회: 〈무빙〉
  • 한유희(만화평론가)
  • 승인 2024.02.28 14: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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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인간이 있다. 아무리 크게 다쳐도 회복되고, 엄청난 힘을 지니기도 하고, 오감이 발달하여 멀리 떨어진 곳에서 들리는 모든 소리를 구별하여 들을 수도 있다. 심지어 날 수도 있다. 〈무빙〉은 초능력을 지니고 있는 자들의 이야기다. 각자의 사연으로 국가의 안보에 이바지한다. 엄청난 능력은 무기다. 도무지 이뤄낼 수 없는 일들을 손쉽게 해낸다. 하지만 국가의 발전과 안녕을 위해 복무하는 이들은 이내 딜레마에 빠진다. 나의 생존과 국가의 명령을 위해 적으로 명명되는 타인의 생명을 너무나도 쉽고도 당연하게 빼앗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들을 어떻게 부를 수 있을까. 초능력자? 혹은 괴물?

 

괴물 혹은 괴물

〈무빙〉은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자연스럽게 호출한다.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새로운 생명체를 창조하겠다는 야망으로 흉물스러운 ‘피조물’을 만들어낸다. 없던 ‘존재’가 ‘만들어진’ 것이다. 물론 소설 속 박사는 자신이 만든 ‘피조물’의 흉물스러움을 견디지 못해 도망을 친다. 남은 괴물은 인간 사회에서 철저히 배제되고 증오의 대상이 된다. 〈무빙〉 또한 비슷하다. 그저 ‘초능력’을 갖고 있었을 뿐, 아주 평범한 사람이 국가 기관인 ‘안기부’를 통해 ‘괴물’로 창조된다. 소설 속 버림받은 ‘피조물’과 달리, 드라마 속 ‘초능력자’들은 철저하게 관리되며 ‘괴물’로서 탈바꿈된다.

하지만 진짜 괴물은 누구인가. 바로 ‘괴물’을 만들어 낸 자들이다. 소설과 드라마 속의 ‘괴물’들은 ‘없던’ 존재였다. 그들은 ‘괴물’로서 (재)탄생을 원하지 않았다. 탄생을 원한 것은 자신의 업적을 위해서 괴물을 만들어낸 자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너무나도 쉽게 타인의 삶과 주체성을 위협한다. 동시에 그들은 스스로를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칸트식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이미 괴물이다.

하지만 괴물들은 다르다. 소설 속 ‘피조물’은 사람들과 어울려 살며 사랑을 주고받기를 원했다. 몰래 언어를 배우고 다가서지만, 사람들에게 ‘피조물’은 그저 ‘괴물’일 뿐이었다. 〈무빙〉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작전 명령에 따라 적을 소탕한다. 하지만 그들은 최소한의 희생을 위해 노력하고, 일부러 작전에 실패하기도 한다. 누구보다도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타인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하지 않는다. 〈무빙〉에서 초능력자들이 펼치는 화려한 액션신보다 인간적인 모습이 눈에 더 들어오는 이유다. 그들은 ‘휴머니즘’이 가득한 ‘휴먼’일 뿐이다.

휴머니즘 없는 휴먼 사회

하지만 지금-여기의 한국 사회에서 ‘휴머니즘’이 통용될 수 있을까? 언제부터인가 한국 드라마는 윤리도 도덕도 부재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것만이 유일한 목적이자 목표가 되는 작품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들 드라마가 추구하는 것은 결국 ‘생존’이다. 누구도 지켜주지 않는 현실에서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살아남아야만 하는 것이다. ‘어떻게 되든 살아남는 것’이 삶의 제1법칙으로 작동한다.

피스크는 대중적 텍스트 자체가 의미와 즐거움을 부추기고 도발할 뿐, 대중이 받아들일 때야 비로소 완성된다고 한다. 즉, 최근의 인기 드라마들이 지니고 있는 세계관을 대중이 당연하게 수용하는 것은 이미 왜곡되고 뒤틀린 현실을 너무나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결국 살아남기만 하면 되는 ‘괴물’을 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무빙〉 또한 생존의 서사가 주가 된다는 점에서 보면 유사하다. 하지만 변별점이 있다. 〈무빙〉은 ‘어떻게 되든 살아남는 것’이란 제1 법칙에서 ‘어떻게’에 방점이 찍혀있다. 무조건적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다 저버려야 한다는 기치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다. 살기 위해서 지켜야만 하는 것들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가족, 사랑, 우정, 정의. 우리가 잊고 지냈던 소중한 가치들을 되새김한다.

 

어쩌면, 괴물의 재탄생

도덕적인 존엄성이 훼손되고 파괴된 세상에서 초능력을 지닌 아이들은 여전히 해맑을 수 있다. 아이들은 아낌없는 사랑과 보호를 받았기 때문이다. ‘괴물’, 즉 초능력자인 부모가 그들을 지키기 때문이다. 자기 능력이유전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부모들은 선택은 모든 것을 스스로 감당하고, 숨기고 도피한다. 능력은 곧 그들에게 독이 되었기 때문이다. 괴물로서 존재할 수밖에 없는 능력은 감추어야만 하는 비밀이 된다.

하지만 그들이 괴물로 살게 된 것은 능력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한 번도 보호받아본 적이 없었다. 사회에서 내몰린 존재이기에 올바른 방향을 알 수 없었다. 거시적인 이념 전쟁 속에서 사용 가치로 평가받을 아이들의 삶을 거부하기 위해 〈무빙〉 속 어른들은 ‘너는 결국 내가 되겠지’라는 체념적 선언에서 벗어나 목숨을 바쳐 아이들을 지킨다.

하지만 〈무빙〉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감추고 보호받는 것만이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고 역설한다. 자신의 능력을 써야할 때 쓸 수 있어야만 제대로 성장을 이룬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어떻게든 땅에 붙어있기 위해 과식을 하고, 물을 마시고, 모래 주머니를 차던 봉석이는 천천히 자신의 힘으로 세상에 나간다. 봉석이는 더 이상 자신의 능력을 숨기지 않는다. 자신의 능력으로 영웅의 꿈을 이룬다. 괴물과 사람은 한 끗 차이다. 지켜야할 가치를 알게 되었기에, 보호를 받고 사랑을 알았기에 괴물은 사람이 된다. 〈무빙〉은 결국 괴물이 사람으로 움직이는moving 이야기다.

 

 

사진제공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한유희 만화평론가. 《쿨투라》 웹툰평론 부문 신인상으로 등단. 2021년 만화평론 공모전 우수상 수상. 경희대학교 국제캠퍼스 후마니타스칼리지에서 글쓰기를 강의하며, 경희대 K-컬처 스토리콘텐츠 연구원으로 웹툰과 팬덤을 연구. 저서로 『한국 만화 캐릭터 열전』을 공저.

 

 

* 《쿨투라》 2024년 3월호(통권 117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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